文人畵

[스크랩] 한국 문인화의 진로/최병식

율카라마 2008. 11. 4. 22:35

   21세기 한국 문인화의 진로

                                        

목차


1. 서론

2. 文人畵의 정의

 1-1 문인화의 개념

 1-2 詩書畵의 三絶

 1-3 四君子

 1-4 문인화의 형식과 소재

3. 근현대 한국문인화의 인식과 위치

4. 현대 한국문인화의 반성과 비판

 4-1 문인화의 개념정립 결여

 4-2 한국적 문인화의 현대화와 정체성 비판

5. 국민교양적 예술로서의 가능성

6. 결론



1. 서론


 이 연구는 최근 논의되고 있는 전통예술의 현대화와 그에 따른 현대한국문인화의 올바른 위상정립과 문제점을 성찰해 보고자 기술되었다. 그 범위는고대부터 詩書畵 三絶이라는 문인화의 원천적인 정의와 개념정립을 개관적으로 살펴보고, 근현대 한국문인화의 위상에 있어서 서예적 장르로 포함되어왔던 학술적, 현실적인 부당성과 소재적인 면에서 협의의 시각에서만 제한되어온 관행에 대한 비판, 그리고 전통과 현대적 이중구조를 형성해야된다는 점을 논급하였다.

 또한 거듭나야 되는 의식의 개혁과 창의성의 계발, 진정한 현대문인화로서의 변혁을 요구하는 거시적인 보편성, 타장르와의 교류를 통한 과감한 영역확장과 범예술적인 차원의 정체성확립에 관한 공동적인 대처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의 정체성(Identity)이 어느 때 보다도 요구되고 있는 점과 국민교양교육으로서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 방안으로서 그간 관심밖에 있었던 전통예술에 대한 이해와 정서교육적 차원에서 동양화 서예분야와의 긴밀한 공조를 통한 교과과정 개설 등도 현실적으로 국민교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안임을 연구하였다.



2. 문인화의 정의


 2-1 문인화의 개념


 문인화의 개념은 본래 고대 중국에서 사대부들이 詩, 書, 畵 三絶을 근간으로 하여 전개해온 경지를 말한다. 그러나 이같은 개념의 문인화는 고대로부터 광의의 의미에서 정의될 수 있는 경향이나 작가들이 있었으나 명확한 개념정립이 이루어져왔던 것은 아니며 그 어휘를 직접 사용한 것은 명대 말엽의 莫是龍, 董其昌, 陳繼儒 등 華亭三名士가 전개한 이른바 南北分宗論이 그 시초이다. 당시 그들 중 동기창의 글을 살펴보면


 문인화는 당대 왕유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후 동원, 거연, 이성, 범관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고 이용면, 왕진경, 미불과 미우인 등은 모두 동원과 거연으로부터 터득하여 졌다. 이어서 원사대가 즉 황공망, 왕몽, 예찬, 오진 등은 모두 이러한 것을 바로 전한자들이며, 우리시대에 이르러서는 문징명과 심주가 이를 또한 멀리 전습하고 있다.

 文人畵者王右丞始, 其後董源, 巨然, 李成, 范寬爲嫡子, 李龍眠, 王晉卿, 米南宮及虎兒, 皆從董, 巨得來, 直至元四大家黃子久, 王叔明, 倪元鎭, 吳仲奎皆其正傳, 吾朝文, 沈則又遠接衣본.2)



라고 하면서 이사훈화파는 우리가 배울것이 못된다고 폄하하는 이론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그들 세사람이 적자라는 단어까지 써가면서 상찬하려는 이른바 남종화가들의 명단과 문인화가들의 명단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하여 王維를 문인화의 시조로 보는 점에 있어서도 남종화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후세의 명대 沈顥가 쓴 《畵塵》에서도 왕유를 “爲文人開山”이라 하여3)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근대의 張思珂역시 같은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4)

 그러나 근대의 陳衡恪은 그 개념은 비슷하나 문인화의 유래를 보다 멀리 연원하려는 이론을 남기고 있다.


 문인화의 유래는 매우 오래되었다. 한대의 채옹으로부터 장형 등의 명성은 비록 그 그림이 어떠하였는지를 직접 대하여 본 자는 없다고 하지만 많은 역사적인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육조에는 노·장학이 성행하여 당시 문인들은 세상을 초월하는 사상을 함유하게 되고 물질의 욕심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져 자유분방한 정치를 발휘하여 고광청정한 지경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종병 왕미 등은 산수의 일면으로서 자신의 사상과 인격을 표시하였으니 그러한 고로 그들에게는 화론이 있었다. 또한 소동파의 시중에 쓰인 종병의 그림에 대한 제발에서는 문인사상의 상합을 능히 가늠할 수 있다 하겠고, 왕이 왕희지 헌지 일가는 그 태도가 매우 명확하였다. 이러한 조류는 이후 점점 발전되어 당의 왕유 왕흡 왕재 정건 등에 다달아 일대 극성을 이루게 되었으며, 당의 왕유는 남종의 창시자로 추종받기에 이르른다. 그리고 당시의 시가는 회화와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송, 원, 명, 청 역대를 두고 끊어지지 않았다.

