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안희연의「당분간 영원」평설/ 이숭원

율카라마 2015. 9. 2. 22:21

안희연의「당분간 영원」평설/ 이숭원

 

 

당분간 영원

 

  안희연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말없이 돌을 나르는 사람, 돌을 끌어안은 채 돌이 된 사람,

그들의 등 뒤로

비밀스러운 해가 진다.

 

저것은 선의인가.

다 죽어가는 맹수에게 핏물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던지듯이

 

나는 내 안에

아직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쉽게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긴다.

돌을 나르는 것 외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평생.

밤은 밤대로 필요하고

식물에게는 목소리가 없는 이유.

 

나는 이 영원을 기록하기 위해

세상 모든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

 

쌓으려는 손도 허물려는 손도

모두 같은 시간의 용광로 안에서 끓고 있다.

 

불길은 잦아들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던 사람은 계속 계단을 오르고

떠내려가던 사람은 계속 물 위를 떠가고

 

날마다 아이들이 태어난다.

폭죽은 잔해의 다른 이름

 

어느 밤 꿈엔 낯선 이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당신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눈을 뜨면 길을 걷고 있었다.

어떤 개는 목줄에 묶인 사람을 끌고 갔다.

 

 

                      —《현대시학》201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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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과 내가 창과 방패로 부딪칠 때

 

      이숭원

 

 

 

 

   모순(矛盾)이란 말은 창과 방패라는 뜻에서 왔다.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의 결합이 '모순'이다. 나는 이 말의 유래가 마음에 든다.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의 결합이 '모순'이다. 나는 이 말의 유래가 마음에 든다. 그것은 인간 세상의 움직임에 대한 멋진 비유다. 문학 담론에서 '진정성'이란 말을 많이 쓴다. '진리'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고 '진정성'.  '진리'는 일반화된 보편적 이치를, 진실은 거짓이 없는 사실, 거짓이 없는 사실, 거짓이 없는 '바른 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진정성'은 아직 국립국어원 사전에는 오르지 않았는데, 이런저런 의견을 종합하면 '참되고 애틋한 마음' 정도의 뜻으로 이해된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사전에는 '진실하고 참된 마음'이라고 올라 있다. 이것은 동어 반복이니 '진실한 마음'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참되고 애틋하다는 것은 참으로 주관적인 설명이다. 내게 참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위선으로 보이고, 내게 애틋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감정 과잉으로 비칠 수 있다. 누군가가 내세우는 진정성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진한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여러 사람에게 공감을 주는 진정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른 많은 사람에게 그렇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진정성의 옆에는 늘 비진정성이 도사리고 있다.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은 없고,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 또한 없다. 세상은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창과 방패의 격전장이다. 모순이 세계의 본질이다.

 


   안희연의 「당분간 영원」은 모순의 어법으로 제목이 설정되었다. ‘당분간’과 ‘영원’은 창과 방패의 관계에 있다. 두 항목은 날카롭게 충돌하는데 시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이 두 단어를 붙여 놓았다. 세상의 실상을 드러내겠다는 의도다. 시인은 세계의 본질을 투시하려 한다. 가능성에 내기를 걸고 모험에 투신한 시인의 심령이 의젓하다. 박수를 보낼 일이다.

   길을 여는 첫 어조는 드라이하다. 관찰의 시선이다. 먼발치에서 말없이 돌을 나르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 사람을 다시 “돌을 끌어안은 채 돌이 된 사람”이라고 했다. 다음 시행에 “그들”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둘은 돌을 나르는 사람의 양태를 각기 달리 표현한 것 같다. “말없이 돌을 나르는 사람”과 “돌을 끌어안은 채 돌이 된 사람”은 다른 형상을 환기한다. 앞의 말에는 동작의 시간성이 있는데 뒤의 말은 정지의 공간성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이 둘은 시간적 순차성의 관계에 있다. “말없이 돌을 나르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돌을 끌어안은 채 돌이 된 사람”으로 귀결될 것 같다. 이것을 일상의 말로 풀이하면 열심히 돌을 나르다 보면 돌 자체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다. 무의미한 노동의 반복은 노동 주체의 정체성을 소외시킨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람이 돌이 된다는 것은 주객합일의 동양적 사유가 아니다. 달관이나 초월이 아니라 의미 있는 주체가 사물로 처리되는 물화(物化)의 국면을 암시한다. 사람은 결코 돌이 될 수 없다는 일상의 논리에 비추어 보면 명백한 모순이다.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다는 방패가 무언가에 뚫린 것이다. 이 모순의 현상 뒤로 해가 진다. “비밀스러운”이란 말에는 이 현상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화자의 당혹감이 담겨 있다. 비밀스러운 해가 진다기보다는 해가 비밀스럽게 지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시인의 의도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떠오른 표상을 구성한 것이다. 이어지는 언급 역시 마찬가지다.

