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단단한 꽃 (외 2편) /박소원

율카라마 2013. 2. 8. 10:14

단단한 꽃 (외 2편)

 

   박소원

 

 

 

마음이 먹먹할 때마다

돌들의 무늬를 더듬어 보던

내 손 끝에서

들숨일까 날숨일까

파르르 어떤 숨소리가 떨려 옵니다

무늬에 따라서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꽃에 물을 주듯이

내 책장 위에 놓인 돌에게도

물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 문득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스스로 도리질을 치곤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돌에게 물을 주기 시작하면서

돌이 피우는 꽃을

나는 황홀히 보곤 합니다

먹빛의 몸이 더 먹빛이 되어

베란다 한 귀퉁이에서

이윽고 숨 터지는 저 꽃들

오늘 다시 환하게 만개합니다

당신 안에 살고 있는 돌 한 그루가

기어이 만개하는, 그날이 봄날입니다.

 

 

 

나는 다시

 

 

 

손가락 지문마다 거센 돌개바람이 돈다

나는 다시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지나간 사랑에 대해서 침묵한다

궁금한 방향으로 호기심을 튕기며

길이 뻗어가듯

새들은 서쪽 허공으로 날아간다

나는 다시 뿌리에 힘을 주고

태풍이 한반도를 빠져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고 내가 내 말을 안 믿는다*

뿌리 뽑힌 주목나무 곁에서

나는 다시 벌벌 떨었다

자꾸만 무서운 그의 과거가 보인다

캄캄한 저녁이 내 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동안

과거에게 듣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나이테를 휘도는 불안을 토악질하며

계절이 다시 지나간다

홀쭉해진 허공의 옆구리에 가지를 걸치고

나는 다시 나이를 먹는다

적당하게 친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새들은 서녘의 말을 물고

떠난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마른 가지마다 먼 곳의 말들이 새 잎을 틔운다

흔들리는 삼월의 그림자가 푸릇푸릇하다.

 

 

* 김수영의 시 「거짓말의 여운 속에서」인용.

 

 

취호공원에서 쓴 엽서

 

 

 

바다가 없는 마을까지

추위를 피해서 온 흰 갈매기들이

젖은 손가락으로 몇 백 번 허공을 긋는다

매일 금강경을 필사하던

佛心 깊은 할머니처럼

형은 매일 공책 몇 바닥씩

가족들 이름을 적었지만

나는 사막을 건너온 바람 속에서

내 이름만을 쓰고 또 쓴다

허공이 내준 축축한 바닥에서

내 이름 석 자,

무서울 때마다 혼자 불렀던 노래처럼

단조의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바람 한 번 불면

쓰고 또 쓴 내 이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공원 한 귀퉁이에서

빗속으로 터지는 12월의 어둠을 본다

할머니도 형도 공책을 덮고

잠자리에 눕히던 어둠이

컴컴한 손가락으로 허공을 그으며 달려온다

또박또박 간격을 맞추며 기록하는

나는 어둠의 새로운 주소지다.

 

 

 —시집 『취호공원에서 쓴 엽서』에서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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