 文人畵由來久矣, 自漢時蔡邕, 張衡輩皆以畵名, 雖未其畵之如何, 周己載諸史籍. 六朝莊老學說盛行, 當時之文人含有超世界之思想, 欲脫離物質之束縛, 發揮自由之情致, 奇託於高曠淸靜之境. 如宗炳, 王微, 其人者, 以山水露頭角, 表示其思想與人格, 故兩家皆有畵論. 東坡有題宗炳畵之詩, 足見其文人思想之契合矣, 王, 王羲之, 獻之一家, 則皆旗幟鮮明. 漸漸發展至唐之王維, 王洽, 王宰, 鄭虔輩, 更蔚然成一代之風, 而唐王維又推爲南宗之祖, 當時詩歌論說, 皆與畵有密切之關係, 流風新被, 歷宋元明淸, 綿綿不絶…5)



 위의 문장에서는 문인화의 근원이 보다 더 고대로 올라가고 있다. 그 이유로서 종병, 왕미 등 위진남북조시대의 현학적인 영향을 받았을 작가이자 화론가들이 지닌 고광청정하고도 자유분방한 사상과 인격이야말로 곧 시서화 삼절을 추구하는 문인화가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점에서는 王羲之부자까지도 그 태도가 명확하다하여 범주에 포괄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사상과 문장력, 서법의 경지를 모두 포함하였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지금껏 서법가들이 문인화의 범주에 거론되어온 예가 없었던데 비하면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더하여 이점은 송대 이후의 많은 작품들에서 화제를 즐겨함으로서 회화에서 다하지 못한 意趣와 詩情을 다시 화제에서 표현하고 있는 등 서법과 회화, 그리고 詩歌가 그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당대의 왕유를 화정삼명사가 문인화의 시조로 보고 있는 것이나 여타의 학자들이 동일하게 문인화의 주요작가로 보고 있는 점은 크게 보아 세가지의 요소에서 비롯된다.

 첫째는 왕유가 李白, 杜甫, 孟浩然과 함께 盛唐4桀이라고 칭할만큼 사상적인 수양과 문학적인 경지가 높았고 두 번째로는 수묵의 시조라고 있컬어 졌을 만큼 회화적인 위치를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화원화가들이나 직업화가들과는 달리 노년에는 輞川에 들어가서 자유스러운 逸氣를 묵필에 담았기 때문이다. 이점은 이후에도 많은 선비화가들이 직업적이기 보다는 餘技로서 필획을 유희하게 되는 점과 동일하다.

 이점은 당시로서는 李思訓류의 이른바 북종산수에 상대적으로 비교될 수 있는 점이다. 이와 같은 요소는 곧 이후의 문인화적 필수요건이 되었는데 송대의 「문인화 삼걸」이라고 일컫는 蘇東坡, 文同, 黃山谷 역시 바로 왕유와 같은 詩書畵 三絶이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명대의 文徵明과 沈周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같이 남종화가들이면서 수묵 중심의 삼절을 이룬 자들이었다.

 특히 송대 문인화가들이 이룬 物我兩忘과 身與竹化사상은 문인화의 사상적 근간으로서 그 후에도 많은 작가들의 이상적인 경지가 되었다.


나는 일찌기 그림을 논함에 있어서 인물 금수 궁실 기물은 모두 상형이 있고 산 물 대 나무 물결 연기는 비록 상형은 없으나 상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상형을 잃게 되면 사람들이 모두 알지만 상리가 부당함은 비록 그림을 잘 아는 자라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무릇 세상을 기만해서 명성을 얻은 자는 필히 상형이 없는 것에 의탁하게 된다. 비록 그러하지만 상형을 잃으면 잃은 것에만 그치게 되고 그 전체가 병이 들게 하지는 않지만 만일 상리가 부당하게 되면 그림의 전체를 망치게 된다. 그 형상이 무상하기때문에 그 이(理)를 삼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의 공인(畵工)들은 혹 그 형상을 곡진하게 그려낼 수 있지만 그 이(理)에 이르러서는 고인일사(高人逸士)가 아니고는 못 그린다. 문동의 대나무 돌 고목은 진실로 그 이(理)를 터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살고, 이와 같이 죽고, 이와 같이 휘감아 오르다가 마르고, 뻗어서 무성한 숲을 이루고 뿌리와 줄기, 잎과 마디, 각각 잎과 마디의 맥락이 통하듯 천만 변화하여 처음부터 서로 모방하지 않았지만 각각 제자리에 맞아 하늘의 조화에 합치되고 사람의 뜻에 만족하게 되니 달사(達士)가 의탁한 바가 아니겠느뇨?

 余嘗論畵, 以爲人禽宮室器用 皆有常形. 至於山石竹木, 水波煙雲, 雖無常形而有常理. 常形之矣, 人皆知之. 常理之不當, 雖曉畵者有不知故凡可以欺世而取名者, 必託於無常形者也. 雖然. 常形之矣. 止於所失, 而不能病其全. 若常理之不當,則擧廢之失. 以其形之無常, 是以其理不可不謹也. 世之工人, 或能曲畵其形, 而至於其理, 非高人逸才不能辨. 與可之於竹石枯木, 眞可謂得其理者矣. 如是而生, 如是而死, 如是而攣拳, 如是而條達遂茂, 根莖節葉, 牙角맥縷, 千變萬化, 未始相襲, 而各當其處, 合於天造, 厭於人意, 蓋達士之所寓也歟?6)



 소동파의 이 글에서는 이미 중국의 미학사상적인 바탕을 이루어온 노장사상 이후의 荊浩나 張璪의 이론을 근간으로 常理사상을 논하는 등 화가로서 사상가로서 양자를 겸비한 대표적인 문인화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2-2 詩書畵의 三絶


 이미 살펴보았듯이 문인화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詩書畵의 三絶이다. 그런데 여기서 三絶이란 詩가 오늘날의 시적인 협의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서 시는 사상이요 철학이요 문학이요 학문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정신적인 일체의 경지를 포괄하고 있다.

