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액자로 남겨진 자들 (외 1편) /최호빈
액자로 남겨진 자들 (외 1편)
최호빈
시계를 목에 걸고 있는 표적지, 그 문 뒤
무서운 일이 저질러질 것 같은 긴 통로
조금 더 가보자며 촛불이 흔들린다
눈빛을 주고받을수록
서로가 불편해지는 얼룩
천천히 스쳐가는 휴식에 몸의 절반을 묻어둔 우리는
망가질 수 없는 틀에 갇힌 그림들
체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앞쪽에선 말을 더듬고
뒤쪽에선 소용없는 대답을 다듬는다
뒤통수로 웃으며
밤마다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벽들
제자리로 외출할 여력만 남기고 바닥에 주저앉으면
색이 바랜 우리가 결국 쫓아왔던 밤
어떤 몸체 하나가 눈을 뚫고 나간다
앞모습과 뒷모습에 차별 없는 그림자가
우리의 무릎까지 차올라서
꼭 필요한 말은 목소리로 보관해야 할 것 같았지
주머니에 걸음마를 넣어두지 못한 날
그림으로 돌아와 보니
액자가 그려져 있다
—《시에》2012년 가을호
마스카라
그가 말을 마칠 때마다 정적이 마침표를 찍는다
내 눈으로 확인한,
내가 알고자 했던 바깥
가슴에서 꺼낸 눈과 머리에서 꺼낸 눈
눈에 혀를 달고 있는 그가 많은 무늬를 토해 나를 놀라게 한다
정이 많아 탈이 난 걸까?
그가 손수건에 입을 대며
내 발에 말을 거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웃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웃긴다
이야기가 끝나려는 곳의 바람에는 여러 목소리가 있다
그가 여러 번에 나눠놓은 피로를
하나씩 내 쪽으로 끌어당기다가
그의 발을 밟을 뻔했다
나는 줄지어 심어진 혓바닥을 과감하게 걷어차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눈썹 위에서 잠자고 있는 귀신들
그가 던져주고 간 풀을 곱씹어보며
눈앞에 어리는 어두운 결론을 반듯하게 내린다
*
교각 아래
구석의 풀들이 벌레에게 먹히고 있었다
손잡이를 가진 바람이 손을 잡아주었다
—《현대시》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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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빈 / 1979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2년〈경향신문〉신춘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