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배용제

율카라마 2015. 7. 3. 19:18

(외 3편)

 

  배용제

 

 

 

물왕저수지 너울지는 물결을 바라보다

반짝이며 사라지는 햇볕의 시린 살을 한참 더듬다

눈물겹다, 라고 중얼거린다

 

그날, 거친 바람들이 잠을 흔들다 사라진 아침

소식이 끊겼던 친구의 부음을 듣는다

그 아득이 내게 전해지기까지

밤새 거리의 사물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친구의 마지막 숨결이 스민 그 밤의 바람들을

내내 뒤척이며 앓았다

나를 오래 찾았다는 그에게 닿아 반짝였을 마지막 햇살과

헐떡이던 목울대 끝 내 이름 석 자가 바르르 떨고 있었을까

잠결인 듯 꿈결인 듯 찾아와

차마 쉽게 해독되지 않는 각도로 기울어

우두커니 아득의 날을 맞는다

 

너무 간절한 것들은 아득해질 뿐, 사라질 수 없어 다만 아득해진 것들은

가끔 처연한 말들에 묻어 돌아온다

그 아득이 머무는 자리

물결 숨결 바람결 살결 맘결, 너울의 춤인 채로

꿈결 잠결 얼떨결, 또 어느 결에 반짝이다 사라지는 슬픔인 채로

결이란 아득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

 

이국의 낯선 마을 어느 모퉁이에 흘린 눈빛과 마음 하나에도

어느새 간절함이 깃들고

다시 아득해져서 낯선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내가 모르는 생의 이면들, 그리고 수수만년 전의 애인들

지금은 잊힌 꽃결, 노을결, 새벽결이거나

나를 향해 흔들리다 쓸쓸해지는 빛깔들처럼

까맣게 지워진 어느 날의 설렘이

알 수 없는 결의 너울로 다가와 나란히 누워 잠들기도 하겠다

 

언젠가 알몸의 애인이 돌아누워 한참 흐느낄 때

출렁이는 살결에 내 시린 살결을 포개어 가만가만 더듬을 때

그 희디흰 아득이 반짝 증발해버릴 것 같아

손끝에 와 닿는 너울이 눈물겨워, 라고 고백하던 언젠가처럼

 

물결 위 반짝 사라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오래 친구의 이름을 어루만진다

 

 

 

 

세상의 모든 한 번

 

 

 

비가 쏟아졌다
꽃들이 마구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처음 어깨를 두드리는 빗방울들은 단 한 번 나를 느끼곤 사라졌다

 

집집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늙은이들은 창밖을 힐끔거렸고 아이들은 장난감을 망가뜨렸다
무감각한 것들에게만 불이 담겨졌다

 

끝없이 제 색을 짓이기며 꽃이 지고 진 꽃 뒤로 처음의 꽃이 피어났다
나무와 늙은이 들은 한 번의 늙음을 오래오래 견디고 있었다
곳곳에서 구조 신호처럼 돋아난 불빛들이 서로의 증오를 확인하며 달아올랐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고
한 번이란 결말에 이르자 서로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마음들이 무너졌고
비가 쏟아졌다


세상의 모든 처음과 혹은, 모든 마지막과
모든 한 번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저녁이 되는 오늘

 


 

다정

 

 


나는 수많은 것들의 증오에 대해 증명하고 싶다

 

바람난 사내의 피부가 반질반질 빛나는 월요일 저녁
창가에선 몇 개의 화분이 말라죽고 있었다
멀리서 휘파람을 부르며 풋내기 계집애가 오고 있는 월요일 저녁

 

어느새 치를 떨며 빛나는 가로등 아래로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수레를 끌고 어떤 사막을 건너온 낙타를 바라보던
거대한 광고판 아름다운 공주의 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희디흰 살결 위에서 헐떡이는 바람
가장 불규칙적인 방법으로 싹이 돋고 꽃들이 피어났다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뿐이지

 

그렇게 나는 너에게 수많은 애무의 효과에 대해 말해주었다
서로를 겨냥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 증오와 권태의 종류가 있는지
매일 밤마다 깨달았다

 

세상에 어떤 밤이 고요했던가
또 어떤 어둠이 단 한 번이라도 세상을 내버려두었던가
꽃은 꽃의 방법으로,
바람은 바람의 방법으로,
눈물은 눈물의 방법으로 저마다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이 봄이라는 계절이고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뿐이지

 

그러나 나는 모두 기억하고 싶었다
어두워지면 더욱더 환하게 빛나는 공주의 희디흰 살결과
아무 때나 피어나고 아무 때나 시들어버리는 생물들의 욕정과
수많은 낙타의 길과
가장 은밀한 시간을 가르치는 고양이의 교육철학과
비명을 지르며 피어나던 너의 이상한 고통의 체위까지

 

다시 월요일에서 월요일까지
저녁이 오길 기대하는 바람난 사내가
어떤 은밀한 방식으로 이상한 꿈을 꾸어도 상관없겠지

 

 

 

 

적멸(寂滅)

 

 

 

대나무는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이다

꽃 피울 힘으로 중심을 비워내는 고독한 허공이다

 

천근만근의 하늘을 지탱하려

쌓아 올린 층수만큼, 그만큼 뻗어간 뿌리 속의 빈 것들

꽃이 아니어도 어린순을, 어둠을 밀어 올린다

 

조소리,* 한꺼번에 꽃을 피웠다는 대숲에 들렀을 때

언뜻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는 바람을 보았다

어느 고독한 노을 속으로 저물던 혁명가의 눈빛처럼

그 붉은 피가 지상에 막 당도하기 전

마지막 반짝이던 순간처럼

가장 쓸쓸한 노래를 듣고 싶었다

 

대나무는 꽃이 없는 식물이다

그 단단한 것과 가득한 것들이 건설하는 塔이다

아니다, 생에 단 한 번

스스로 죽음을 택하여 피어나는 눈빛, 꽃이 피면 죽는 식물

평생 비운 제 속의 허공에서 솟는 붉디붉은 꿈

 

서서 적멸에 이르는 사리 같은 꽃

그 옛날 탑을 완성하고 죽은 신라의 어떤 사내처럼

한 그루가 꽃을 피우면

대숲 전체가 꽃을 피우고 해탈해버린다는 적멸보궁을

오늘 난 눈앞이 깜깜해질 때까지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천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천불천탑을 보고 왔다

 

금강석보다 더 단단히 빈,

서해의 물보다 더 가득히 빈,

대나무는 스스로 허공이 되는 꽃이다

 

 

* 혁명가인 전봉준의 생가가 있는 마을.

 

 

                  

                         —시집『다정』(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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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제 /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1997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삼류극장에서의 한때』『이 달콤한 감각』『다정』.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만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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