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이만섭

율카라마 2015. 5. 30. 16:12

나팔꽃 당신

 

 

 

  

이 아침에 나팔꽃이 피었군요.

나팔꽃이 핀 아침은 환하고 기뻐

담장 가에서 살며시 웃어줍니다.

나팔꽃이 당신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가냘픈 덩굴로 올라 이슬 머금고

해맑게 웃는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럽습니다.

 

마디마디 여린 줄기를 감고 헤쳐 간 자취는

당신이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서

애써 피워낸 사랑입니다.

 

나팔꽃이라고 어찌 꽃들의 정원에서 피어나고 싶지 않겠습니까,

당신이라고 어찌 남들처럼 아름다움을 가꾸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아침, 나팔꽃은

울타리 안에서 화사하게 피었습니다

당신 또한 소중한 모습으로 내 곁에 있습니다.

나팔꽃처럼 웃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물푸레나무의 미간(眉間)을 읽다  

    

 

 

 

볕 좋은 날, 개울가에서

이마와 이마를 맞대고 반짝이는 물푸레나무  

푸른 이파리들을 보면

마음이 저절로 싱그럽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소담하게 피워낸 흰

꽃을 언뜻 보았을 때

그 빛나는 생명의 환희는,  

 

한 줌 햇살에도

가슴까지 밝아오는 기쁨이 있는가 하면

빛살이 닿지 못해 개화하지 못한 꽃봉오리

개울물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물푸레 물푸레 제 몸 풀어가며

어디에도 슬픔 한 점 없는 평상심이 더 아름답다  

 

기쁨이나 슬픔이 안부를 물어 올 때

공손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얼굴과 얼굴 사이에 핀, 또 다른 꽃으로

기쁨은 떠받히고 슬픔은 흘려보내는

마음의 은신처를 몸 밖에 두었으니    

 

나무는 자화상을 미간에 새기는지도 모른다

 

 

 

 

윤회(輪廻)의 詩를 적다

 


 

 

한 뼘 너비로 재는 길이인들
두 팔 너비로 재는 길이인들
그것들이 모여 해와 달처럼 둥글어질 수 있다면,  
 
둥글고 또 둥글어져, 설령
묵정밭에 날아온 콩새가 까먹는 이름 모를 풀씨 한 알갱이라 해도, 그도 아닌
풀잎에 한 방울 이슬로 피어 아침 햇살과 더불어 사라진다 해도
둥글어 닿는 아름다움일 수만 있다면,  
 
밤하늘을 열어젖히고 별이 태어나
어둠 속 꿈을 밝힐 때
더불어 환해지는 지상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죽은 시가 별로 태어난다면
별이 죽어 시로 태어나는 일과 무엇이 다를까,
유성이 진 곳에 화석이 피듯
시가 죽어 지상의 뭇 생명들 곁에 아름다움으로 남는다면, 
 
그러나 죽지 않고 단지, 단지 시가 되어
덕지덕지 먼지 낀 채 지층으로 숨어드는 일은 더더욱 가여운 일,
밤하늘의 별은 저렇게 빛나는데
봄의 생명을 쓰고 싶어
그윽함으로 발아하여 파릇파릇 속살을 드러낸 연두 같은 그런 시가
죽어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가,
 
한 그루 나무와 한 무지 돌의 벗이 되고 싶어
창공의 바람과 땅 위의 풀잎이며
그것들의 문장이 되고 싶어  
 
호수에 고인 물 잔잔히 일렁거려도
더는 넘실거리지 않고 저 스스로 충만함으로 껴안는 시라면
세상의 상처들 그 곳으로 와 새살 돋아내고
꿈꾸며 잠들 수 있으려니,  《문장웹진 11월호》
 

 

 

 

 

 

 

 

`꽃들`이란 말

이 아름다운 낱말 속에 숨어 있는 이름들을

나는 낱낱이 호명하지 못하고

그냥 꽃들이라는 단음절어로 부를 때

그 지순한 꽃마음을 생각하면

무성의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모둠 해놓은 말인 듯 꽃들이라고 부르는

이 흔연스러운 기쁨을 어쩌랴,

우리의 일상은 나무도 돌멩이도 앞 냇가도

비로소 꽃들로부터 환해진다

그 섬약한 손길이 닿지 못할 때

햇빛은 어떻게 나무의 열매를 지을 것이며

바람은 무슨 흥으로 불어올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이 좁혀지고

그 눈빛마다 생기가 도는 것도

꽃들이 완충지대로 놓여 있는 까닭이다

산자락 휘감아 아름 동인 푸름과

강물에 물줄기 건네준 시원에 이르기까지

꽃들의 의미는 닿아 있다

샘이 솟고 새가 노래하는 이유가

꽃들이 피고 지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니

저 어두운 밤을 달려 다다른 아침

가슴을 깨우는 강물이여

말간 낯으로 피어난 꽃들이 눈부시다

 

