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기혁

율카라마 2015. 1. 25. 10:37

 

파주坡州 (외 5편)

—유년의 레옹 베르트에게

 

   기 혁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

택배상자 속 대기가 궁금해진다

 

노을이 질 때마다

구름의 살결을 보면서 날씨를 매만지던 시절이

책의 사위에도 일렁이는 것이다

 

별똥별의 군락지를 가슴에 품은 채 바람을 탔다던 아버지,

대기가 없는 달의 중력을 가정하며 나보다 꼭 6분의 1만큼 가벼운 생애를 살았던

 

내 외로움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어둠이다

근본 없는 혁명은 내내 과거의 혈육을 찾아가는 것

 

후배위를 좋아했던 유물론자를 사귈 때조차

몇 번의 섹스와 이별 대신 뜯지 않은 택배상자를 건네기도 했다

 

타인의 우주를 받아든 사람들은 사막을 표류하는 비행사를 떠올립니다 더러는 지구에 없는 암시(暗示)를 읽기도 했지만 직육면체의 밤하늘에 공전을 계속할 에움길을내지는 못했습니다 지리학자의 별을 지나 도착한 일곱 번째 행성에서 어둠은 그저 낮의 그늘일 뿐이었고 그런 나의 자괴를 사랑이라고 다독거리던 옛 애인은 어린왕자를 모던보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지요 주변을 더듬어 자신의 어둠을 울어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 교양이라면 한평생 우주를 곁에 두었던 엄마의 교양은 인공위성이 틀림없습니다

 

책장의 내용들이 견고한 우주를 녹여 갈수록

어둠을 부정하지 않던 방랑의 가계,

마음의 양식을 보관하던 입지立志*의 가슴께는

파주의 어떤 물류창고보다 차고 습하고 절판본이 많았으므로,

별똥별이 떨어지는 새벽녘이면

사물의 반어(反語)로만 대화를 나누던 소원도

누군가의 입가에서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보이지 않는 폭발과 팽창을 눈으로만 삼켜 버린 생애를 떠돌다

서로의 문전을 향해 발끝을 옮길 때

잘못 부른 이름 또한 소혹성의 궤도로 슬픔을 비껴간다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던 양은 그 안에 있어.

 

당신이라는 낮달은 잘못 나온 것이 아니라 너무 얇은 파본이었을지 모릅니다 조심조심 이불 속에 웅크려 택배 상자를 개봉하면 비좁은 우주를 품은 천막(天幕)이 고갯길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고갯길이 많은 동네를 파주라고 부르던 슬하가 슬퍼지는 것은 옆자리의ㅣ 어둠으로 밤낮을 구분해 온 당신의 일생 어딘가 파주의 풀을 뜯던 양들이 자욱하기 때문일 겁니다 누구에게나 펼치지 못한 페이지가 있고 제목으로 알 수 없는 독서가 있습니다 문맹의 꽃들에게 붙여진 꽃말은 자궁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지구의 첫울음을 닮았습니다

 

 

  ———

  * 뜻을 세우는 나이.

 

 

 

비너스

 

 

 

나와는 손잡지 않으려던 눈들 사이,

월요일의 유리창 너머

눈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

화장기 없는 너를 어루만질 때

 

눈사람과 눈싸움을 하면

피를 흘릴 수 있을까?

지문(地文)이 없어도

포옹을 할 수 있을까?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를 떠올린다.

색색의 관객들이 두 팔을 벌린다.

 

 

 

호텔 팔라조 베르사체*

 

 

 

캥거루는 원주민 말로 ‘나는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의 이름을 지어내기 전에

너와 나의 나무가

하나의 연두색으로 까다로워지기 전에

 

풀잎을 쓰다듬으면

아프리카 사자들이 갈기를 세우고 정원 구석구석

긴 송곳니들이 자라나던 시절에

 

우리는 지구의 신념처럼 모르는 걸 반복했다죠

 

호텔 팔라조 베르사체의

서로 모르는 사람들과

서로를 모르는 베르사체

 

간밤에 욕실에서 물이 샜어요 우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테니

벨 보이! 여기 베르사체 좀 옮겨다 줘요

 

보이지 않는 부분에 이빨 자국이 생겼다는,

영국인 신혼부부의 우스갯소리가

품에 안은 코알라를 더 선명하게 분리하는 여정

 

캥거루가 '통통통' 모국어를 사용하면 좋으련만

우리는 기념 촬영이 끝난 중국인처럼

유칼립투스 이파리를 입에 물고

각자의 호주머니를 뒤져요

 

로비엔 늘 맥락만 사는군요?

