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article

[스크랩] 개기일식 외

율카라마 2010. 7. 26. 18:47






개기일식

                                      
                    

한 입술이 한 입술과 겹쳐진다, 물뱀처럼 캄캄하다, 한 남자의 입술이
한 여자의 캄캄한 사랑을 누르고 있다

맞은편의, 불붙는, 더듬거리는, 건너가는, 멈추는, 걸어가다 멈추는, 뼈를 감춘,
입술만 남은, 내가 잡지 못하는, 뒤돌아서는, 등 뒤에서 깨무는, 피처럼 붉은, 당신이란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을 때 아름다운 여자는 조금씩 사라졌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위해 눈과 코를 지우고
형용사처럼 혀를 버리는 것
사라지는 여자의 눈썹이 서늘하다
어느 쪽이 슬픔의 정면인지
하루가 백년 같은 뜨거운 이마

당신과 내가 삼켜버린 낡은 입술들,
한 입술과 한 입술이 쌓인다,
고요하다 입술들은,
울음과 울음이 겹쳐진다,
캄캄하다

 

 

 

베란다




거실문을 열고 닫을 때
열림과 닫힘의 관계를 생각한다

나는 문, 그는 베란다
나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나의 밖에 있다
나를 열면 그는 반쯤 내가 된다
나를 닫으면 그는 마술처럼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정작 그가 사라진 건 아니다
내 두 눈이 그를 밀어낸 것뿐이다

나를 떼어 내면
그는 바람 잘 통하는 훌륭한 거실이 된다
그와 나는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바람만 남는다
내가 사라진 것도 세상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사랑의 밖이며 안이다

문을 열고 닫는 일
어쩌지 못해 혼자 생각에 잠기는 일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사람을 향해 뻗어가는
퇴화식물 뿌리 같은 캄캄한 눈동자
사랑아,
문에 접질려 피멍 든 손가락으로 어디서 울고 있는가?







불타는 문장
-백련사 동백림-

                    


숲은 붉은 문장들을 쉽사리 넘기지 못한다
시집 5페이지부터 38페이지를 읽는 동안에도  
그녀는 여전히 붉고 싱싱하다

그녀는 칼로 목을 삼천 번 스스로 내리쳐 붉음에 닿았다
태양과 흙과 바람과 절두(切頭)의 전설을
이 숲에 불러들였다

숲길을 걷는 것은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사랑의 전설과 비애를 읽는 일
사랑이 불러들인 비밀스런 서약이
초록에서 초록으로 뻗어 오르는 방식
문장은 단단해지고
숲은 반짝거린다

그녀는 숲의 행간에 놓인 꽃이 아니다
숨겨진 손가락들이
쉬지 않고 던지는
피 묻은
몇 개의 질문들
그녀는 뜨거운 손목을 스스로 불태워버렸다


 

 

<사랑은 동사다>      

                                      
                                                        
쓰다


어깨에 지느러미가 돋았다 어항 속 애인의 머리를 만지면 물풀이 자라났다 애인은 가늘고 길게 흔들렸다 나는 납작한 애인의 꼬리에 집착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미끄러운 애인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모든 풍경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곤 했다 하루는 인간이었고 하루는 어족이었다 신춘의 계절이 돌아오면 지상의 한쪽에 얼굴을 드러내 가끔 숨을 쉬곤 했다


뱉다


애인도 나를 뱉어냈다 어느 저녁 어항 속에서 걸어 나가 버렸다 애인과 나는 분수처럼 나뉘어져버렸다 나는 어항 속에서 밤 새 애인 흉내를 냈다 물 담배를 피웠다 떠나간 애인이 돌아온다면, 허벅지를 열어 뜨거운 바다를 보여준다면, 애인은 연어가 되어 나를 습관적으로 찾아온다면, 내가 큰소리로 웃는다면, 지루 한 건 우리들뿐이었다 나는 알고 싶은 것만 알 권리가 있었다