도마

 

 

 

부엌사(史)는 도마가 쓴다

세상에 한 몸 내어 하는 일이라고는

노상 몸에 칼 맞는 일

아침저녁으로 무두질하는 잔혹

태사공의 궁형에 비한들

칼 맞는 도마가 독하다

몸을 내쳐 얻은 음식이 진상되는

그런 도마가 더 질기다

지금은 아내가 깍두기를 담그는 중이다

FM 음악을 틀어놓고 탁탁탁-

거침없이 휘두르는 비검무에

사방으로 나동그라지는 무 조각들 

칼의 율격이 고르다

저 수신(修身) 자세히 듣자니

도마가 칼 소리 받아 삼키고 있다

흡반 같은 밀착이다

피할 수 없을 때 즐기는 거라더니

옛말 허투로 듣지 않고

꿋꿋이 외길을 가며

난전의 차력사처럼 배 훌렁 걷어붙이고

몸에 맞는 칼, 표정도 당당하다 

결국 칼이 물러앉는다 

 

 

누가 돌멩이에 날개를 다는가    

   

                                                                   

 

 

허공을 향해 팔매질하는 이는 그 마음보다 더 높이 띄우고 싶은 것이 있다 목청껏 내지르는 소리로도 어쩌지 못하는, 그 무엇의 반향 때문일까, 포물선을 그리고 사라진 저편에 반쯤은 무방비한 채, 한평생 제 무게만으로 땅에 붙어 지낼 수밖에 없는 돌멩이에 날개를 달고 일회성의 원심력으로 따라 가는 눈빛에, 허공은 군말 없이 길을 터주고 바람도 좇지 못하는 비행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질 때 편지나 엽서도 그런 날개로 날을 수 있다면, 세상 어딘가에 떨어질 때도 제 무게만큼 온전하게, 때로는 힘껏, 그러나 그것은 가속력에 의한 소멸마저 떠안아야 하는 추락일지라도 기꺼이 비상을 감행하는 데는 지상의 어느 낯모를 한구석에 처박혀 바윗덩이의 입자로 남아있는 존재의 내력을 일순간에 생략해버리고 싶은 것이다 깃털이 깃털로서는 비록 하찮은 존재일 것이나 돌멩이에 날개를 다는 마음이야말로 그가 고백하고 싶은 시어 같은 깊디깊은 속말이 따로 있을 것이다 

 

 

  

산책자(散策者)

 

 

 

길은 육필이다

생각이 많을수록 활자처럼 또렷해지는, 보폭과 보폭 사이

행간이 가벼워지는 법을 은근히 숙독하는 중이다

 

음악을 듣듯이 걸을 수 있다면 안개처럼 내를 건너는 일 따위는 어렵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고동치는 심장의 부름인들 박차고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바람은 불어도 자태 내색하지 않고 

구름은 떠다녀도 들킨 적 없는

저 허공에 갈림길을 엮어놓은 듯 주석 없는 시구들,

손길 알 수 없는 길라잡이가 있어 시나브로 자성의 출구에 격문을 단다

 

시간이란 또 다른 강인 것을 상기할 때*

어렵사리 해독하고 나면 그곳으로 돌아오는 생각은 어지럽다가도 목록처럼 밑줄 가지런해지는,

그래서 지상의 모든 길이 강물에 닿아 있음을 깨닫는다

 

아직 물소리 들리지 않는 호젓한 길

마가목 흰 꽃가지에 부리를 비비고 날아간 직박구리

나무가 붉은 열매를 매달기까지 새는 발자국을 어디에 찍어놓을 것인가,

 

발길 내디딜 때마다 꺼풀처럼 벗겨지는 미혹이 있다면

모든 것은 생의 두려움으로부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가벼워지기 위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니

길은 언제나 스승이 되어 돌아왔다

 

  

*보르헤스의「시학」에서 인용 

 

 

 

푸름의 시간

 

 

 

 