 

아무도 없었지만 누구도 혼자서 방을 찾을 순 없대요

 

 

  ———

 

  * 오스트렐리아 골드코스트에 위치한 호텔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소나무가

허공으로 뿌리를 내밀자,

지상도 지하도 아닌 나라가 생겨났네.

 

그 나라 시민들은 블랙 러시안이나

화이트 러시안 표정을 지으며

허공에 허파를 만들고

심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네.

 

몇 번의 눈사태와 크리스마스가

달궈진 아스팔트 아래 묻히는 동안,

독재자를 연기하는 배우를

지도자로 추대하기도 했네.

 

그 나라의 모든 병명은 비유였으므로

의사는 처방전 대신

시를 적어 내밀곤 했지.

 

엘리베이터를 천사라고 부르게 된 건

그 나라의 돌림병 때문이었네만

하늘을 나는데

꼭 혁명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네.

 

천사를 타기 위해 필요한 중력을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마련했고

그것을 적분해

사랑이라 부르기도 했었네.

 

떠돌이 악공의 연가가 끝나 갈 무렵

+에서 -로 전류가 흐르는 건

기타 줄만이 아니었다는군.

 

잊었는가? 소나무가 뿌리내린 곳에는

사철이 없다는 걸 말일세.

 

여름이 끝나고 드라마가 찾아오고 있다네.

천사가 지나간 자리는 모두

그들의 박수일 따름이었네.

 

 

 

유물론

 

 

 

산업과 혁명이 서로를 유보하는 밤, 한 무리 인형들이 자정의 부근을 지난다

 

별빛과 달빛의 노동이 미치지 않는 그곳엔

외눈박이 고양이의 눈알이 북극성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홉 목숨에 하나의 눈이 남는다는 건 눈썰미로 완성되는 생계의 반을 내어주는 일

 

어떤 상인도 자신이 가진 것보다 많은 심장을 거래하지 않았지만

북극성을 따라 걷는 인형들은 채 본드가 마르지 않은 이목구비로

 

위태로운 천사의 날갯죽지며 머리만 남은 마술사의 무게를 가늠하기도 했다

 

중력으로 남긴 이윤을 장물처럼 거래하는 담장 위엔

옹기종기 모인 굴뚝새들이 화약 냄새를 풍기는 별똥별을 꿈꾸다, 떨어져 나간

인형의 태명이며 모국어 따위를 물고 온다

 

핏속을 흐르는 야상곡조차 한낱 몽유병자의 아침이란 걸 알고 난 이후부터,

철야를 끝낸 본드 냄새는 더 이상 영혼이 아니었으므로

 

외눈박이 고양이는 감은 눈을 다시 한 번 감아

죽음의 모든 방위를 한 장 지폐 속에 감춰 두려 한다

 

왔던 길을 돌고 돌아 여전히 자정의 부근인 근대,

유적만 남은 식민지인들이 그들을 꼭 닮은 유물을 찍고 계통수를 그리고 시세를 모의한다

끝끝내 도래할 유일신의 장외거래에선 잘못 조립된 인형들의 단추를 사고판다

 

인형 속 인형이 타인의 눈을 뜨고 만든 피라미드마다

태양을 입에 넣어 만든 설화 속 주인공들, 그들을 비호하는

내일이란 파라오가 기원전 몽상에 방부제를 덧씌운다

 

차곡차곡 땅을 일궈 핏빛 벽돌을 뿌리는 잔업과도 같이

도시를 미생물로 쓰는 현생 인류의 생태학

 

북반구로 갈수록 버려진 인형들의 머리털이 길어진다

 

 

 

나처럼 예쁜 여자

 

 

 

한 남자를 부르는 동안

잘못 튼 샤워기처럼 무심했던 여자가

 

하늘을 본다

비가 내린다, 한다

 