흔들리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피를 찍어 시를 쓴다던 랭보의 말은 유물이 되어 어항 깊숙이 가라앉았다 떠나간 애인들을 그리워했다 누군가 불을 켜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숨기도 하였다 우리는 한가했으며 고독한 얼굴들이 찾아와 젖은 시를 읽곤 했다 나는 물풀처럼 늘 붉게 흔들리곤 했다





<슬픔이 삼켜지는 방식>


                          

우리는 한 문장 안에서도 자꾸 어긋났다


나는 칼처럼 외로웠고 세상은 혼돈이었다
나는 초록으로 몸을 틀어 당신에게 닿는다
그렇게 내가 꽃으로 피거나, 당신이 어두워졌다
꽃이 핀다는 건
세상에 없는 목록을 느린 필체로 적어보는 것
우리는 상처 속으로 별처럼 흩어졌다

고요의 처음을 지긋이 바라보는
당신의 옆얼굴
마음의 눈동자를 거두어 들여
나는 당신에게로 흐를 것이다
마음이라는 말이 있어 비극은 탄생했다
신은 더욱 비굴해졌고
사랑 안에서 우리는 눈이 아팠다
당신,


나는 자주 물고기처럼 두 눈을 뜨고 잠이 들었다



 

<푸른빛으로 기울어지다>



                
쓸쓸하게 읊조리다 다물어 버리는 입술
외로운 것들은 꺾이지 않고 휘어진다고 누군가 말했다
제 마음속으로 식은 등을 돌리는
나는, 당신은


휘어지고 휘어져 슬픔의 뿌리에 닿는
나는, 당신은


밤새워 걷고 걸어 당도한 새벽
마음을 벗어나려는 지친 발자국들
이것은 찬란한 몸의 반란
함부로 저어놓은 페인트통처럼
나는 봄에서 여름으로 설레인다


가다 말고 망설이던 뒷모습을 기억하지
그는 끝내 돌아서지 않아
기다림 끝에서 얼굴을 숙이는 쓸쓸한 어깨
나는 가을에서 겨울로 기운다


당신은 전생부터 어깨 한쪽에 메고 온
쓸쓸한 기타 한 곡조
당신을 튕기면
푸른 빛 속으로 흩어지는 새벽의 곡조들
그곳은 사랑의 심연
한없이 퍼져가는 당신


나는 푸른빛으로 기울어진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
-상사화相思花- 


                          
꽃은 과거와 미래의 나의 사랑을 증명한다
내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
당신은 꽃이란 이름으로 당신에게 도착한다


없는 나는,
있는 당신을 향해 손을 내민다
당신에게 내미는 나는 이미 지워진 손
그러니까 나는 많이 낡았고
뿌리와 줄기의 초록은 숨을 참아왔던 거다
당신은 긴 목을 힘껏 뽑아 올려
제 얼굴을 찢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제가 불러놓은 마음을 어쩌지 못해
그 무게로 서서히 몰락하는


사람들이 천천히 밥을 먹는 저녁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은 다리가 없다
그대는 늦게 도착하는 사람
실컷 울고 나자 당신의 얼굴은 가벼워졌는가


나는 당신 쪽으로, 당신은 사라진 나를 향해 걸어온다
그렇게 스쳐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얼굴 이전의 얼굴
기다림 밖의 얼굴
당신과 나는, 잊혀 진 우리의 1/2


꽃 진 자리 시끄럽다
당신, 뿌리로 스며드는 얼굴


 

 

<어떤 울음>

                                                
                                  
                    

마른, 밥, 알을 입에 문 여자가, 204호에서, 죽은 쌀벌레처럼 웅크린 채, 발견, 되었다,
죽음의 내, 외부가 공개되었다, 쌀도, 가족도, 유서도, 없었다, 죽음의, 원, 인과 결, 과
만 남았다, 수사기록에는 그녀의 몸에서, 감춰두었던 울음이, 벌레처럼 기어 나왔다고
쓰여  있다, 형사와, 의료진과, 엠블런스와, 동사무소 직원이, 그녀를 죽음, 안쪽으로 밀
어 넣었다, 그녀가 이승에서, 단순하게, 떨어져 나갔다, 이승의 반대편으로 엠블런스가,
떠나고, 형사와, 동사무소, 직원이, 가정식, 백반을, 들며, 소주를 마신다, 골목의 소음
들을 한 모금에 꿀, 꺽, 삼킨다, 식당 주인이, 파, 닥, 파, 닥, 부채를, 부치고, 있다,





