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서상만 시인의 시
자서自序 3
서상만
내 죽어서 분월포에 가야 하리
천천히 걸어서 대동배로 가든지
호미곶 등대불빛 따라가다
보리 능선 질러가는
구만리 밖, 내 사라질 빈자리
거기 찰박찰박
바닷물도 달빛을 끌어당겨
비백으로 출렁이는 곳
다 떠나고 아무도 그곳에 살지 않아도
나 거기 호롱불 켜고 덧없이 앉아
저녁 오면 치자빛 노을을 품고
밤하늘 분월을 번갈아 안아보는
내 꼭 돌아가 그곳에
늙은 그림자 비탈에 뉘일 터
채곽기採藿期*
여기서 저기 안 보이는 데까지
대물림해 온 긴 연안이 한때
아버지 삶의 터전이었을 때가 있었다
해마다 차가운 봄 바다에
까만 미역 잎이
무성한 파도를 이겨낸 개선장군처럼
깃발을 흔들고
달포 내내
쇠스랑으로 베어 올린 물미역을
자갈밭에 펴 말리며
바람과 볕에 타들어간
아버지 손등은 하얀 간꽃이 피었다
춘궁 앞엔 선비도 없었다
마른미역을 방 가득 쌓아두고
천하 제일 부자처럼 잠자던 아버지
코고는 소리에 먹물도 다 말랐다
* 미역을 채취하는 시기
빈 배
폐선 한 척
잔파도가 깨워도
뭍으로는 더 밀리지 않겠다고
늙은 노을을 붙잡고 주저앉았네
가끔 저녁 바다가 적막해
물수제비를 날려보지만
조는 듯 죽은 듯
저 배는 미동도 없네
조타실 난간 위에 사뿐 내려앉은
저 갈매기 한 마리
이 배의 주인인 듯, 배의 정수리에
비린 주둥이를 닦고 있네
폐선에겐
갯바람에 허리 굽은 적막이 제격
흘리고 간
물새 울음 쪼가리가 제격
갈매기 입술보다 더 붉은 노을이
날마다 찾아주지 않았다면
저 폐선,
오래전에 숨을 놓았을 것이네
—시집『분월포芬月浦』(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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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만 / 경북 포항 호미곶 출생. 성균관대 영문학과 수학, 고려대 경영대학원 수료. 1982년 《한국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시간의 사금파리』『그림자를 태우다』『모래알로 울다』『적소謫所』『백동나비』『분월포』, 동시집『꼬마 파도의 외출』『너, 정말 까불래?』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