 다시 書는 단순히 글씨의 표상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품격의 수양을 말하고 있으며, 마음의 거울같은 형상으로서 나타나는 조형적 현현을 바로 글씨로 본 것이다. 여기에 畵는 양자의 경지가 조화를 이루어서 표현되어지는 단계로서 가장 복합적이기도 하고 또한 가장 후자의 단계라고도 볼 수 있다. 만일 후자의 단계라고 본다면 반대로 시는 가장 먼저 터득해야할 문인화의 기초단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삼절사상은 각기 세가지가 일체화되어질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들로서 자연스럽게 「詩畵一體論」와 「書畵一體論」형성되어졌다. 더하여 이는 선비들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기도 하여 문인화는 곧 높은 경지에 이른 선비들의 필수적인 요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마힐(왕유)의 시를 음미해 보면 시 중에 그림이 있다. 마힐의 그림을 바라보면 그림중에 시가 있다. 시에서 말하기를 「남계에는 하얀 돌이 솟아나 있고 옥천에는 붉은 잎들이 드문드문하다. 산길에는 비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하늘의 푸른 기운이 옷깃을 적시누나라 하였다. 이것은 마힐의 시다. 어떤 사람이 혹 말하기를 아니다. 일저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마힐이 남긴 시의 뜻을 보충한 것이다 」라 하였다.

 味摩詰之詩, 詩中有畵;觀摩詰之畵, 畵中有詩. 詩曰藍溪白石出, 玉川紅葉稀, 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此摩詰之詩. 或曰非也, 好事者以補摩詰之遺.7)



 화는 붓으로 물상의 모습을 그리며, 단청을 많이 운용하게 된다. 단청은 기교와 생각에 입각하게 되며 만물은 형상을 피할 수 없다. 시도 물상의 모습을 그리되 단성을 많이 운용하게 된다. 단성은 빼어난 글귀에 입각하게 되며 만물은 정을 피할 수 없다.

 畵筆善狀物, 長于運丹靑;丹靑入巧思, 萬物無遁形. 詩畵善狀物, 長于運丹誠;丹誠入秀句, 萬物無遁情.8)



 위의 소동파가 쓴 문장은 시화일률사상을 간파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는 畵 이전에 그 사람의 정신적인 수양과 性情이 심오하여야 만이 기교에 치우치지 않는 常理의 세계 즉 만물의 본질을 깨달아 그 이치를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된다는 것이다.

 문인화가 갖는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외형적으로 보면 만물의 형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회화의 세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뿌리가 고도의 철학에 있으며 만물의 이치나 형상의 사유적인 과정과 결과로서의 심미의식으로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근본으로 하고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기본적인 문인화의 사상과 개념은 동일하게 인식되어 왔으며 조선시대의 金正喜를 비롯해서 후기의 많은 선비들이 三絶세계를 동경하며 餘技的으로도 墨香을 가까이 하였다. 대원군과 민영익 등은 대표적인 인물이며 유교적인 덕목으로서만이 아니라 불가나 道家的인 경우에도 모두 애호하거나 이상적인 세계로 여겼다.

 한편 六藝적인 개념으로서의 문인화는 禮 樂 射 御 書 數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이는 중국의 卿大夫이상의 자제가 배우는 교양과목으로서 《周禮》의 〈地官〉에서 말한 禮容 奏樂 弓射 馬術 書寫 算數중 書寫의 개념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특기할 것은 이미 여섯 가지의 항목을 모두 섭렵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면 여기서의 글씨와 그림은 단순한 의미로서가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정신적 수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서는 이미 고대에서부터 선비들의 교양적인 과목으로서 후대의 수묵위주의 비직업화가들을 중심으로한 華亭三名士들이 주장한 편파적인 개념의 문인화적 정의와는 다르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폭넓은 의미로서 선비들에게 교양적이고 餘技的인 의미에서 다루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근거에 의해서 문인화의 일반적인 형식은 대체로 그림과 함께 화제를 곁들이게 되며 전반적으로 고도의 학문과 품격이 중심이 되는 文氣가 스며있어야만 문인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특기할 것은 화제가 필수적인 요소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이론이 제기 될 수 있는데 이점은 어데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일 뿐이며 그것이 필수적인 요소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시조라고 불리운 왕유 마저도 직접적으로 그림에 화제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명대에도 간단한 서명정도로 그치는 글씨가 많았던 점이나 신문인화가들에 있어서는 제백석을 중심으로 훨씬 더 파격적으로 소재나 표현기법이 변화를 추구하고 화제형식도 그 유무를 가리지 않았던 많은 예에서 쉽게 증명된다.


 2-3 四君子


 본래는 松竹梅의 歲寒三友에서 비롯되어 蘭을 추가한 개념으로 四君子는 儒家적인 시각이 비교적 많이 작용되어 형성된 문인화의 소재들로서 고결한 군자의 기품과 절개를 가장 함축적인 경지로 표현하련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며 당대부터 시작되어 송대에 이르러서는 蘇東坡와 文同, 黃山谷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애호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묵매는 華光仲仁 楊補之 등이 유명했으며 당시 특히 죽에 대한 상찬은 身與竹化와 胸中成竹의 사상으로 대표된다.

 명대에 춘하추동의 사계절을 의미하여 즐겨그리기도 했으며 陳繼儒는 《梅蘭菊竹四譜》를 남겨 문헌적으로도 기록을 남기고 있다. 淸代의 鄭燮은 蘭과 竹에 특히 심취하여 경지를 이루었고 양주팔괴나 금릉팔가에 의해서는 이와같은 사군자적인 소재개념이 보다 자유스럽게 확장되어 소나무나 연 갈대 화훼류 일체 물고기나 곤충 등을 동시에 포괄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 문인화의 새로운 경향을 선보였다.