<즐거운 소녀들 1>

                                      
                              

동물원에서 짐승들이 사라졌다는 뉴스가 되풀이로 보도되었다 저녁이 되자 보도블록
틈새에서 털 돋은 손가락과 피묻은 손톱들이 자라났다 어느 날은 비디오 방에서 순식
간에 사랑을 알아버리기도 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곤 했다


무작정 도시를 질주했다 아랫도리에 붉은 도벽의 꽃들이 피어났다 아버지가 뺨을 후려
칠 때 핏발 선 눈동자에 금이 갔다 나는 상냥한 아버지를 낳을 거야, 은밀한 낙서를 하며
자신을 부정하는 법을  배웠다


밤마다 젖가슴이 아팠다 주둥이를 벌리고 붉은 간을 토해냈다 무른 토마토처럼 울컥 아
버지 없는 아이를 낳았다 떠나고 싶었지만 도착할 곳이 없는 소녀들이 북적거렸다 도시가
갈라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소월의 먼 후일을 읽는 밤>

                                                                      



여자와 남자는 차례로 시들었다 눈동자와 심장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사라진 몸 쪽으로 피가 쏠렸다 세상의 연인들은 없는 손으로 편지를
쓰고 없는 입술로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이 무리져 지나갔다 당신은 무엇을 알고 나는 무엇을 아는가 질문
들이 흔들렸다 흔들릴수록 물결이 되고 여자와 남자가 뒤섞이고 가슴과
가슴이 마주쳤다 파문이 되었다 서로의 입술을 훔칠 듯 말듯 스치는 이마
와 이마가 캄캄하다 그리움은 뿌리가 쉽게 상했다


가슴을 찢어 상한 진흙 손가락을 슬며시 내미는 사람 혼돈이 눈알을 파고
든 뒤에야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되었다 사랑은 그렇게 기록되거나 첨가되었다





<체크무늬에 관한 질문>            
                                



당신은 세로로 가고
나는 가로로 간다


당신에겐 왜 자꾸 묻고 싶어지는 걸까요
당신은 왜 새처럼 늘 날아가려 하는지
새들은 왜 시들지 않는지
사랑을 거쳐 간 마음들은 어디에 도착하는 걸까요
마음엔 왜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지
구멍에서 왜 밤마다 우는 뱀이 기어 나오는지
뿌리들은 왜 캄캄한가요
나무들은 왜 세상 밖으로 가지를 뻗는 건가요
당신이 받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빨간 종이를 줄까요
파란 종이를 줄까요
유령들은 왜 다리가 없는걸까요
당신은 왜 유령처럼 나를 스쳐가기만 하나요
우리는 왜 직각으로만 만나는 걸까요
사랑은 왜 질문들로 가득 차는 건가요
당신은 왜 도착하지 못하나요


당신은 왜 세로로 가고
나는 가로로만 가는 걸까요


 

 

<매화 분합 여는 마음>

                              


당신이 북쪽이라면
나는 북쪽을 향해 처음 눈을 뜬 누룩뱀
북쪽으로 돌아앉아
참빗으로 머리 빗어 내리면
연서를 쓰던 손가락이 쏟아진다
가고, 오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
버들눈썹 그리고 빈 배처럼 흔들릴거라


방문 닫아걸고
더운 피 식히며
남은 꽃이나 피우는 늙은 투전꾼 같은
꽃나무 한 그루, 나는
백가지 꽃 중 으뜸인 매화 백분 곱게 발라
분합마냥 환해질거라
발목 없는 다리로 번져가는 꽃무늬들


