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가을의 시 이만섭 시인 /외 16편

율카라마 2013. 9. 17. 22:37

가을의 뒤란

 

이만섭

 

 

 

 

햇살이 커튼처럼 내려앉는 담장 가

일식에 든 듯 그늘에 점령된 고욤나무 모퉁이에

콩꼬투리를 매단 채 대궁이 굴러 왔다

 

바람은 커브 길에서 모로 누운 콩대를

자꾸 양지쪽으로 밀어 넣으며

뒷산의 멧비둘기를 부르는 중이었다

 

지난여름 산비탈 밭에서 열매들 익힐 때

녹음 속에서 연애질이나 하며 꾸르륵 꾸꾸 잘도 놀아나던

그 조화 속을 얻어 여름을 나누었으니

 

 

막바지 알곡을 거둬가는 마당에

인심이 다 챙기지 못한 허실을 핑계 삼아

그늘진 곳으로 한 마당 가을볕을 마련하는 것인데

 

그쯤은 한 줌 햇살도

보송보송 꽃처럼 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고수레 같은 몫으로 불러대는 거였다

 

 

가을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뛰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뛰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
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맷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
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_2008년 미당문학상 수상 시

 

 

가을 연못

 

정호승

 

 

경회루 연못에 바람이 분다
우수수 단풍잎이 떨어진다
잉어들이 잔잔히 물결을 일으키며
수면 가까이 올라와 단풍잎을 먹는다
잉어가 단풍이 되고
단풍이 잉어가 되는
가을 연못 


 

 

가을의 시

 

홍수희

 

 

 

가을은 어느 날
서가書架를 정리하다 툭, 떨어진
낡은 수첩이다

눈물이 핑그르르 맺혀져 오는
먼지가 뽀얀 주소록이다

 

 

가을 편지

 

유안진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가을볕 참 쨍하다

 

황구하

 

 

 

이제는 통증도 제풀에 지쳤는가

어머니 힘없는 손발이 오수에 잠겨있다

가는 숨결 사이, 나는 일없이 앉아서

창문너머 e- 편한세상 보람아파트 위로 내리는

저 가을볕 참 쨍하다, 쨍하다

실눈 뜨며 바라보는 것뿐이었는데

어머니, 두고 온 자갈밭 콩이라도 거두시나

끝물고추 볕 아깝다 풀어 놓으시나

드리운 그림자 초리초리 달고 있는

저 팔뚝 자꾸만 가벼워지는 것 보면

아예 몸까지 벗어 널어놓고 오시나

끄응 끙, 힘겹게 돌아누우시자

똠방똠방 제 소리를 세다 놀란 링거

한 생의 햇살을 통째로 흔들고 있다 
 
  
 가을 마루에 앉아 하루를 관음하네

 

박남준

 

 

 

뭉게구름이 세상의 기억들을 그렸다 뭉갠다

아직껏 짝을 찾지 못한 것이냐

애매미의 구애는 한낮을 넘기고도 그칠 줄 모르네

긴꼬리제비나비 노랑 상사화 꽃술을 더듬는다

휘청~ 나비도 저렇게 무게가 있구나

잠자리들 전깃줄에 나란하다

이제 저 일사불란도 불편하지 않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떼가 꽃 덤불 속에 몰려오고

봉숭아꽃잎 후루루 울긋불긋 져 내린다

하루해가 뉘엿거린다

깜박깜박 별빛만이 아니다

어딘가 아주 멀리 두고 온 정신머리가 있을 것인데

그래 바람이 왔구나 처마 끝 풍경 소리

이쯤 되면 나는 관음으로 고요해져야 하는데

귀 뚫어라 귀뚜라미 뜰 앞에 개울물 소리

가만있자 마음은 어디까지 흘러갔나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가을날 
 
김현성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 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가을시 2 

 

유재영

 


 
지상의 벌레소리
씨앗처럼 여무는 밤
 
다 못 쓴 나의 시
비워둔 행간 속을
금 긋고 가는 별똥별

이 가을의
저 은입사(銀入絲)!
 
* 은입사: 청동이나 주석 등에 새겨 넣은 은 줄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가을사랑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읍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읍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엔 1 

 

추경희
 


               
시간이 가랑잎에 묻어와                
조석으로 여물어 갈 때                       
앞 내 물소리                     
조약돌에 섞여               
가을 소리로 흘러내리면                       
들릴 듯 말 듯                    
낮익은 벌레소리                     
가슴에서 머문다
               
하루가 달 속에서 등을 켜면                
한 페이지 그림을 접 듯                     
요란 했던 한해가                  
정원 가득 하늘이 좁다
 
  
                
가을의 시
 

 

김초혜


 
                      
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
                     
적막에 길들으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


 
  
         
가을에 아름다운 것들

 

정유찬

 

                           
가을엔                 
너른 들판을 가로 질러                    
노을지는 곳으로                   
어둠이 오기 전까지                   
천천히 걸어 보리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늘진 구석 벤치에             
어둠이 오고 가로등이 켜지면                    
그리움과 서러움이                
노랗게 밀려 오기도 하고
                              
단풍이                    
산기슭을 물들이면
                       
붉어진 가슴은                      
쿵쿵 소리를 내며                
고독 같은 설렘이 번지겠지
                          
아, 가을이여!             
낙엽이 쏟아지고 철새가 떠나며          
슬픈 허전함이 가득한 계절일지라도                   
네게서 묻어오는 느낌은
온통 아름다운 것들뿐이네

 

 


가을의 시

 

강은교

 

 

 

나뭇가지 사이로
잎들이 떠나가네
그림자 하나 붙네

 
길은 멀어
그대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어


정거장에는 꽃 그림자 하나
네가 나를 지우는 소리
내가 나를 지우는 소리


구름이 따라나서네
구름의 팔에 안겨 웃는
소리 하나
소리 둘
소리 셋
무한無限


길은 멀러
그대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어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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