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사슴공원에서 (외 2편) /고영민

율카라마 2014. 1. 30. 18:12

사슴공원에서 (외 2편)

 

  고영민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어디까지가 여름이고 어디부터가 가을일까

누가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놓았다

오늘 나는 아주 먼 곳에 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은 침엽수처럼 무표정하다

젊은 어느 날의 책 속처럼 지금도

사슴공원 어딘가에선

사랑이 생기고, 비가 내리고

멀리 빈 들판엔 철새가 돌아온다

누가 구름을 사라지게 하고

비를 멈추게 할 수 있나

투명 비닐봉지에 금붕어를 담아 들고

한 소년이 급히 어딘가로

달려간다

공원에 잇닿아 있는 장례식장 마당에서

어느 가족이 늦은 상복을 갈아입고 있다

사슴울음소리[鹿鳴]를 들으며

나도 서둘러 당신에게 가야 한다

사랑이 식기 전에

밥이 식기 전에

 

 

————

* 녹명(鹿鳴) :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배고픈 사슴을 부르기 위해 내는 울음소리.

 

 

 

망종(芒種)

 

 

 

당신을 땅에 묻고 와 내리 사흘 밤낮을 잤네

일어나 반나절을 울고

다시 또 사흘 밤낮을 잤네

 

하릴없이 마당을 쓸고

더덕밭을 매고

뒷목을 긁고

흙 묻은 손바닥을 일없이 들여다보다

또 손톱 하나를 뽑고

 

당신을 생각하는 이 계절은 붉거나 노랗거나

혹은 그 가운데쯤의

빛깔

업듯 새끼 사슴을 안고

꽃나무를 나서는 향기처럼 신발을 끌며

마을 입구까지 길게 걸어갔다 왔네

 

인중이 긴 하늘

선반엔 들기름 한 병

 

 

 

극치  

 

 

 

개미가 흙을 물어와

하루종일 둑방을 쌓는 것

금낭화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보는 것

소가 제 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

길게 몇번을 우는 것

작은 다락방에 쥐가 끓는 것

늙은 소나무 밑에

마른 솔잎이 층층 녹슨 머리핀처럼

노랗게 쌓여 있는 것

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떼가 몰려와

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

늙은 어머니가 묵정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것

어스름녘,

고갯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우체부가 밭둑을 질러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것

 

                       —시집『사슴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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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 1968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악어』『공손한 손』『사슴공원에서』.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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