당신의 그림자는 오른 쪽에 있었던가 왼쪽에 있었던가
당신의 노래는 콧노래였나 나에게 겹쳐졌던가
당신에게 흘러가는 나를,
상상해보는 거라
내 몸의 북쪽이 서늘해지네
당신을 잊을 수 있을 것도 같네






<탕진의 내력 1>
 
  
점집 노파가 쌀알을 확 뿌렸다
여자를 떠나지 않겠노라 맹세했던
만세력 속의 사내를 점집 노파가 불러냈다
사내의 낡은 얼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귀신처럼 발딱 서기도 했다
떠난다고 이별이 아니다  

상극相剋이라 했다
병든 몸이 병든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여자가 놓아주면 사내가 붙잡고
동안 백발 되도록 달아나려는 다리와 잡는 팔로 얽혀진
두 마리 비단뱀 형상이라 했다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는 흉괘凶卦라 했다

남자는 몸을 천만 번 탕진하여 여자에게 흘러들었다
흐린 눈썹 그 아래
발설하지 못한 말을 우물거리는 사내의 금이 간 눈
앵두처럼 피 묻은 별이 흘러내렸다
12간지를 되돌아온 사내의 썩은 얼굴이
만세력 속에서 우레와 바람에 날리고 있다







<탕진의 내력 2>

                        
            
사방 4킬로미터의 바위를
손바닥으로 쓸어 닳아 없어지는 게, 1겁이라면
등 뒤로 손을 뻗어 당신의
브래지어 후크를 풀 때, 1겁의 시간은
이미 흘렀다


처녀인 당신이 부끄러움도 잊은 채
사방 사십 리 돌산을
비단치마로 문지르다
당신이 먼저 닳아지는 것이, 1겁이라면


피가 도는 바위 안에
뜬 눈으로 고여 있던
나는 이미 손바닥이 다 닳은 사내,
깨어진 눈동자로 잎담배를 피우며
낙타를 타고 가는
비단치마가 다 해어진 계집, 당신은


연꽃으로 피어
유목의 흐린 꿈을 우린 오래도록 꾸었지
어디까지 왔는가 당신은?
두 얼굴이 동시에 묻는 말, 대답하는 말
그러다 입술이 푸르러지는 더딘 사랑


나는 두어 번 더 죽을 것이다


 

 

<달콤한 가족 1>

                        

범띠 아빠는 배고픈 용띠 엄마를 만났다


할머니가 시집식구 잡아먹고
서방까지 잡아먹은 년이라며
배고픈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곤 했다


엄마는 할아버지의 간을 빼먹고 아버지를 낳았다
아버지의 눈알을 빼먹고 삼대독자 원숭이띠 동생을 낳았다
여동생들이 개와 쥐의 형상을 하고 엄마의 발가락에서 기어 나왔다
엄마의 귓속에서 남동생이 태어났다
엄마는 단단한 족보를 열어 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잡아먹었다
동생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엄마의 몸은 활활 타는 불구덩이
엄마에게선 잘 익은 피 냄새가 난다
엄마가 클클 웃을 때면 열두 마리 짐승들이 뱃속에서 물결처럼 따라 웃었다
닭이 울었다 서역을 건너온 아버지가 엄마 가슴에서 연꽃처럼 피었다
꽃잎 속에 발자국들이 가득 찍혀있다
엄마는 밤마다 입술을 붉게 바르고 맛있는 족보를 열고 있다






<달콤한 가족2>




탯줄을 잡아당겼어요 엄마 얼굴이 툭 하고 떨어져요 박쥐처럼 꺼꾸로 매달려 엄마를 조금씩 뜯어 먹었어요 엄마는 잘 찢어지는 부드러운 식빵이예요
오늘은 눈이 생겼어요 엄마의 별자리를 뒤적거렸지요 얼굴 없는 엄마와 페가수스를 한 바퀴 돌고 왔어요 엄마를 조금 뜯어 먹었어요 엄마는 상한 별이죠
엄마가 사라진 얼굴로 뜨거운 스프를 마셔요 내가 입맛을 다셨죠 엄마의 전생을 깨물어 보았죠 시큼한 엄마를 위로해 주었어요
오늘은 귀가 생겼어요 프라이드 치킨이 발가락이 되고 빨간 키스가 두근거리는 입술이 되요
  엄마를 뜯어먹으면 버섯처럼 돋아나는 싱싱한 엄마 피가 묻은 입술로 엄마를 맛보는 고소한 방 붉은 얼굴의 자라는 방 탯줄을 잡아당기면 엄마 얼굴이 툭 하고 떨어져요