 근대에 들어서는 趙之謙과 吳昌碩 任伯年 齊白石 등 이른바 신문인화파들에 의해 청말시대 보다도 더 더욱 광범위한 범주에서 포괄적인 소재를 구사하게 되었으며 吳昌碩과 任伯年의 경우는 산수화 까지도 사군자적인 개념으로 구사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얼마전 이미 개성에 있는 고려 태조의 왕건릉에서 세한삼우도가 발견되어 당시부터 문인화적인 意趣가 수용되어 어느 정도 유행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이후 많은 선비들에 의해 유희되어졌다. 어몽룡의 묵매나 이정과 신위 김정희 민영익의 묵죽, 대원군의 묵매 등은 사군자를 소재로하여 묵향을 유희한 경우이다.


 2-4 문인화의 형식과 소재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인화의 시조를 누구로 하는냐는 문제는 남아 있으나 고대에 문인화를 유희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문인화의 정의가 형식이나 소재의 제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이 자명하다. 그 보다는 그들의 품격과 정신세계의 詩情性과 격조를 중요시하였으며 그 범주는 산수화에서부터 화훼화에 이르기까지 제한된 예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선비들에게 시서화 삼절이라는 전제를 두어서 그들의 종합적이고 개념적인 의미에서 삼자간의 유기적이고 일체화될 수밖에 없는 경지를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의거하여 보면 일반적으로 선비들의 필수적인 문자표현인 글씨를 씀에 있어 자연히 문방사보를 가까이 하게되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상징할 수 있는 간략한 소재들이 본격적인 산수나 인물 등 회화보다는 용이하게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선호되었다.

 그러나 그 소재가 결코 사군자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秋史 역시 묵난도 뿐만이 아니라 그의 사상적인 근간인 文字香 書卷氣 넘치는 산수화까지 남기고 있으며, 그의 훈도를 받은 田奇 許小痴 역시 산수까지도 즐겨하였다.

 사군자가 문인화에서 갖는 의미는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고대로부터 歲寒三友의 개념이 형성된 이후로 절개를 상징하는 뜻에서나 가장 간결하면서도 오묘한 형상과 각기 다른 변화를 이루고 있어 명대의 진계유가 기록하고 있듯이 비교적 핵심적인 소재로서 문인화가들에게 애호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소나무 포도 연 복숭아 조롱박 갈대잎 등과 기러기 학 등 일련의 花卉와 鳥類가 즐겨 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3. 근현대 한국문인화의 인식과 위치


 동양미술사에서 근대의 출발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1840-1842년 중국의 아편전쟁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전쟁은 곧 그간 천하가 자신들의 지존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는 유아독존의 사상을 최초로 자각하게 한 사건으로서 중국이 유구하고도 심오한 정신문화와 문화적인 유산에 근거한 지존의 관념 대신 과학적인 혁명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계기로서도 평가된다.

 그러나 이후의 중국이 과학의 근대화에도 실패하자 그간의 문화적인 역사성 마져도 한순간에 근대적인 유산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한국과 일본 등지의 근대문화는 그간의 중국중심의 가치관을 벗어나 각기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해가게 되었다. 그 가장 거시적인 변화는 文史哲로 대표되는 관념적이고 종합적인 사상과 학문체계가 각기 미시적인 형태로 분류되어져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모든 문예사상과 장르가 이와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각기 서구적인 영역사의 독자성을 확보해가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예로 그간 조선시대는 물론 근대에까지도 「서화미술회」나 「서화협회」 「교남서화연구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書와 畵를 병칭하여 하나의 영역으로 여기고 書畵로 불리워졌던 것이 미시적으로 세분되어 오늘날의 미술이라는 용어로 변하게 되고 書는 다시 畵의 개념과 분리되어져서 독자적으로 書藝라는 신조어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는 즉 시서화 삼절이라는 오랜동안의 기본질서나 가치관이 순식간에 붕괴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삼자간의 고별과 함께 書가 인격의 수양이나 품격을 상징하는 여기적인 의미보다는 하나의 예술적인 분야로 변신을 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단순히 書法이라는 용어를 써서 기존의 書가 갖는 의미를 세분하면서도 그 법만을 터득하면 된다는 보편적이고 거시적인 의미로 규정하고 있고 일본은 書道라 하여 그 정신적 大道로서의 수양적 의미를

어느 정도 간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에서는 1922년 출범하는 鮮展에서 독립적으로 동양화와 서양화라는 영역의 설정과 함께 서예라는 영역이 문인화나 사군자를 포괄한채 독자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9)

 그러다가 2년 뒤 1924년 3회 부터는 서예에서 사군자를 독립시켜서 김규진 김돈희 이완용 박영효 민병석 서병오가 심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32년 11회에는 다시 동양화로 병합되어 제도편이 이루어졌다.

 1949년 새롭게 출발한 국전에서는 다시 사군자가 서예로 병합되었으며 당시 영향력을 발휘한 작가는 고희동과 손재형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74년 23회전에 사군자가 서예로 포함된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사군자부문으로 독립되었다가 반대의견에 부딪쳐 이듬해 서예에 포함되었고10)

 최근까지 민전 이후로도 문인화는 사군자로 인식되어오면서 서예의 부분적인 영역으로 자리해왔다.