북한강 물 보러 가는 길에 청평에 든다

산도 물도 온갖 푸른 빛

더는 지나칠 수 없어 물 등을 타고 앉듯

강물에 손을 적시니

손등에 잎맥처럼 번져오는 푸른 물줄기

강에 어린 민낯에도 물이끼 같은 푸른 빛

금세 건져 올린 손에서 뚝뚝 푸른 물방울 떨어진다

조약돌 하나 움켜쥐고 물수제비를 띄우니

푸름에 겨운 듯 청,청,청, 화답하는 소리

푸른 산이 강물에 응결될 때까지

내 마음이 벼른 것도 푸른 물색(色)이었다

긴 가지 수면에 치렁치렁 내려 돛배를 젓는 버드나무

청파로 이는 물결에 귀 대이고 있다 

나무 아래 잠시 마음 묶이니

어느덧 나는 *유하백마가 된다

강상을 건너오는 훤훤바람에 들풀들 드러눕고

물결에 떨어뜨린 흰 말의 깊은 눈매여,

그대 그리움 어느 곳을 향하는가

나의 고삐가 나무의 물관에 닿으니

갈기처럼 일어서는 마음이어라

푸를대로 푸르러져 이두수(二頭水)를 향한 물길

그르메 같이 내 가슴에도 번져 와 

저녁이 올 때까지 붙들어놓고 있었다 

 

 

 

 

 

저녁길

 

 

  

 

어둠이 깃들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길이 유난히 가까이 따라온다

동행이라도 하려는 듯 바짝 붙어서

뚜벅뚜벅 발길을 재촉한다 

그러다가 집이 가까워지고 발소리에서 멀어지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돌이켜보면 길은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많이 거리를 오고 갔던가

혼자 있어도 혼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배경과 함께 걸었다

그러므로 길이란 혼자 가지 않는 법

풀숲이며 노을이며 하늬바람이며

발길이 미치는 곳까지 길동무하고 

때로는 휘파람새도 날아와

엉겅퀴 위에서 호오이 호오이 노래해 주었다

내가 변방의 어느 길을 걷다가

땅거미 밀려와 앞이 막막할 때

어둠 뒤편에서 달이 마중 나와 길을 밝혔다

그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사이로

포근한 저녁길을 보았다

 

 

 

 

 

 

 

마당



평평한 땅을 밟고 서 있으면
마당이 궁금해진다
귀마다 각기 자리가 있어 그쪽으로
길을 여는 원심력으로
비어 있을수록 넉넉한 앞섶이기에
그래서 시골집 마당은 살림의 도량을 짓고
두루두루 생활을 거느리고 있다
모퉁이돌에 경배하듯
아침저녁 마당을 쓰는 내력은
저 평면이 단단해야 곳간이 듬직하다는
아버지 말씀이 아니어도
지붕의 용마루며 처마끝의 서까래가
확실히 바르게 드리워 보이고
담장은 담장대로 대문은 대문대로
흐트러짐 없이 건사하는 것이니
토방 아래 대문 앞까지
날빛 불러들인 편편함만으로도
매양 지신 밟듯 평온하다

 

 

 

두부고(豆腐考)

 

 

 

 

저 무른 것이 반듯하게 놓인 것을 보면

연골 사이 서로 엉켜있는 살들은 대견하다

애초에 두부를 만든 사람은

아마 편히 먹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음식의 법도를 내세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콩으로 할 일은 얼마나 많은가

그 가운데 조리법을 조심스럽게 고안하다가

저리 자세를 바르게 세우는 법식을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콩은 사라지고 두부가 대세다

반드시 소반 따위에 받혀놓아야 하는 것이니

모가 나 있어도 궁굴어져 보이는 성미는

언제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존심을

암암리에 스스로 차지한 것이리라

이모저모 느슨한 듯 편안한 차림새는

뭇 음식의 한 법도가 될만하다

이름 하여 콩을 불려먹는다는 말은

두부에 이르러 완성을 본 것이다  

 

 

 

 

달빛은 혼자서

 

 

  

유약하나 저 예리한 자태는

손 하나 까닥 않고도

문창호지에 시누대나무 수묵으로 쳐놓고

다스리는 고요가 호젓하다

 

누구일까 마중하는 이,

오래전부터 이쪽을 향해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며

꽃밥을 짓듯 무연히

열 손마디 저렇게 가지런한 것은,

 

신명이다,

적요하고도 예스럽

어둠에 닿는 족족 연두처럼 새날이 되어 깨어나는,

돌아보면 그리움은

더할수록 얼마나 모자랐던가,

 