 

쿤밍에서의 카드게임>

                            

눈이 내리는데 꽃이 피었다
떠났는데 나는 도착하지 못했다
사흘 동안 없는 당신과 카드게임을 했다
낮의 카드는 뜨겁고 저녁의 카드는 추웠다
카드를 서너 장 뒤집으면
이족(彛族)* 아가씨가 은주전자를 높이 들어
내 눈동자에 독주를 가득 부었다
나는 당신의 심장을 빼앗고 눈동자를 빼앗아
쿤밍으로 떠날 것이다
쿤밍 쿤밍, 흰말을 달려 밤새 울며 차를 마시는
소수민족마을에 닿을 것이다
쿤밍 쿤밍, 채찍을 내려치면 이국어처럼 눈이 내렸다
나는 카드처럼 어지럽게 뒤섞였다
한 사람이 카드를 하다 두 사람이 지쳐버리는 쿤밍의 카드게임
발가락과 발가락을 비비면 하얘졌다가 피가 고였다
발가락마다 익숙한 거리가 새어나왔다
카드를 펼치면 마음과 마음이 겹쳐졌다
눈을 감으면 꿈보다 꽃이 먼저 날아들었다
쿤밍 쿤밍, 눈이 내리는데 꽃이 피었다



*중국의 소수민족.





<연꽃의 바깥을 읽다>
-월하정인-
                            

당신은 모든 사랑의 질문이다


나는 입도 없이 고요하다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긴 머리카락 풀고 미끄러운 물의 경전을 읽는다 내가 늙어가는 소리 들린다 당신을 떠올리고 지우는 건 마음의 오래된 치유의 기술 침묵은 비천한 사랑에도 향기를 돌게 하여 정인(情人)의 눈빛은 흐릿하고 향기롭다 비서(秘書)를 펼쳐 낡은 주술을 외운다 어둠으로 어둠을 뚫을 것이다


당신은 나의 왼뺨에서 오른 뺨으로 건너간다 나는 썩을 대로 썩은 진흙 손가락으로 당신의 빛나는 등을 어루만진다 천 개의 발로도 떠날 수 없는 첫 마음은 뿌리에 깃들어 왜 웅크려 있는지 당신에 대해 질문하면 물결 속에서 아스피린 냄새가 난다 나는 긴 머리카락을 풀어 비탄의 곡조로 흔들리고 흔들릴 것이다 꽃잎을 여는 건 연꽃의 바깥을 캄캄하게 읽는 일

 

 

<꼬리에 관하여>

                  
              

나는 한때 꼬리의 수사에 몰두한 적이 있다
용두사미 혹은 어떤 무리의 끝
꼬리를 빼거나 꼬리를 내린다는 말에선
상처 입은 짐승의 피 냄새가 난다
천박한 도주의 내력도 새겨져 있다


꼬리란 동물에게 사냥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머리 가장 반대편의
먹이를 따라잡기 위한 탐색의 상징이다
항문보다 뒤에 착하게 늘어져
몸의 균형을 잡아주고
커다란 몸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
부드러운 질주의 시작이다


밥을 먹고 글을 쓰고
거대한 것들에 경배했으나 나는
돌돌 말려진 비겁한 꼬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생은 한 방이라는 당신 앞에서
난 긴꼬리원숭이처럼 서른 두개의 이빨로 조야하게 웃거나
망토비비 꼬리처럼 가늘어 지곤 했다
신념의 시작에서 자라는 꼬리에 대한 이해를
부끄러운 얼굴로 일기장에 적는다
낮은 힘으로 상처를 뛰어넘고
질주의 힘을 부드럽게 감아 두기도 하는 꼬리의 흔적을
나는 전생부터 갖고 있었다
나는 오래된 꼬리의 용도를 가다듬고 있다




