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검은 사슴 /생기 있게, 그러나 너무 빠르지 않게 /채호기

율카라마 2014. 8. 12. 10:43

검은 사슴

 

   채호기

 

 

 

새벽 숲에서 검은 사슴과 마주쳤을 때

검은 사슴은 몸을 정면으로 돌려

몇 그루 나무의 검은 수피를 지나,

떨리는 가지와 잎을 지나,

똑바로 인간의 눈을 응시했다.

 

그 짧은 시간

꾹 다문 입 위 촉촉한 검은 코와 콧김.

유선형의 얼굴 양쪽에 큰 나뭇잎처럼 펼쳐져

잎맥이 도드라진 실핏줄 선명한 두 귀. 이마 위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세를 꺾어다 붙인 빛나는 두 뿔.

무엇보다 바닥모를 깊은 수심의 검은 눈동자가

 

인간의 두 발을 꼼짝 못하게 멈춤 속에 붙잡아 두었다.

주위의 모든 나무들이 그를 옹립하며 수직으로 서 있었다.

검거나 회색인 나무줄기에 번져가는 녹색 잎들의 부드러움이

그의 마음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렌즈가 나뭇가지들을 헤집을 때

쓰러져 있던 한 나무가 일어서듯

갑자기 또 다른 사슴이 일어섰고

둘은 화들짝 산 아래로 사라졌다.

(해칠까 무서워 도망간 거라고?

그건 인간의 터무니없는 상상)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새벽의 영역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겠다.

저녁에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겠다.

 

 

                           —《포엠포엠》2014년 여름호

 

 

생기 있게, 하지만 너무 빠르지 않게

 

 

 

술책으로 늘어선 가구들, 느닷없는 이미지 삽입.

네가 알고 지내야 할 여자가 있지.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에서 풍기는 강한 향기에

스스로 사로잡혀 있는 여자.

 

정절과 고귀함과 부드러움의 자세.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그치기 전에

미소 짓는 여자를 풀어헤치고 싶은 내장의 충동.

당신 속에 어떤 구체적인 것이 있나요?

 

개의 주둥이처럼 뻔뻔하게 아무것이나

건드리는 탐색하는 듯한 말투.

남자관계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안다는 걸 과시하는

 

깔보는 듯한 불쾌한 시선에도

다소 과장된 주의 깊고 온화한 예절은

남편에게서 배운 것이겠지.

그들은 서로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다. 언젠가 본 적 있지?

 

검은 눈이 계단 위로 어지럽게 날렸다.

희미한 흥분이 차가운 대리석에 스며들었다.

비록 현관에서 한 발짝도 들이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남자가 그녀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온 흙 묻은 발자국을 그녀는 몰랐다. 언젠가 본 적 있지?

익숙한 정신병원의 현관이 떠올랐다.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의 말이 부인의 환상 속에 어떤 격정을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술책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새벽이 있다.

 

 

 

                         —《문학들》201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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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기 / 1957년 대구 출생. 1988년《창작과비평》여름호로 등단. 시집『지독한 사랑』『슬픈 게이』『밤의 공중전화』『수련』『손가락이 뜨겁다』『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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