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어두워지는 연못 /박수현
율카라마
2012. 8. 17. 16:48
어두워지는 연못
박수현
이사를 앞두고
묵혀 두었던 부부용 긴 베개를 버린다
두런거림을 시침질했던 흰 속청은 얼룩지고
속을 채웠던 메밀 알갱이는 푸슬푸슬 부서지는데
베갯모 속 두 마리 원앙은 여전히 흔들리는 물결 위에 떠 있다
연못에 잠긴 버드나무의 푸른 파문이
정갈한 이음수의 단잠을 허무는 동안
베갯모 테두리의 예서체 청홍 목숨 수(壽)자가
유록빛 수면 위에서 귀가 먹어가는 동안
자줏빛 날개를 펼친 수컷과 다소곳한 암컷의
어깨가 당초구름문 밴 자련수 물풀 사이 반쯤 접혀져 있다
함께 살 셋방 얻느라 미리 당겨 쓴 20개월 계금을
꼬박꼬박 부어 나가야 하듯
일생 상대에게 붓는 사랑의 양도 서로가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저 연못으로 한 땀 한 땀 흘러든 햇살과
장대비와 석 달 열흘 가뭄을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생이 달의 속눈썹을 족집게로 뽑을 때마다
물속에 거꾸로 처박히는 원앙의 고약한 비명소리가
캄캄한 그늘을 제 몸에 새기며
소금쟁이처럼 바삐 미끄러져 간다
늦은 오후, 암초록 깊어지는 연못은
물결을 골라 올올히 현을 뜯듯
원앙 한 쌍을 떠받들고 수면에서 굴절된 빛은
간신히 서로를 참아주느라
자글대는 눈가를 새털수, 속수, 매듭수로 꿰매듯 수놓고 있다
—《미네르바》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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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 1953년 경북 청도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교육과 졸업. 2003년 《시안》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만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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