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슴공원에서 (외 2편) /고영민
사슴공원에서 (외 2편)
고영민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어디까지가 여름이고 어디부터가 가을일까
누가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놓았다
오늘 나는 아주 먼 곳에 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은 침엽수처럼 무표정하다
젊은 어느 날의 책 속처럼 지금도
사슴공원 어딘가에선
사랑이 생기고, 비가 내리고
멀리 빈 들판엔 철새가 돌아온다
누가 구름을 사라지게 하고
비를 멈추게 할 수 있나
투명 비닐봉지에 금붕어를 담아 들고
한 소년이 급히 어딘가로
달려간다
공원에 잇닿아 있는 장례식장 마당에서
어느 가족이 늦은 상복을 갈아입고 있다
사슴울음소리[鹿鳴]를 들으며
나도 서둘러 당신에게 가야 한다
사랑이 식기 전에
밥이 식기 전에
————
* 녹명(鹿鳴) :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배고픈 사슴을 부르기 위해 내는 울음소리.
망종(芒種)
당신을 땅에 묻고 와 내리 사흘 밤낮을 잤네
일어나 반나절을 울고
다시 또 사흘 밤낮을 잤네
하릴없이 마당을 쓸고
더덕밭을 매고
뒷목을 긁고
흙 묻은 손바닥을 일없이 들여다보다
또 손톱 하나를 뽑고
당신을 생각하는 이 계절은 붉거나 노랗거나
혹은 그 가운데쯤의
빛깔
업듯 새끼 사슴을 안고
꽃나무를 나서는 향기처럼 신발을 끌며
마을 입구까지 길게 걸어갔다 왔네
인중이 긴 하늘
선반엔 들기름 한 병
극치
개미가 흙을 물어와
하루종일 둑방을 쌓는 것
금낭화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보는 것
소가 제 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
길게 몇번을 우는 것
작은 다락방에 쥐가 끓는 것
늙은 소나무 밑에
마른 솔잎이 층층 녹슨 머리핀처럼
노랗게 쌓여 있는 것
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떼가 몰려와
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
늙은 어머니가 묵정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것
어스름녘,
고갯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우체부가 밭둑을 질러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것
—시집『사슴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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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 1968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악어』『공손한 손』『사슴공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