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관[李在寬]
1783(정조 7)~1837(헌종 3).
조선 후기의 화원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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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원강(元綱), 호는 소당(小塘). 벼슬은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전통적인 수법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남종화(南宗畵)의 세계를 이룩한 화가이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 壺山外史〉에 의하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어려워 그림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따로 그림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재주가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초목(草木)·화조(花鳥)·초충(草蟲)을 잘 그렸으며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다고 한다. 1836년(헌종 2) 영흥 선원전(璿源殿)의 태조 어진이 도적에 의해 훼손된 것을 복원하여 그 공으로 등산진첨절제사(登山鎭僉節制使)를 제수받았다. 그의 영모화(翎毛畵)는 일본사람들이 매우 좋아하여 동래관(東萊館)으로부터 해마다 구해갔다고 한다. 그는 비록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지만 문인화의 세계를 추구했다. 따라서 그림의 소재 선정이나 처리기법에서 문인화를 향한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으며, 화풍상으로도 문인화가인 이인상(李麟祥)과 윤제홍(尹濟弘)의 영향이 보인다. 현존작품으로 〈송하처사도 松下處士圖〉·〈총석정 叢石亭〉·〈천지석벽도 天池石壁圖〉·〈북한산영루시회사생도 北韓山影樓詩會寫生圖〉 등이 있다. |

午睡圖
특별한 사승(師承)관계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그림을 팔아 어머니를 모셨다는
사실로 미루어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붓을 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오수도〉는 서재에서 독서를
하다가 책을 베고 자는 노인과, 플 한 모퉁이에서 찻물 끓이는 소동(小童) 및 유한(幽閑)한 정경을
더하는 듯한쌍의 학을등장시키고 있다. 화면 좌우에 노송과 대나무가 있는 괴석을 그려 넣고, 이를
전경으로 해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중앙에 서재를 포치했다. 수묵이 주가 되며 담청과 담황이가채된
밝고 청아한 화면올 보여준다.제일 아래그림은 흔히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조희룡(趙熙龍)의 제(題)
가 아닌 그 자신의 것으로 생각되는 제발(題跋)이 보인다. “새소리 위 아래서 들려오는데, 낮잠이 곧 쏟아지네"(禽聲上下午睡初足)

芭蕉下仙人圖
이 그림은 6폭으로 이루어진 선인도(仙人圖) 중의 한 폭으로, 이 중 네 폭에는 여선(女仙)이 등장
하고 있으며 두 폭에 고사(高士)가 나타나 있다. 6폭에는 모두 조희룡(趙熙龍)의 발문(跋文)이 있
어 그와의 친교를 시사케 한다.조희룡은 그의 저서 〈호산외기(壺山外記)》에서 이재관을 상하백
년(上下百年)에 다시 없을 그림을 그린 인물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당시 최대의 안
목 김정희(金正喜)도 이재관의 그럼에 제발(題跋)을 남기고 있어 비록화원이긴 하지만 그가 이룩
한 화경이 어떠하였는가를 대변하는 사례들이다.굵은 붓으로 농묵을 듬뿜 찍어 몇 번 손을 움직이
지 않은 듯 유려한 펼치로 그린 〈파초하선언〉은 틀 잡힌 이재관의 기량을 보여준다. 우단 중앙에
‘파초엽상게제시 소당(芭草葉上渴題詩 小塘)’의 제(題)와 관서(款署)에 이어'일소석실(一蕭石室)'
이란 백문방인(白文方印)과 ‘소당(小塘)’이란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있다.
<139.4×66.7cm 국립중앙박물판 소장 >
그러나 이 제(題)는 이재관의 글씨가 아니며 첫번째 있는 백문은 조희룡의 그림에 나오는 인(印)인
바 좌 상단의 찬(贊)과 마찬가지로 조희룡의 글로 생각된다.

松下處士圖
 女俠圖

歸漁圖
이 그림은 《소당화첩(小塘畵帖) 중의 하나이다. 순백의 옥판선지 위에 담담한 수묵의 선과 점과
훈염(暈染)으로 이루어졌으며, 화면의 요소(要所) 몇 군데에 초묵 점을 변화 있게 찍어 산뜻한 화
면을 구성하고 있다.< 266×33.5cm 한국 개인 소장 > 언뜻 보면 중국적인 상념 산수(想念山水)에서 파생된 어떤 분위기를 연상시키고있지만,주저 없는
간결한 펼치 에서 오는 맑고 평범한 점경(點景) 속에 한국적인 시정(詩情)이 느껴진다.
 芭蕉葉題詩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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