4. 현대 한국 문인화의 반성과 비판


 4-1 문인화의 개념 정립 결여


 현대 문인화의 개념이 소재적인 측면에서 뿐 아니라 독자적인 장르로서 보다 많은 변신과 활동을 못하게 된 것은 이미 일제시대 총독부의 문화정책일환으로 출범한 1922년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규정되었던 단초로부터 시작하여 국전시대와 민전시대까지 거의 서예에 예속된 범주로서 흡사 서예의 취미적인 餘技로 사군자만을 취급하게되는 것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문인화의 본질이 詩書畵 三絶에 있으며 그 영역을 나누어 본다고 하면 이미 다른 장르가 세분화되어 있는 현실에서는 이른바 남종화라고 불리우는 수묵화의 성격과 서예의 통합적인 장르로서 당연하게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어야하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장르상의 특징은 고사하고 문인화가 마치 사군자에만 국한되어있는 것처럼 오도된 것은 그 영역을 제한하려는 의도적인 요소가 깃들어져 있다고 보여진다.

 이를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오류를 정리해 보면

 1) 장르규정의 오류

 문인화가 서예로 포함되어 사군자로 취급되는 것은 본래 서예가 갖는 문자를 중심으로 하는 예술이라는 의미가 조형적 필획의 형상성을 구사하는 회화적 개념을 주로하고 있는 문인화를 포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오류이다.

 이는 서예가 문인화와는 끊어질 수 없는 밀접한 영역으로서 동질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지니고는 있지만 이미 각 장르가 독립적으로 나뉘어진 이때에 제도적으로나 인식적으로 마치 서예의 예속된 영역으로까지 간주되는 예는 더군다나 불가하다. 더하여 이같은 오류는 서예 역시 고도의 품격과 학문의 체현으로 발현되어지는 독자적인 문자예술로서의 논리를 불확실하게 하는 요소이다.

 2) 소재범위의 오류

 문인화의 소재는 물론 사군자가 갖는 대표성과 중요성은 유지되어야 하지만 당연히 본래의 개념인 詩書畵 三絶에 기인하여 삼자의 겸비가 요구될 뿐 그 소재의 제한은 없어야 한다. 이는 최근 그토록 전통적 국수주의로 지적되고 있는 소재주의적인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문인화는 그 고도의 내면적 사유와 정신성으로부터 비롯되는 학문과 품격을 대변하는 서예를 전재로 한 유희적인 필묵의 세계이다.

 3) 동양적 통합적인 개념의 정의

 절대개념으로 전승되어오는 동양식의 전통적인 예술을 서구적인 인식에 포괄하려는 것은 오류로서 만일 그 장르를 서구식 형식에 의해서만 세분한다면 비주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文史哲 즉 문학 사학 철학이 유기적으로 일원화되어 있는 동양의 모든 사상체계가 그렇듯이 문인화 역시 미시적인 분류로는 불가능한 종합적이고, 관념적 성격에 의해 형성되어졌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통합적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11)



 4-2 한국적 문인화의 현대화와 정체성 비판


 뵐프린(Wolfflin1864-1945)은 어느 시대에나 가능한 예술은 없다고 했다. 이 말은 곧 Hegel(1770-1831)이 예술이 사멸할 수도 있고 했던 말과 연결되는데 이는 예술 그 자체가 태초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형성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그 형성되어 가는 과정과 가치관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과 같이 전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에 속하는 지구촌시대에는 각 민족과 국가적인 개념이 희박해져가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문화의 대혼란과 수직 수평적인 이동이 예고되고 있다. 이것은 곧 어떠한 문화가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헤겔의 예언을 가능케 할 것이며 이미 여러 곳에서 그와 같은 현상이 비롯되고 있다.

 마치 고대의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 2세기까지의 찬란했던 마야문명과 15-16세기 세계적으로 번성했던 잉카문명, 이집트문명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듯이 그와 같은 예고는 가깝게는 우리 문화나 미술계에도 점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20세기 동안 근현대화의 명목으로 우리문화의 전통성이 급격하게 단절되었고 거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서구적 가치관과 사상적 기반으로 대체되어지는 현실을 보다 철저한 검증과 재해석이 없이 수용하고 모방하여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뒤늦었지만 최근의 전통문화에 대한 많은 관심이 급증하고는 있지만 그 형태나 접근방식 조차도 지극히 서설적이며 3차 학문에만 치우쳐서 기초학문과 예술구조를 섭렵해나가지 못한 채 단견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처방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명확히 말하면 최근의 이와 같은 현상은 결국 서구문화의 철저한 철학적 근거와 사유체계에 의한 휴머니즘 이후의 다양하고도 사변적인 구조와의 보다 직접적인 비교를 통해 그 상대적인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특히나 실용학문 최우선으로 부르짖는 최근 고등교육의 방향은 절대학문의 미래를 지극히 어렵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현대문인화의 좌표는 한마디로 사멸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좌표는커녕 동양미술의 가장 절대경지를 이루어 왔던 자존과 전통적 사상은 잊혀져가고 그 독자적 장르마져도 제도적으로 서예에 귀속된 채 이렇다할 체계적인 연구와 현대적인 변신이 시도되어지지 못한 점은 거시적으로 보면 미술계 전체를 위해서나 진정한 서예의 현대적인 변신을 위해서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문인화는 곧 한국미술의 전통성을 가장 심도있게 간직한 장르 중에 하나이며 따라서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로도 전통회화와 맞물려서 가장 정체적인 변신의 가능성이 있는 분야임에 틀림없다. 더군다나 이와 같은 여건에서도 크게 보아 약 일천 오백여 명 정도의 작가들이 전국적으로 잠재되어 그 나름대로의 활동을 해왔다는 사실은 이같은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반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웃 일본에 잠재된 미술과 서예인구가 수백만에 달하며 그 어려운 경제 정치적인 여건에서도 중국인들의 생활화된 전통적인 문화예술에 대한 애호와 정체적인 입장에서의 현대화와 국제화는 바로 오늘의 그들이 있게 하는 저력이며 문화의 주권을 강화하는 첩경이다. 최근의 아시아 미술시장을 급격하게 팽창시키고 중국영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들만의 정체적 영상미학을 탄탄한 기초로하여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면서 세계 무대에서 일대 변혁을 일으키는 그들은 결코 서구문화의 예속을 용납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인화의 현대적 변신에 관한 문제점비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자기 반성과 검증