밤이 이슥하도록 우려내는 모과향 한 자락  

창가에 은은히 번져오는데 

저 눈을 뜨기까지 시리도록 기다린 가슴이

마침내 견디기 어렵게 뿌듯하다

 

이 밤의 숨결 새근거리며 잠겨갔으면,

 

 

 

 

 

부드러운 칼

 

 

 

사과를 깎다 보면

과도의 예리한 날이 육즙을 즐긴다

 

칼은 한 마리 활어처럼  

스륵스륵 과육 사이를 헤엄쳐 다니고

은근히 피워내는 사과 향기

주변이 오롯하다

 

제 몸 베이면서도 어느 한 곳

상한 데 없는 사과의 짜릿한 비명이

환하고 둥글게 피어난다 

 

상큼한 맛을 즐긴 칼은

이윽고 사과의 몸을 빠져나와

포만감에 겨운 듯 소반 위에 드러눕는다

 

꽃 핀 자리처럼

눈부신 사과의 속살 지어놓고

달콤한 육즙에 젖어  

자르르 윤기 흐르는 과도의 날

 

그 견고한 부드러움

 

 

 

 

골목은 둥글다 

 

     

 

 

골목이 기다랗다고요, 천만에

그렇다면 어귀가 따로 있고 끝이 보이지 않아도

그곳에 대문이 있을 터이고

간혹 대문보다 더 깊이 들어박혀 있다는 건가요,

왁자지껄하게 싸우며 놀며 크는 아이들

제풀에 겨워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고양이는 그제야 어슬어슬 순찰하러 나옵니다

적요해지는 동작 소리,

갑자기 담벼락이 뻣뻣해지네요

사열을 받는가 봅니다

그래서 골목에 들면 고양이는 더 의젓해지나 봅니다

그게 아니군요, 일상적 코스를 밟고 있군요

고양이도 제 삶의 방식이 있으니까요

굽은 담장을 따라가는 발자국은 영역을 표시하고 있어요

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꾸 실눈을 치켜뜹니다

언제 어디서 호각소리가 들릴지 모르는

일색의 긴장된 몸짓이어요 

보초병처럼 서 있는 담장을 완주할 작정인가 봅니다

그러다보면 골목은 머리가 꼬리에 닿을 테지요

저 해찰, 심심한 아이의 근성을 닮았군요

잘하면 어디쯤인가에서 한바탕 뒹굴고 가겠습니다

골목이 둥글다는 것을 보여주겠습니다

 

 

 

 

봄 숲에 들면

 

 

 

 

봄 숲에 들면 난데없는 격발소리 요란하다

타앙 탕- 고요한 꽃문 열고 나오는 신생의 소리 

전열을 가다듬어 꽃차례 짓고

피웅피웅- 마구 갈겨대는 총포 소리 일대 난전이다

나무들은 마른 가지 올려 바리케이드를 치고

산동백은 비탈에서

진달래는 바위틈에서

동그란 화서(花序)를 지어 뿜어내는 개화 소리

자지러지듯 드러눕는다

계곡을 물들고 능선을 오르는 분홍빛 점령군

비명으로 피워내는 정경은 가관이다

그래서 봄꽃은 명랑하고 화사로운가

고지를 점령한 신생의 전사들

꽃자리마다 연두의 깃발을 올리고

자화자찬(自花自讚) 일색이다

꽃의 포성에 에워싸인 귓불이 먹먹하다

청춘의 봄꽃인들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어떻게 피워낼까,

 

 

 

안개의 전모(全貌) 

   

 

 

 일찍이 그는 허공에 몸을 신전으로 세워 경계를 잴 수 없는 너비의 휘장을 두르고 무심과  무심 사이를 넘나들다가 가시권이 혼미해지자 그만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무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실종에 연루된 자들마저도 명백하게 밝히는 일은 주검일 것이라며 모두 음모에 휘말린 피해자들이라고 항변하였다. 

 

가까이 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에워대는 겉 표정은 그대로인데 대체 어디로 숨어든 것일까,               

 

한 치 미동 없이 희뿌옇게 잠긴 풍경은 무침 주사를 맞고 누워버린 모르핀 환자처 럼 무기력한 채 눈빛만 가물거리다가 마침내 기다란 강둑도 그 건너 울창한 숲도 모조리 가시권 밖으로 사라져갔다.         