   해가 지면 하루가 저물고 노동은 중지된다. 이것을 시인은 “죽어가는 맹수에게 핏물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던지”는 가식의 선의로 보았다. 내일도 노동은 반복되고, 노동하는 사람은 자기 의미를 잃고,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터이니 그런 상상이 가능하다. 사실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가식의 선의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통찰은 훌륭하다. 창과 방패가 정면 대결을 하지 않고 적당히 주장만 내세우기 때문에 우리는 살 수 있다. 창과 방패가 적절히 서로의 위치를 교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주장만 할 때 우리는 살 수 있고, 전쟁이 나면 남한의 전인민이 궐기하여 정권을 타파할 것이라고 말만 앞세울 때 우리는 숨 쉴 수 있다. 두 주장이 행동으로 바뀌면 삼천리금수강산은 불바다가 된다. 말의 여유로 극단을 유예할 때 우리는 살 수 있고, 그 동안은 아름다움이 존속하게 된다. 이것이 창과 방패가 부딪치는 세상에서 사는 요령이다. “아직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는 시행의 ‘아직’이라는 부사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은 파멸을 유예하고 있는 인간의 간사한 꾀에 부치는 가슴 저린 찬탄이다.

   다음 다섯 개의 시행, 다시 말하여 이 시의 넷째 연은 지금까지 내가 펼친 담론을 친절하게 시의 형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우리의 생은 무의미한 노동의 반복이며 무의미한 반복이 지속 가능한 것은 휴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 시인은 세 행을 빼고 다음 두 행만 남겨 놓아도 좋았을 것이다. “쉽게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긴다./ 식물에게 목소리가 없는 이유.”

   노동의 시간도 당분간이고 해가 지는 시간도 당분간이며 밤의 휴식의 시간도 당분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영원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당분간 영원’을 기록해야 하는 존재다. 이것이 안희연의 시인관이다. 그러한 시인의 시선 너머에 창조와 파괴가 반복된다. 창과 방패가 엇갈린다. 이렇게 ‘당분간 영원’의 무한 반복이 시간선상에서 전개된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불길이 잦아들지 않는 용광로’라 할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발견한 창조적인 메타포! 그 앞에 안희연의 트레이드마크를 붙여도 좋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 위에 생성과 사멸이 반복된다. 아인슈타인 이후 시간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이 다르고, 시인의 시간과 정상배의 시간이 다르다. 어느 시간도 영원한 것은 없고 ‘당분간 영원한’ 점들이 이어진다. 하나의 점이 잔해라면 또 하나의 점은 폭죽이다. 그 두 점은 단절되지 않고 연쇄되어 반복된다. 생성과 소멸이 시간선상에서 자유롭게 이어지므로 아이들은 폭죽처럼 태어나고 노인은 잔해를 남기고 사라진다. 어느 밤 꿈에 낯선 이가 머리를 들이밀기도 한다. ‘불길이 잦아들지 않는 용광로’ 안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낯선 이가 남긴 한 마디 말은 몽중선인의 전언으로는 너무 낯익어서 오히려 생경하다.

   “당신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라니. 이 질문은 도덕적 담론 같기도 하고, 선과 악으로 세상을 구분하는 관습 종교의 상투어 같기도 하다. 창과 방패가 각자 자기 기량을 뽐내는 데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저마다 자기가 진정하다고 외치는 데 무슨 모순이 있겠는가? 자신의 진정성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바보 아닌가? “당신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의 답은 “세상 모든 사람이 잘못했습니다”이거나 “세상의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일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의 대답이다. 요컨대 이 질문은 세상의 모순을 드러낼 수 있는 질문의 날카로움을 보여주지 못한다.

   시인은 꿈에서 깨어 길을 걸을 때 목줄에 묶인 사람을 끌고 가는 개를 보았다고 했다. 「혹성탈출」이란 영화가 연속으로 제작되어 목줄에 묶인 사람을 끌고 가는 잔나비를 아주 많이 보았다. 잔나비가 개로 대치된다고 해서 새로울 것은 없다. 시인은 좀 더 깊은 꿈을 꾸고 새로운 형상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창과 방패가 날카롭게 부딪치는 극점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을 길러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70여 년 전인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일 년 남짓의 기간 동안 김영랑은 현실 저항에 해당하는 작품을 연속적으로 발표했다. 우리가 순수 서정의 가녀린 시인이라고 알고 있는 그 김영랑이 고주망태가 되어 한길에 누워 세상에 대한 울분을 토로했다. 세상이 개판인데 “어린 자식 앉혀 놓고 똑바른 말 못할 테냐”(「한길에 누워」)고 호통을 쳤다. “봄 되면 우렁찬 소리 여기저기” “되살아날 듯싶다만 내 보금자리는 하냥 서린 행복이 가득 차 있다”(「우감(偶感)」)고 울분을 삼켰다.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하여 우렁찬 소리가 여기저기서 되살아날 것 같지만, 세상은 여전히 암울하고 내 보금자리는 늘 ‘서러운 행복’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서럽기는 하지만 서러움을 느끼는 그 순간은 정신이 아직 살아 있는 상태니 행복이라고 했다. 정신의 자유는 잃었지만 간과 쓸개는 아직 보존하고 있는 상태니 서러운 행복이라고 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과 전쟁을 벌여 중국 본토의 반 이상을 먹고 동남아시아 공략을 준비하던 1940년 6월에 이 시가 발표되었다. 자신의 몸과 세상이 창과 방패로 부딪치는 극한적 위기의식 속에 이런 시가 탄생했다. 시인의 시선과 사유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는 사례다. (*)

 

 

 

                       —《발견》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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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원/ 1955년 서울 출생. 1986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평론집『미당과의 만남』『갈매나무의 시인 백석』『시 속으로』『세속의 성전』『감성의 파문』『폐허 속의 축복』등.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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