 현대적 전환과 시대적 요소에 부응하는 자기 반성과 변신의 요구이다. 이는 심오한 동양적인 전통성을 지닌 대표적인 장르로서 가장 고차원의 예술세계를 구가했던 역사적 유산을 바탕으로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시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떤 장르보다도 유리한 자양분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2) 세계적 보편언어로서의 가능성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문인화는 그 형식 보다도 儒家사상과 道家의 老莊子사상 등 고도의 정신세계에 그 본질을 두고 있으므로 해서 문인화 스스로의 정체성확립은 곧 관련 예술과 미술분야에 무한한 사상적인 바탕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파리에서 세계적인 작가로서 활약하였던 고암 이응노의 뿌리가 김규진의 문인화에서 비롯되었고 실제로 그 자신도 鮮展에서 문인화로 수업하여 동양정신을 깨우친 것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음악가 윤이상의 근간이 곧 한국의 전통음악 중 궁중음악에서 비롯되고 있음도 그렇고, 동양화는 특히 그러하지만 장르를 막론하고 현존하는 원로작가를 비롯한 많은 중진작가들의 문인정신과 漢學은 곧 그들의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전통성과 현대적 실험의 병존

 문제는 어떻게 문인정신을 현대화하느냐는 논제이다. 이점은 문인화가 바로 문인화적인 범주로서만 남아있겠다는 협의적인 안주나 국수적인 발상은현대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은 결론적으로 이원적인 구조로 설명될 수 있다. 즉 근간에서는 三絶의 사상적 요체와 사군자나 여타의 소재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기법과 필획을 거쳐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일면에서는 근대 이후의 20세기에 명멸했던 전위적 현대사조를 섭렵해가면서 동서양화나 판화 조각 공예 듸자인 등과의 유기적인 응용과 상호 보완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이는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의 사상적 사유체계와 근현대 철학을 바탕으로한 학문의 연구, 기법의 실험과 재료적인 연구를 통해 작가 개개인의 창의성을 확보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일관된 사숙체계에 의해서만 교육되어지는 것이 대다수 우리의 풍토이다. 이 역시 보다 자유로운 형태로 다원화되어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문제는 비단 문인화만의 문제는 아니며, 거시적인 범위에서의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비젼과 시대적인 공감대에 근거한 페러다임을 형성해 가야하는 우리 예술 전반의 문제와 맞물려 있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같은 이원적인 노력은 모든 장르를 초월하여 논의되고 조명되어져야 할 과제이며 진정한 전통은 그 전통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는 다소 극단적인 말에서도 그 진정한 계승을 엿보게 한다. 그것은 예술이 있게하는 심장과도 같은 의미의 창조인 것이며 그 창조를 통해서만이 전토의 진정한 계승은 가능한 것이다.

 한국 문인화의 표상처럼 여겨져온 秋史 金正喜가 오늘 우리 곁에 함께 존재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 것인가 하는 직선적인 문제로 다시금 위의 문제는 답변될 수 있다.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지 않으면 그것이 손가락 끝에 드러나 피어날 수 없다

 又非有胸中文字香, 書卷氣, 不能現發於腕下指頭12)



 난초를 치는 법은 역시 예서로 쓰는 법과 비슷해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蘭法亦與隸近, 必有文字香書卷氣, 然後可得13)



 이는 추사의 사상이다. 그의 이러한 사상적 근간에는 바로 문인화에서 첫 번째로 거론되고 있는 詩의 요소인 文字香과 書卷氣가 전재되어야 한다는 뜻이 강조되어있다. 이 말은 곧 문인화가 형상에 치우친 技藝的인 화려함과 감각에만 젖어서는 아니 되며. 고도의 학문과 품격을 겸비해야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意在筆先 胸中丘壑 胸中成竹14)

 이라는 사상이 대두되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근대이후 한국미술의 전반적인 현상은 미술의 개념 속에서 미술을 구가하였고 자연히 서예나 문인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고전적 학문은 물론 현대의 첨단학문에 일가를 이루지 못한다면 문인화가가 될 수가 없다는 이론이다. 우리는 추사의 이 한마디가 남기고 있는 깊은 의미에서 어느 장르보다도 문인화에서는 보다 많은 사유와 학문적인 탐구가 바탕이 되어야 함을 인식 할 수 있다.

 곧 만물의 진리를 궁극적으로 규명하려는 자유로운 철리를 구가하는 면모를 이루어감으로서 그 개념적 이치를 유희 할 수 있는 심미의식과 관념미학적인 동양예술의 근본을 회복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문인화작가들의 심각한 자각과 노력이 요구된다.