 

삶이란 참으로 미혹하고 신비하다 늘 보이지 않는 형상과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공유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는 일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을              

 

제 신전 앞에서조차 미혹에 휩싸여 경배에 든 저들의 해명 못할 태도가 비록 자신의 꾀에 속는 어리석은 짓이라 해도 언젠가  햇빛 앞에 소상히 밝혀지면 투명하고 참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것임을,

 

 

 

 

바람의 형용사

 

 

                              

한 무리 되새떼가 군무를 짓자 허공은 재빠르게 그물을 거둬간다

 

아구 같은 입속으로 들어가버린 새떼들,

 

새떼들은 잔잔하다 싶으면 언제고 깃들어와서 날갤 파닥거리다가 사라지곤 한다

 

저 홀연하고 기이한 몸짓은 허공이 비어 있는 내막이다

 

한 마리 새의 날갯짓인들 허공은 마다했던가.

 

 

 

 

조용한 닿소리에 젖다

 

 

 

 

  성찬의 언어조차 찌든 말로 풀어 쓰는 우리말이 홀대받는 이 어눌한 시대에 온갖 허접스러운 된소리에 멀쩡히 먹어간 귀가 일상의 귀살쩍은 소음이 사라진 저녁에서야 창호지의 고막을 가만하게 여닫으며 섬돌 아래로 말갛게 내리는 찬이슬 소리를 듣는다 겨우 명징하게 들리는 저 가느다란 닿소리는 진종일 누구 하나 귀 기울어주지 않던 명지바람이 흔들고 가는 하찮은 들풀이나 들려주는 예사말 같지만 담장 넘어 사라진 재넘이 편에 안겨오는 닿소리다 소금쟁이 놀고 떠난 연못의 파문이나 배추흰나방 날아오른 청무 밭에 너울 짓는 푸성귀의 주파수 같은 소리를 소음에 찌든 세상은 한 번 들어 보았으면 두 귀를 막으면 웅웅거리는 소리가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라던 어릴 적 말처럼 귀 안에 그처럼 거대한 소리가 살고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예사소리로 듣고 싶은 귀, 저녁의 처마 밑에 사그락사그락 달빛 내리는 소리며 정원 한곳에 여릿여릿 꽃잎 열리는 소리며 연음으로 발성하는 나지막한 닿소리가 이 저녁 귓전에 조용히 속살거린다

 

 

 

 

 

실밥

 

 

 

허름한 옷에서 밥 짓는 냄새가 솔솔 난다

한 몸 가리어 풍상을 견디다 보니

뜯긴 솔기 사이에서 앵돌아 나오는 밥

기제사에 메를 짓고 내오듯

밥은 끈기 잃어 퍼석퍼석하다

그간 옷은 얼마나 말 못할 거식증에 시달린 것일까,

육감적으로 부끄러운 표정이다

몸의 접경지대에서 오랜 세월 부지하며 

어미의 탯줄 같은 실을 빌어 옷을 먹여 살리더니

이제 저렇게 고수레처럼 문밖에 내놓는다

산목숨인들 밥 거두면 그만일 진데

아무리 옷인들 아니 그럴까, 

세월마당에 낡아진 옷이 

실밥을 지어놓고 도대체 후줄그레하다

 

 

 

 

그루터기

 

 

 

  나무는 죽어서도 풍장을 치른다 밑동이 잘린 채 뼛속 깊이 생의 이름을 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무라는 말로서 그 이름을 대신한다면 굳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온당할까, 생을 움켜쥐고 수원지를 찾아 헤매던 뿌리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땅속 깊이 박힌 채 몸의 중심부에서 여전히 무슨 소식이 오길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베인 밑동은 깊은 고뇌에 들었다 살아 잎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건만 수액을 나르던 등걸은 잘려나가고 화살의 과녁처럼 나이테만 동그마니 남았다 그 표적에 앉아 세월의 출구 쪽으로 귀를 연다 똑,똑, 석회암 동굴에서 종유석을 키우는 물방울 소리, 오랜 세월 풍찬노숙으로 키운 얼마나 애써온 생인가, 생명을 지키던 가쁜 숨소리가 전류를 머금은 코일처럼 찌릿찌릿 감겨온다 생을 그리 내주고도 표정은 이처럼 담담할까, 누구나 삶의 단층을 들여다보면 그곳에 생이 지니고 온 지도가 혈류처럼 간직되어 있다 더 굵게 더 광활하게 그러니까 생은 둥글기 위해 살았던 것이다 나무 한 그루 자라서 베어질 때까지 평생토록 하늘을 향해 생명의 문장을 써온 것이 그 이유라면 이제 몸의 가장 낮은 자리에 중심을 내려 저렇게 나이테만 남기고 피안에 들었다 나무가 생의 이력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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