<위로의 방법들>



나는,
떠나간 당신에게서
직유법으로 새처럼 날아오를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도 어두웠다
낮인가 했더니 밤이었다
먼 나라의 국경에서 전쟁이 반복적으로 터졌다
전쟁은 총과 피와 대포를 끌어들여 비극의 이미지가 되었다
죽은 자만큼 태어난 아이들이  
국적 없는 거리에 보조관념으로 흩어졌다


사랑이라 했더니 이별이었다
사랑은 혁명처럼 붉은 깃발을 흔들며 역설적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헤어지는 자들을 은유로 위로했다
눈물이 환유적으로 흘렀다


우리는 원관념에서 너무 멀리 걸어와 버렸다
죽은 자들을 다시 불러내어 과장법으로 기록하였으며
죽은 자들은 스스로 별이 되어 상징으로 부활했다
우리는 이미 재생의 은유구조를 알아버린 자들이었다


한 사내가 피를 흘려
모든 죄를 껴안아 용서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틈이 수사법으로 채워졌다


우리는 너무 많은 위로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새, 날다>



한 세계를 건너려 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제 몸을 들여다본다
죽음이나 이별 따위의 젖은 자리를 건널
때육체처럼 무거운 것은 없다


히말라야를 넘는 새는
먼저 무거운 생각을 접는다
뼈를 접고 다리를 접어
머리와 몸통이 하나의 날개가 된다


밖을 지워버린
날개만 남은 새,
바람의 영법으로
새라는 고독한 이름의 끝을 향해 날아간다
날개의 고통과 날개의 멍과 날개의 핏줄이
가벼운 새를 만든다

피 묻은 날개로 백 리百里
갇히지 않는 상상력으로
천 리千里를 날아가는 것이다


새는 날아가 떨리는 첫 눈썹이 된다






<오리온자리 유성우(流星雨)>
            
          서기 104년 신라에 ‘많은 별들이 비처럼 쏟아졌으나
                땅에 닿지는 않았다.’
              
                                                  


먼 별에서 남자가 소매를 걷고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을 여자가 가슴에 묻었다
붉은 먼지바람이 불었다
여자의 심장을 열어 남자가 얼음별을 흘려 넣었다
빛나는 것들의 가슴을 열어보면 젖은 뼈가 만져진다


여자의 별자리를
남자가 낭인으로 떠돌았다
눈썹이 빠지기도 했다


붉은 먼지바람이 불었다
모래 긁히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죽어서 별이 된다는 말에
여자를 통과한 별들이 사람처럼 웃었다
여자의 얼굴이 별자리로 시끄럽다
남자와 여자는 사선으로 자주 빗겨갔다



 

<등>



등이 가려울 때가 있다
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은 내 몸에서 가장 반대편에 있는 곳
신은 내 몸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만드셨다
삶은 종종 그런 것이다, 지척에 두고서도 닿지 못한다
나의 처음과 끝을 한눈으로 보지 못한다
앞모습만 볼 수 있는 두 개의 어두운 눈으로
나의 세상은 재단되었다
손바닥 하나로는 다 쓸어주지 못하는
우주처럼 넓은 내 몸 뒤편엔
입도 없고 팔과 다리도 없는
눈먼 내가 살고 있다
나의 배후에는
나의 정면과 한 번도 마주보지 못하는
내가 살고 있다



<곡선의 힘>




남한산성을 내려오다
곡선으로 휘어진 길을 만난다


차가 커브를 도는 동안
세상이 한쪽으로 허물어지고
풍경도 푸른 중심을 놓아버린다


내 생의 무게 중심이
삽시간에 흐트러진다
나는 나에게서 한참 멀어져 있다


나는 모서리처럼 몸을 세우고
곡선의 격렬함과 싸운다
내 몸에서 중심을 붙잡으려
손길들이 뛰쳐나온다
모든 것을 움켜쥐던
수많은 내가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나에게서 내가 이탈된다


