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허형만
가벼운 빗방울
허형만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매달릴 수 없지
가벼워야 무거움을 뿌리치고
무거움 속내의 처절함도 훌훌 털고
저렇게 매달릴 수 있지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나뭇잎에 매달리고
그래도 매달릴 곳 없으면 허공에라도 매달리지
이 몸도 수만 리 마음 밖에서
터지는 우레 소리에 매달렸으므로
앉아서 매달리고 서서 매달리고
무거운 무게만큼 쉴 수 없었던 한 생애가 아득하지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문장이 될 수 없지
그래서 빗방울은 아득히 사무치는 문장이지
종심(從心)의 나이
참 멀리 왔다고
나 이제 말하지 않으리
나보다 더 멀리서 온 현자(賢者)도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갈지 모르겠다고
나 이제 말하지 않으리
어떤 이는 말을 타고 가고
어떤 이는 낙타를 타고 가나
그 어느 것도 내 길이 아니라서
하나도 부럽지 않았던 것을
이제 와 새삼 후회한들 아무 소용없느니
왔던 길 지워져 보이지 않고
가야 할 길 가뭇하여 아슴하나
내 나이 일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이여
나 이제 말할 수 있으리
그동안 지나왔던 수많은 길섶
해와 달, 낡은 발끝에 치일 때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노라고
기억하라
세월은 참 무심하구나
그 해미 깔리던 바다는
수많은 영혼을 가슴에 묻느라
시퍼렇게 멍이 들어
마침내 폐선과 함께 가라앉고 말았구나
그러니 기억하라
생명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를!
믿음을 믿음으로 실천하지 않는 자를!
오늘도 팽목항 바다 위에서
쉼 없이 파닥이는 저 노랑나비 떼
명지바람 같은 날개로 훠이훠이 날아올라
산이라면 산을 넘고
강이라면 강을 건너
이 나라 천지를 휘덮는 소리에
우리는 아직도 먹장구름처럼 먹먹한데
세월은 참 무심하구나
그러니 기억하라
양심이 양심이기를 포기한 자를!
눈물이 눈물이기를 포기한 자를!
—시집『가벼운 빗방울』(2015)에서
-------------
허형만 /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1973년 《월간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시집 『淸明』『풀잎이 하나님에게』『모기장을 걷는다』『입맞추기』『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供草』『진달래 산천』『풀무치는 무기가 없다』『비 잠시 그친 뒤』『영혼의 눈』『첫차』『눈먼 사랑』『그늘이라는 말』『불타는 얼음』『가벼운 빗방울』. 일본어 시집 『耳を葬る』, 중국어 시집 『許炯万詩賞析』, 활판 시선집 『그늘』이 있다. 현재 목포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