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독해(讀解) /최미루

율카라마 2012. 6. 24. 11:28

독해(讀解)
    


                                 /최미루 


 
모아두었던 영수증과 서류들을 문서세단기에 넣고 돌린다
철석같았던 나의 이력들이 순식간에 갈기갈기 잘려나간다
조각난 글자 사이로 드문드문 분신들이 스치듯 지나가지만
이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친김에 필요 없는 것들을 정리하기로 한다
가슴 어디쯤에 묻혀있다가 가끔 불쑥 나타나
거추장스런 잔상을 남기고 가는 낡은 사진들을 꺼내 본다
힘겹게 내력을 적어가던 기억의 페이지들이며
영수증처럼 굳게 믿었던 지난날의 해진 약속들이
잘게 분해되어 작자 미상의 무덤으로 변해간다
이대로 간다면
비밀 같았던 추억마저 부서지고, 섞여
얼룩덜룩 회색의 물결로 흘려버리고 말 것이다
읽는 법을 터득 못해 에돌다, 끝내 해독되지 못한 편지도
풀풀 먼지로 날리게 될 터
육신도 결국 한 줌의 재밖에 될 수 없음이랴
불면의 시간이 다시 세단기의 손잡이를 돌린다
정체불명의 가루가 쌓여가며 또 다른 무덤을 만들고 있다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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