 4) 독자적이면서도 장르간의 통합적 구조 병행 필요

 이는 비단 문인화단의 문제만은 아닌 전 인문 사회 경제 문화에 걸친 논제로서 지금까지 금기시 되어왔던 영역과 영역간의 공유적이고 통합적인 형태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이다. 즉 최근 일부에서 일고있는 동서양화의 통합적인 개념으로서 대두되는 회화의 거시적인 영역과 나아가서는 입체와 평면으로까지 나뉠 수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 문제는 결국 교육계의 구조조정으로도 이어지면서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 해답은 자명하다. 즉 경제나 과학적인 구조를 그대로 문화적인 구조에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이며 문화예술적인 상황과 현상에 맞는 선별과 계획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나 과학적인 구조와는 달리 문화예술은 모든 민족과 사회 국가적인 특수성이 모여서 하나의 시대적인 보편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나 과학 역시도 그 구조는 비슷하지만 문화의 경우보다는 그 강도나 당위성이 적극적으로 필요하지는 않다.

 이를테면 하나의 냉장고나 자동차도 그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가질 필요는 충분히 있지만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무용 연극 등의 영역에서와 같은 정도의 특수한 자기정체성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철저한 자기 정체성이야말로 곧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첩경이요 절대적인 원소와 같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같은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 때 최근 불어닥치고 있는 학문과 전공영역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대하여 우리의 전통문화의 위상이 어떻게 위치해나가야 하는가를 자명하게 정리할 수 있다. 더욱이 20세기의 일 백년 동안 우리는 그 스스로의 문화적현대화를 게을리하고 서구문화의 횡적인 영향만을 수용해온 상황에서 그들이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물질문명의 한계상황을 또다시 받아들여 장르를 무너뜨리고 이미 서구화에 물들어 있는 우리들의 보편치만을 확장해나간다는 것은 당장의 세계화라는 그 이론적인 합리성과 단견적인 명분은 있을지 모르나 보편과 특수적인 성격이 어떻게 황금분할되어 균형을 유지해나가야 하느냐는 문화예술의 절대구조적인 생리를 무시하는 행위이다. 15)


 이같은 거시적인 현실의 상황에서 오늘의 문인화가 타장르와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부언한다면 이 문제는 결코 문인화가들이 방관한다고 해서 방관되어지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이는 동양화나 서예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곧 무엇인가를 의무적으로 선택해야만 미래지향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최근의 신세대들이 갖는 의식구조는 이른바 post modernism이라고 일컬어지는 탈전통의 해체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고 보았을 때, 문화의 세계화와 보편적 언어획득이라는 명분에 의한 전통의 무관심은 이미 심각한 상태에까지 도달해 있고 취약하기 만한 내면적인 기반을 더더욱 망각할 수밖에 없는 무국적적인 의식만 남을 뿐이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 의해서 우리는 가장 객관적인 존재는 가장 주관적일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 전통적 중요성 때문에 제도적으로는 문인화의 독자성이 당연히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여러 관련 장르와 긴밀한 교류가 요구되며, 문인화의 현대적인 보편성 획득을 동시에 시도해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때로는 조형예술 뿐 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의 표현방식은 어떠한 제약과 논리로도 통제할 수 없는 자유와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5. 국민교양적 예술로서의 가능성


 economic animal 즉 경제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50년대 이후 전후의 일본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사실은 일본인들이야말로 문화동물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미 수천개에 달하는 미술관과 화랑을 보유하고 있고 많은 작가들이 후원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창작적 여건을 확보하고 자유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전국의 도처에는 이미 전문적인 성격의 독특한 박물관들이 설립되어 사회적인 교육까지도 담당해가고 있으며 수많은 디자이너들은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의 면모를 갖추는데에 절대적인 공헌자들로서 공산품들의 감각과 미감적인 체계를 담당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닌텐도를 만들어 냈으며 오늘날 제4의 경제적인 블록을 설정하여 무한한 국가적인 이익을 창출해 내고 있다. 그들인 경제동물일 수 없는 이유는 뿐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문화의식과 취미생활에 있다. 일찍이 세계 최초로 書道美術館이 설립되어 수백만에 달한다는 서도인구들의 발표기회를 부여하고 꽃꽂이나 茶道가 일반화되어 그들의 문화적인 열세를 만회하고 경제적인 부를 윤택한 삶의 내용으로 일체화하려는 노력이 숨쉬고 있다.

 서구 선진 여러 나라들의 경우는 언급할 필요조차도 없이 자국의 문화에 대한 철저한 지원과 국민적차원의 지원과 관심이 경제GNP를 상회한다. 여기에다 워싱턴의 스미소니언이나 파리의 기메미술관 처럼 동양의 미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그야말로 문화의 보편성획득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는 이제 제품생산(Product)으로 선진국가를 측정하는 근대적인 시대가 아닌 GNS(Gross National Satisfaction) 즉 기호적 만족도에 의해 선진국가를 측정하고 있듯이 문제는 얼마나 많은 작가가 있느냐는 문제보다 국민모두가 얼마만큼 만족한 생활을 하고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국민들의 정신적인 여유나 문화적인 만족도는 경제수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실정이라고 볼 수 있어서 규형적인 발전과 상호 보완적인 이치를 깨달아야한다는 점이다.

 위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국민들의 문화예술의 최소한의 생활화는 경제적인 수치와는 별도의 문제로서 적극 장려되고 제도화되어야한다는 것을 자각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교육과 학교교육 어디에서도 적극적인 예술교육이 실시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특히 학교교육의 실제는 전통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비정체적인 부분이 대다수라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한국의 문인화가 갖는 특수성은 여기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고대의 우리 선조들이 문인화가 餘技的인 의미로 여겨졌으므로 소수의 전문적작가를 제외하고는 선비들의 六藝사상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일반사대부들이 부담없이 즐겨하면서 흉중의 심상과 학문에서 지친 심신의 逸氣를 수양하는 차원에서 유희했기 때문이다.

