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좋아, 웃어라 /이승훈
좋아, 웃어라
이승훈
1
이 시대엔 너도 나도 시를 쓴다. 지식인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무식한 사람은 무식을 감추기 위해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모두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나도 시집을 낸다. 대머리도 쓰고 이가 빠진 인간들도 쓰고 병든 늙은이도 작은 방에 앉아 시를 쓴다. 손을 떨면서 기침을 하면서 모두 죽어라 하고 시를 쓰고 시집을 낸다. 모두 대단한 인간들이다. 나도 대단한 인간이다. 모두 미친 것 같다. 시를 쓰고 부지런히 시집을 내고 상도 받고 아무튼 재미있는 나라다.
2
안방에 있는 탁상시계 공부방에 있는 탁상시계 작은 방 서가에 있는 탁상시계 주방 벽에 있는 뻐꾸기시계 모두 고맙다. 시간을 알려주니까. 일어나는 시간 밥 먹는 시간 낮잠 자는 시간 인터뷰가 끝나고 그녀는 전화번호를 가르쳐준다. 난 서류 봉투에 전화번호를 적는다. 그러나 계속 글씨가 틀린다. 여기 적고 저기 적고 작은 방에 들어가 적지만 계속 글씨가 틀려 다시 방에서 나와 마루에 엎드려 적는다. 가까스로 전화번호 서류 봉투에 적고 일어선다. 손목시계를 찼는지 차지 않았는지 생각이 안 난다.
3
이런! 내가 미쳤지. 알몸에 외투만 걸치고 있네. 부지런히 아저씨 집을 찾아간다. 방문을 연다. “아저씨 안 입는 바지 있으면 하나 주세요.” “조카님! 바지가 없어요.” 아저씨는 작은 방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말한다. 난 옆방으로 간다. 그 방은 옛날 내가 공부하던 방이다. 벽엔 바지들이 걸려 있다.
4
난 시집 이름을 한 번도 손수 붙인 적이 없다. 그동안 낸 시집 이름은 모두 남들이 붙여주었다. ‘사물A’는 박목월 선생이, ‘환상의 다리’는 조병화 선생이, ‘당신의 초상’은 이어령 선생이, ‘사물들’은 김영태 형이, ‘당신의 방’은 김병익 선생이, ‘너라는 환상’은 최승호 시인이 붙여주었지. 이젠 시도 남들이 써주면 좋겠다. 남들이 쓴 시에 이름만 적어 발표하면 얼마나 좋아? 왜냐하면 너무 쉽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생각하는 일은 힘들다. 난 누가 고치라면 고치고 발표할 때도 남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발표하라는 시를 발표한다. 난 독창성이 무언지 모르고 창조가 무언지 모르고 시가 무언지 모른다. 모르는 것도 시다.
5
좋아 좋아 오늘도 흐리니까 좋아 흐리면 머리 아파 좋아 머리 아프면 방바닥에 누워 있으니까 좋아 누워 있으면 비가 오니까 좋아 비가 오면 마당에 눈이 안 오니까 좋아 눈이 안 오면 눈 치울 필요 없으니까 좋아 김밥 먹을 때 비가 오네. 시골 아무도 없는 빈 집 마루에 앉아 김밥 먹는다. 서울에서 가방에 넣고 온 김밥 한 줄 먹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마당 토끼장 본다. 풀을 뜯어 줘야지. 마루에서 일어선다.
—월간《유심》2013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