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昌碩은 일생을 石鼓文을 끼고 살았고 篆刻과 회화에도 뛰어났지만, 吳昌碩 墨迹중에서 가장 많이 전해지는 것은 그의 行·草書이다. 그의 행초서는 먼저 그의 착실한 해서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의 행초서속에는 자연적으로 전서와 주문의 필법과 회화의 숨결이 느껴진다. "二王"의 傳統 行草와는 확연히 다른 모양이다. 그의 행초서는 자유분방한 필치로 자기의 감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으며 필법의 규범에서도 자유로운 것 같다. 오창석은 어려서 顔眞卿의 해서를 배우고 이후에는 鍾繇를 배웠다. 中年이후에 風格이 一變하였고, 黃山谷의 풍격에 치우치는 듯하였으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行草는 먼저 王鐸을 좋아하여, 字의 結構體勢상에서 左側斜勢를 취하였고, 미불의 "陣馬風檣"의 대가적 운치를 취하였다. 때로는 張旭이나 懷素 行草가 혼합 가미되기도 하였는데, 氣勢가 連綿하고, 점획의 頓挫提按를 아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結構上으로 아주 嚴謹하고, 筆勢는 자유롭고 氣勢는 雄偉하며, 變化가 풍부하다. 往往 한 폭의 行書작품중에 草·隸·篆·楷법이 서로 섞이어있어 생각없이 쓴 것 같지만, 오히려 아주 自然스럽게 결합되어 기운이 작품을 貫通하여, 전체 작품이 사람들에게 아주 특수한 美感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행초서에 대해 어떤 사람은 四五十歲이전의 작품은 종횡으로 호탕하고, 정신이 풍부하고 움직임이 활달하여 祝允明·王鐸의 법도를 얻었다고 하였다. 六十歲 전후에는 李邕·미불·黃庭堅을 따랐는데 精神과 體勢을 탐구하였고, 黃道周·예원로의 기이하고 곧바른 風韻을 추구하였다. 晩年에 章法이 크게 변하여 점획과 結體에 대하여 그다지 講究하지 않고, 風骨과 氣象의 雄闊을 보다 중시하였다. 吳昌碩과 '揚州八怪'가 서로 다른 점은, 吳昌碩 서예풍격의 확립은 완전히 그의 書藝本體內의 형식기교에 대한 절대 高悟性와 파악능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뀌 말하면, 吳昌碩이 一代의 서예 巨匠이 되었던 것은, 뛰어난 學問·文章氣에 의한 것도 아니며, '서화同源'의 회화介入에 의한 것도 아니며, 곧 서예本體 특유의 형식기교·시각特點(靜으로 動을 보임)에 대한 敏感과 把握能力에 의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