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승희
맨드라미는 지금도
햇살이 가만히 죽은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나는 죽은 내 얼굴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젖을 물리듯 햇살은 죽은 나무의 둘레를 오래도록 짚어보고, 고스란히 드러난 나무의 뿌리는 칭얼대듯 삐죽 나와 있는 오후. 어떤 열렬한 마음도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가 싸워야 한다면 그 때문. 내가 누군가와 섹스를 한다면 그 때문. 거짓말처럼 내 몸을 지나간 칼자국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글거리는 상처 따위가 아니다. 맨드라미는 지금도 어디선가 제 키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나를 두고 살아 있는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먼지처럼 그릇 위에 쌓여가는 일은 그러므로 아주 서러운 일은 아니다. 이젠 벼랑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에 잠긴 귀를 흔들어 보는 일. 입을 벌리면 피가 간지러운 듯 검은 웃음이 햇살 속으로 속속들이 박혀드는 날. 집이 사라지면 골목은 어디로 뛰어내려야 하나.
내 삶의 전부이신 막막함이여,
막막한 마음들 데리고 길을 나선 적 있지. 푸르고 맑은 것들의 빛나는 이마를 바라보며 골목을 하루 종일 헤매다 어느 집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시든 잎처럼 앉아 있곤 했어. 여기가 사막이군. 무수한 도시의 사막은 그렇게 발견되었던 거야. 손가락 가득 모래가 빠져나가고 나면 거대한 모래 무덤이 더 이상 갈 데 없는 누추한 시절로 허공을 붉게 물들이지.
오래도록 서 있었으며
자주 그랬으며
오늘은 어디에서 나의 죽음을 저당 잡힐 수 있을까
근거 없는 이유들로 살아내기엔 가슴이 너무 뭉클했고, 잠을 자면 죽은 것들이 가득했다. 마음 없이 떠돌던 모든 것들 내게로 와 잠들었다. 잠든 것들의 이마를 짚어주며, 내게 등을 보인 것들을 하나씩 지워냈다. 버려진 담뱃갑이 각을 세우고 누워 있는 구석 어디쯤, 뭐 그쯤에서 쓰러지면 그만이었다. 막막함이여.
여름
맨드라미가 맨·드·라·미로 피는 동안
죽은 발톱을 생각했다
나는 언제부터 죽은 발톱으로 걸었나
밥 먹다 말고 토해버린 생
역겨운 냄새 속에서
미처 소화되지 못한 이름처럼
까맣게 살이 오른 죽음들
발톱에 가득 모여 있다
맨드라미가 까만 발톱을 만진다
아빠 먼저 죽지 마
연두는 꽃이 져도 연두란다
먼저 죽지 마 혹은 목매달고 사이로
정신없이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여름은 너무 뜨거웠다고
맨드라미 붉은 손목에서 난 오래 잠들고 싶다고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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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1997년에『시와사람』으로, 1999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