 한편 국내에는 아직 없는 대학의 문인화과나 한국미술학과 등의 정규학과 개설 등에 의해 보다 체계적인 인재양성과 학문적인 정립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초중등과정의 학교교육에서도 일인일기 교육과정이나 7차 정유교육과정의 일부에서 문인화나 한국미술과목으로 개설한다면 교양차원에서 심성의 수양과 우리 선조들의 전통사상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극히 긍정적일 수 있다.

 그리고 합리적인 한 방안으로서는 이 과정을 위해서 각기 전통적인 모든 과목을 개설할 수 없는 관계로 동양화와 서예 문인화의 통합적인 개설이 필수적이며 그것이 가능할 경우에는 세 영역 모두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6. 결론


 이상에서 연구한 현대 한국문인화의 위상과 문제점들은 곧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예술분야가 지녀왔던 소외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그 개념정립이나 제도적 오류, 이해의 심도가 여타의 장르와 비교하여 그 정도가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그 동안 찾아내지 못했던 신선한 우리 예술의 한 부분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느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문인화가 열려진 코스모스로 자기 스스로의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21세기 지구촌시대에 걸맞는 예술의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된다.

 특히나 이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점과 문인화인구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유만으로 서예분야에서 문인화를 포괄해왔던 문제는 있을 수 없는 오류로서 힘의 논리나 자기 이익적인 협의의 시각에서 야기된 현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더하여 지나친 사숙식의 교육체계도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며 이와 같은 문제들은 지금부터라도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소재에 있어서도 물론 사군자가 문인화의 가장 주축이 될 정도로 애호되어왔지만 본래의 의미를 축소하여 사군자만으로 그 범위를 규정하려 한 것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 전통적 개념의 사군자류의 기초적 습득은 물론 기초과정과 전문과정 모두 중요시되어야 마땅하지만 보다 폭넓은 소재나 기법 시대적 상황과 의식에 부합된 사상적 전환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로 남겨져 있어서 이원적인 구조로서 균형을 갖추어가는 방향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국민교양교육의 가능성은 옛부터 선비들의 교양과목으로서 인식되어온 부분과 연결하면서 동양화나 서예와의 긴밀한 공조를 함으로서 초중등과정에서 통합적인 과목으로 설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서 20세기의 문화가 서구화일변도로 이어졌지만 다시 21세기에는 고도의 철학과 인문적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동양예술세계의 시대를 열어나가는데 일익을 담당해야만 할 것이다.


(경희대학교 미술학부 최병식 교수: 논문)


 

참고문헌




鄧 椿 ≪畵繼≫ 畵史叢書本.

莫是龍 ≪畵旨≫ 美術叢書本, 藝文印書館.

董其昌 ≪畵旨≫ 藝術叢編初版本.

陳繼儒 ≪偃曝餘談≫ 新興書局刊, 筆記小說觀14編.

沈顥 ≪畵塵≫ 中國畵論類編.

陳衡恪 著 〈中國文人畵之硏究〉 ≪美術叢書≫本.

張思珂 〈論畵家之南北宗 〉≪金陵學報≫ 6卷2期, 1936, 金陵女子文理學院, 南京.

蘇軾 著 ≪東坡題跋≫ 王雲五編 ≪叢書集成≫, 商務印書館, 上海.

蘇軾 著〈 松菁校勘 〉≪蘇東坡全集≫, 新興書局, 臺北.

≪紀評蘇文忠公詩集≫ 四部叢刊本.

≪周禮≫ ≪13經注疏≫, 東昇出版事業公司, 臺北.

金正喜 著, 崔完秀 譯 ≪秋史集≫ 1980, 玄岩社,서울.

崔炳植 著 《東洋繪화美學》 1984, 東文選, 서울




1) 경희대학교 미술학부 교수. 철학박사.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2) 明, 董其昌 著 《畵旨》 藝術總編初版

3) 明, 沈顥 著《 畵塵》 中國畵論類編 6編

4) 張思珂〈 論畵家之南北宗〉《 金陵學報 》제6권 2기, 1936,11. 南京, 金陵女子文理學院

5) 陳衡恪〈中國文人畵硏究〉《 美術叢書》 第5集 2輯

6)《 經進東坡文集事略》卷54《淨因院畵記》 葛路 著 《中國古代繪畵理論發展史》 p. 83참조

7) 《東坡題跋》下卷 〈書摩詰藍田烟雨圖 〉

8) 《伊川缶壤集》卷18

9) 제1회 선전에는 김규진이 묵죽과 월송폭포로 참고출품하였으며, 김용진이 묵란으로 4등상을 수상했고 심인섭이 묵죽과 묵란으로 현운초가 묵죽으로 나수연이 석란으로 최린이 난으로 안순환이 석란으로 김용환이 풍죽으로 각각 입선하였다. 심사위원에는 이도영이 참여하였다.

10) 사군자가 서예로부터 분리된 데에는 장우성의 주장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사군자가 서예속에 포함된다는 것은 영역의 독자성을 무시하는 일로서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손재형의 절대적인 반대의견과 대립되어 다음해에는 다시 서예로 병합되었다.

11) 동양예술사상의 연구나 형식이 독자성을 지녀야만이 그 본질적인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은 졸저 《동양회화미학》의 서론 부분에서 자세히 논하였다.

12) ≪秋史集·書論≫

13) ≪秋史集·書翰文≫

14) 본래는 송대의 蘇軾과 黃休復이 강조한 逸의 사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일상으로부터 일탈한 정신 내면세계의 逸氣를 중심으로한 重神思想은 이후 중국이나 조선시대 문인화가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5) 이 문제에 대하여는 졸저《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 연구》의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 비판〉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최병식 저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 연구》 1994, 예서원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카프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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