매일 아침 목욕물을 받으며

한 남자와 나눠 가질 빗소리와

피워 올린 무지개를 떠올리던 여자가

 

내렸던 비를 맞는다

검게 변한다, 한다

 

케이크 조각의 각도만큼

한낮이 빠져나간 자리엔

수만 번 휘저은 감정의 거품들이

치즈 크림처럼 굳어 가는

여자의

구름

 

소나기가 내리면

구름은 기타가 되고

한 남자는 목소리를 잃고

다리부터 허리까지,

오랜 기우제를 지낸 여자의 목젖이

먼저 젖는다

 

점점 더 묽어지는 여자의 시간이

이 빠진 그릇처럼 풍만해지면

깨진 이빨을 간직한 한 남자의 저녁도

동화처럼 포개진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여우와 호랑이를 앞세우던 그 비가 다시

내린다, 한다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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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 197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2010년 《시인세계》신인상(시), 2013년 《세계일보》신춘문예(평론)로 등단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했으며,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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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제33회 〈김수영문학상〉심사평

 

  _김혜순

 

   시인의 이름을 가린 시집 분량의 원고들을 한 상자 받았다.〈김수영문학상〉의 심사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제출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원고를 읽다 보면 뒷부분에서 긴장이 떨어지거나 소품들이 묶여 있거나 해서 앞부분을 읽었을 때의 기대가 깨져 버리는 것을 목격할 때가 많다. 어떤 시집의 경우는 앞부분의 시 세계나 목소리가 뒷부분의 그것들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과연 한 시인이 이 시들을 쓴 것인가 아니면 시를 써 나가는 과정 속에 어떤 발견이 있어서 크나큰 변모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작은 코스모스」외 51편은 은유적으로 동일시된 대상의 목소리로 시작 자아의 고백의 직접성을 비껴가면서 일종의 분절된 무늬의 세계를 직조하는 시들이 좋았다. 그 무늬의 세계 안에는 화자와 동일시된 사물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사물의 곁가지들이 무늬의 세계를 더듬어 주었다. 그 손길에서 정서가 움트고 시적 서정이 펼쳐졌다. 그렇지만 응모된 시들이 들쭉날쭉했고, 어느 땐 감정이 앞서는 듯한 시행들이 있었다.

   「과녁을 이해하는 화살은 없다」외 49편의 시인은 차분하게 묘사된 문장들의 진행으로 특이한 세계를 직조해 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시적 서정을 끌고 가는 시인이 품은 정서의 세계가 처연했다. 그러나 ‘정체 모를 것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가려워졌습니다.’처럼 색다른 장면이 콜라주될 때 묘사는 그로테스크해지고, 묘사적 정황들은 큰 사건의 창고 안으로 편입되었다. 그러자 상상력으로 그린 그림의 세계가 만화책이나 영화에서 뜯겨진 세계처럼 현실감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장복(臟卜)」외 49편의 시들은 문체가 특이했다. 행갈이는 자주 되어 있지만 만연체로 몰아가는 문장들이 특별한 낭독법을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시에는 여러 지점을 통과하는 프레임이 있고, 그 프레임에 따라 현실적 상황이나 풍경의 정황들이 배열되는데 그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지울 수 없는 사건 하나가 비극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의 연상을 따라가는 어두운 어귀들 속에 고백으로부터 진화된 해석의 고된 문장들이 나타난다. 잠언의 고통과 고통의 잠언들이 나타나면서 한자어들로 내리박히는 징 소리들이 들린다. 형용사와 명사 사이의 괴리로 낯선 세계를 음각하고 그 음각들이 낯설고 어두운 이면의 우주를 현현하는 것이 흥미롭다.

   「레위기 저녁」외 49편의 시들에는 현실의 공간, 관계, 시간을 신화적 설정으로 변모시켜 가는 시의 진행이 있다. 시에는 신선하게 빛나는 경쾌한 독백들이 있다. 평이한 듯하면서도 능청스럽게 비유하는 발랄함이 그 뒤에 숨겨진 어둠의 무게를 역설적으로 짐작하게 했다. 그렇지만 시들이 너무 평이하게 펼쳐질 때나 너무 짧은 시들은 그 울림이 약했다.