커브 길을 돌아
나에게 되돌아오는 몇 초 동안
나의 경계를 넘어서고
나의 슬픈 배후까지 슬쩍 엿보게 하는
부드러운 곡선의 힘

 

 

 

<무덤에서 온 문자메세지>
        

                              

喪家 가는 길
종로 3가를 거치고 강남을 거치고
이 도시 끝으로 조문 가는 길
죽음 가까이에 가는 길은 형식이 필요하다
지하철을 두어 번 갈아타고 노선을 잘 익혀야 하고
죽음 반대편으로 들어서지 않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
문득,
망자가 누워있을 영안실의 냉동창고나 관속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싣고
지하철처럼  밤마다 세상을 떠돌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사방이 고요해지면 관속에서 굳은 관절을 풀며
아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안부를 묻는
문자메세지를 보낼지도 모른다
심심해서 그래 심심해서 그래
전화 한 번 해봤지 허허 웃으며
무덤 속까지 연결된 인터넷으로
동영상 편지를 보내올 지도 모른다
자신의 죽음을 이해할 때까지
죽음이란 단어를 클릭 하면서
보다 확실한 죽음을 검색할지도 모른다
지층처럼 땅에 스며들면서 뼈를 비우면서
아는 이들을 하나씩 떠올릴지도 모른다
죽은 자들이 있어 산 자들의 생은 더 활기차다
산 자들의 활기찬 생이 있어서
죽은 자들의 눈빛은 더 숭고해진다


지하철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길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들린다
문득 ,
돌아보니 지하철이 영혼처럼 쏜살같이 스쳐간다
익숙한 미소를 띄며 휙 멀어진다






<러시안 룰렛 하는 밤>
            


난 날마다 내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죠.
담배 한 대 피우면서 한 게임 하실 까요?
물론 저녁 식사 값은 죽은 사람의 몫이죠.
어때요. 같이 한 번 해보실 래요?


방아쇠가 당겨질 때
손가락 끝에 죽음이 담배연기처럼 감겨오죠.
피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아마존 피라니아처럼 단단한 이빨을 빛내며
죽음을 맛보려는 눈초리로 몰려들겠죠.


시간의 감옥에 갇힌 내 얼굴 속에
어두운 영혼이 심장박동처럼 뚝딱거려요.
내 안의 피톨들이 뱀처럼 날름거리며
내 몸을 찢고 나오려해요.
죽음이 뱀처럼 차갑게 내 몸 안으로 흘러 들거 예요.
총알소리가 내 생을 스쳐갈 때
난 죽음의 멀티오르가즘을 맛볼테죠.


내 머리에 날마다 총을 겨누고
뇌수 속의 게으른 거리를 쏘고
찌그러진 양철 같은 해를 쏘고
들판에 핀 노랑제비꽃의 심장을 관통하고
멸종되지 않는 식물들을 관통시키고
날마다 내가 관통되고
그 너덜거리는 틈새로
새로운 세상이 재빨리 들어서요.


죽음이란 거 뭐 별건가요.
난 내일이면 게임 주인공처럼
신성한 영혼과 추억이 채워진 육체로
업그레이드되어 재림할걸요.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한다는 거 위대하지 않은가요?
한 방에 한 생이 날아간다는 거
폭죽처럼 터져 버린다는 거 신나잖아요.
총알이 내 머리통과 두개골을 날려버리는 날까지
방아쇠를 당깁니다.


어때요. 한 게임 해보실래요?
자 일단 먼저 돈을 내시고
저녁을 미리 주문해두죠.
피가 흐르는 당신 머리처럼
약간 덜 익은 신선한 스테이크와
당신 피처럼 붉은 포도주 한잔을 우아하게 주문할까요.

출처 : 장미의 정원
글쓴이 : 예사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