翰墨[緣]

[스크랩] 김홍도

율카라마 2008. 12. 9. 22:45

 

 

김홍도는 본관은 김해이며, 자를 사능(士能), 호를 단원(檀園), 단구(檀丘),

서호(西湖)라 했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 화가이다. 18세기 영·정조시대에

학문과 예술의 향기로 가득 차 있던 안산에서 태었났다.

 

김홍도는 7∼8 세부터 20여세까지 이곳 안산에서 표암 강세황 선생으로부터 그림과

글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여 주었던 단원 김홍도는 후에 어진 화가로 대성하여 그 명성을

전국에 떨쳤다. 산수화, 도석인물화, 풍속화, 화조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미 크게 이름을 떨쳤다.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와 왕세자의 초상을 그렸고, 그로 인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 연풍 현감까지 지냈다.

 

1788년 스승 김응환이 왕명으로 일본 지도를 그리러 갈 때 그를 따라가 김응환이

부산에서 죽자 홀로 쓰시마에 가서 일본지도를 모사해 돌아왔다.

1796년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삽화를 그렸으며, 97년 나라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한국적 정취가 짙게 풍기는 그의 작품은 강한 먹선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의 밝고 투명한 효과, 탁월한 공간구성으로 대단히 높은 경지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그의 산수도에서는 실경을 소재로 단원법이라 부를 만큼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산수뿐 아니라 도석 인물화에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굵고 힘찬 옷 주름과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도 특징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역시 풍속화이다.

풍속화는 서민사회의 생활정서와 농(농) 상(상) 공(공) 등의 생활정서를 주제로

하여 그들의 생활모습을 원형구도를 써서 익살스럽고 구수한 필치로 그린,

일종의 사회풍자를 곁들인 작품이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김양기를 비롯, 조선 후기와 말기의 화가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김홍도는 풍속화를 잘 그리기로 일반에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남종화, 평생도,

신선도, 풍속화, 진경산수, 초상화 등 전반에 걸쳐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그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김홍도의 산수화 배경은 당대에 유행하고 있던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우리 나라

산천의 아름다운 산수풍속의 서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그가 44세 되던 해에 정조의 명을 받고 복헌 김웅황과 함께 금강산에 있는 4개 군의

풍경을 그린 것을 계기로 하여 그의 독자적인 산수화를 확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산수화는 여백을 적절히 남기면서 대상을 압축하는 밀도 있는 구도법과 형상을

집약해서 표현해 내는 묘사력, 그리고 운치 있는 운염법 등으로 김홍도의 산수화는

진경산수와 남종문인화가 하나로 만나는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이룩한 속화 양식은 같은 시대의 긍재 김득신, 혜원 신윤복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후배들이 그대로 추종하여 그의 아들인 긍원 김양기, 임당 백은배,

혜산 유숙, 시산 유운홍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승 벼슬자리하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삼공불환도와

한국적인 해학과 정취가 가득 찬 25면으로 구성된 풍속화점, 말을 타고 가다가 꾀꼬리

소리에 멈추었다는 마상청앵도(馬上廳鶯圖) 등이 있다. 


춤추는 아이 (1778) ]
위의 그림 뿐 아니라 김홍도가 그려낸 <풍속화첩>에는 “논갈이”, “대장간”, “고기잡이”, “빨래터” 등

일상 생활을 재미나게 그려낸 그림들이 있습니다. 북, 장구, 피리, 해금등의 가락에 맞추어 소년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네요. 다소 투박하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듯한 선의 터치가 등장하는 인물들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 씨름도 (1778) ]
이 그림은 김홍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꼽히고 있죠. 단오날 즈음 씨름판이 벌어진 광경을

반시계 방향의 재미있는 구성으로 그려내었습니다. 특별히 더욱 독특한 것은 다들 씨름에 집중하면서

둥글게 모여있는 데 왼쪽 아래에서 씨름에는 관심이 없는 듯 등을

돌리고 있는 엿장수 아이의 등장입니다. 여기에 그의 재치가 숨어있는 것이죠.

 

 

[ 서당도 (1778) ]
혼이 나서 눈물을 훔치는 아이를 가운데 두고 다른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있네요.

예전에는 오로지 양반만이 글을 깨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당에는 양반의 아이들만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홍도의 서당도는 모여있는 아이들의 더벅머리나 행색을 보니 중인계급의 서당인 듯 합니다.

아마 영정조 시대의 서당은 중인들에게도 열려 있었나 봅니다.

이렇듯 변화하는 사회상을 김홍도는 재치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 소나무 아래 생황을 부는 어린 신선 (1779) ]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소나무 곁에서 새깃털 옷을 입은 어린 신선이 생황이라는

우리의 민속 악기를 불고 있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악기를 불고 있는 그의 모습에는 고요하면서도 처연합니다.

눈으로 소나무의 줄기를 따라가보세요. 어디쯤에 용의 머리가 숨어 있답니다.

 

[ 시녀도 (1781) ]
임금님의 초상까지, 초상화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김홍도.

그가 그린 초상화 중 하나이지만 궁의 시녀를 그려낸 것이 재미있네요.

뭉뚝하게 표현된 시작된 붓의 터치가 날렵하게 마무리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맑고 투명한 색상의 선들은 그림 속 주인공의 아름다운 특성을

대변하고 있는 데요, 아마 시녀가 아니라 선녀를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 나비 (1782) ]
찔레꽃을 찾아 모여든 나비들의 모습을 부채에 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풍속화가로 다루어지고 있는

김홍도이지만 위와 같은 정물화에도 상당한 기량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스승 강세황은 이 부채 그림을 보고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나비가루가 손에 묻을 듯하니 사람의 솜씨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빼앗았다. ”

 

 

[ 단원도 (1784) ]
그림의 제목이 김홍도의 호를 사용한 것처럼 위의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생활의

한 단면을 그려낸 것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그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불러 놓고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위에 적힌 시는 그의 친구가 지은 것이구요.

나무가 많은 집에서 친구들과 시를 읊고 악기를 연주하는 그의 풍류가 부럽게 느껴집니다.

조금만 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 이런 낭만도 가질 수 있지 않나 싶네요.

 

 

[ 명경대 (1788) ]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과 비견되고 있는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인 명경대.

그 또한 금강산 관광 후에 이 그림을 그렸는 데요.

정선이 실제로 경치를 마주하고 나서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림을 그린 것에 비해

김홍도는 자신의 감상보다는 실제의 모습을 중시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과장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린 금강산은 실로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 죽서루 (1788) ]
이 그림도 김홍도가 금강산을 그린 <금강사군첩> 중 한 장면입니다.

지도를 그린 것처럼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 약간은 건조해 보이기도 합니다.

가로 43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의 작은 그림이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끼고 여유롭게 세워져 있는 죽서루의 모습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작은 비단에 그려진 그림 속 풍경은 매우 넓고 깊습니다.

 

 

[ 봄맞아 지저귀는 까치 (1796) ]
봄에 핀 복숭아꽃 주변에서 까치들이 모여 지저귀고 있는 모습입니다.

맑고 깨끗한 색과 선을 사용하여 여백의 공간을 충분히 살리고,

그리 많지 않은 수의 까치와 북숭아 나뭇가지들을 그려낸 것이 신선과도 같은

그의 심성을 잘 표현한 듯 합니다. 이 그림처럼 그의 마음 속에는 물욕이나 권력욕과 같은

무언가를 가득 채우기 보다는 적당히 비워 있었습니다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만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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