   「구체적 소년」외 52편의 시들은 다양한 시작의 방법을 시도하는 느낌이 있었다. 묘사로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 외에도 시적 사유의 전개와 시인의 고백이 상호 얽혀 들면서 시 장르 자체에 대한 고민이 전개되는 점이 볼만했다. 그렇지만 시인이 전지적 자리에서 시행을 통제하는 느낌이 시 장르의 자율성을 방해했고, 오히려 그렇게 되자 시인과 시가 서로 서걱거리는 듯 보였고, 비유가 시 안에 녹아들지 않는 듯했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외 51편의 시들은 시차가 있는 명사들의 투척, 사회적 현실, 우주적 형상, 개인적 상념, 언어적 현실, 이미지의 현상을 뒤섞어 하나의 정서적 현실에 이르는 시들, 미적인 유희의 시들, 편집의 묘미를 가진 시들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서양식 의자 위의 저녁 시간」에서 ‘의자’-‘식구’-‘최후의 만찬’-‘만유인력’으로 장소 없는 장소를 끌고 가는 것은 개인적 상념일까, 이미지의 운동일까, 자유 연상일까, 은유의 연쇄일까 궁금해 하면서 시를 따라 읽게 되는 연상의 탄력이 이 시들의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남성적 정서의 굵직한 고백들, 목소리들, 유행 따위는 무시하는 시적 진행, 뜬금없지만 나름대로 장소나 현상을 해석하고자 하는 진술들이 흥미로웠지만 이 진행 속에서 “내 외로움의 생물학적 이미지는 어둠이다”처럼 센티멘털 우주가 우수수 쏟아지는 순간들도 있었고, 그 센티멘털 우주를 뒤집어 “타인의 우주를 받아든 사람들”로 감정을 변모해 유머러스한 정황을 가동하는 순간도 있었다.

   시집 전체를 통틀어 자신의 시 스타일을 끝까지 견지하고, 한 편 한 편에서 긴장을 놓지 않은 시들을 창작한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외 51편을 당선작으로 선했다.

 

  _김기택 (부분)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외 51편은 냉소의 유머가 돋보인다. 이 시들은 말의 의미가 발생하는 차이들을 지워 버리는 일상, 무반성적으로 달려가기만 하는 삶의 관성적인 힘을 직관적으로 잡아채는 데 능하다.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들의 위치를 바꿀 때 ‘인형’과 ‘포유동물’의 차이, ‘동생’과 ‘강아지’의 차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왔던 존재와 하찮게 여겨 왔던 사물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맥락만 있고 뜻은 없는 공간의 놀이와 웃음이 생겨난다. 종종 심각하고 거창한 의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되고 사소한 것은 심각해져 개인과 존재를 무력화시키는 삶과 일상의 긴장은 서로 뒤섞이며 차이가 희미해지거나 해체된다. 이 시들은 때로는 독자를 시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상상하게 하거나 놀게 하는 힘이 약해서 지루하게 읽히기도 한다. 그럴 때 시적 언어는 순간의 직관과 본능적인 리듬의 야성이 밀어내는 게 아니라 지적으로 조심스럽게 탐색한 머리가 직조하여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도 이 시편들의 개성적이고 일관성 있는 목소리가 수상에 이르는 힘이 되었다.

 

  _서동욱 (부분)

 

   수상자인 기혁의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외 51편의 작품들은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는 듯하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더라도 감성적 리듬과 두뇌의 노동을 동시에 요구하는 잘 짜인 견고한 구조물이 발견된다. 이 성실한 구조물은 시편들 전체를 가로지르며 모든 작품들을 팽팽한 빨랫줄에 걸어 놓듯이 들볶는다. 에피소드, 사변적 성찰 등등이 수없이 시적 리듬에 개입하지만, 그것이 시적 긴장감의 발목을 잡기보다는 다변이라는 우회로를 거치는 제스처를 만들어 내며 시로 하여금 삶의 다양한 과녁들을 명중시키도록 만든다. 오랜만에 지성과 감성적 재치를 높은 단계에서 조화시킬 줄 아는 시인을 만나 기쁘다. 겨울에 어울리는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가 터져도 좋을 것이다. (*)

 

       (심사평은 《세계의 문학》2014년 겨울호에서 가져옴.)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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