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서상만 시인의 시

율카라마 2015. 9. 15. 21:17

자서自序 3

 

  서상만

 

 

 

내 죽어서 분월포에 가야 하리

천천히 걸어서 대동배로 가든지

호미곶 등대불빛 따라가다

보리 능선 질러가는

구만리 밖, 내 사라질 빈자리

거기 찰박찰박

바닷물도 달빛을 끌어당겨

비백으로 출렁이는 곳

다 떠나고 아무도 그곳에 살지 않아도

나 거기 호롱불 켜고 덧없이 앉아

저녁 오면 치자빛 노을을 품고

밤하늘 분월을 번갈아 안아보는

내 꼭 돌아가 그곳에

늙은 그림자 비탈에 뉘일 터

 

 

채곽기採藿期*

 

 

여기서 저기 안 보이는 데까지

대물림해 온 긴 연안이 한때

아버지 삶의 터전이었을 때가 있었다

 

해마다 차가운 봄 바다에

까만 미역 잎이

무성한 파도를 이겨낸 개선장군처럼

깃발을 흔들고

 

달포 내내

쇠스랑으로 베어 올린 물미역을

자갈밭에 펴 말리며

바람과 볕에 타들어간

아버지 손등은 하얀 간꽃이 피었다

 

춘궁 앞엔 선비도 없었다

 

마른미역을 방 가득 쌓아두고

천하 제일 부자처럼 잠자던 아버지

코고는 소리에 먹물도 다 말랐다

 

 

  * 미역을 채취하는 시기

 

 

빈 배

 

 

폐선 한 척

잔파도가 깨워도

뭍으로는 더 밀리지 않겠다고

늙은 노을을 붙잡고 주저앉았네

 

가끔 저녁 바다가 적막해

물수제비를 날려보지만

조는 듯 죽은 듯

저 배는 미동도 없네

 

조타실 난간 위에 사뿐 내려앉은

저 갈매기 한 마리

이 배의 주인인 듯, 배의 정수리에

비린 주둥이를 닦고 있네

 

폐선에겐

갯바람에 허리 굽은 적막이 제격

흘리고 간

물새 울음 쪼가리가 제격

 

갈매기 입술보다 더 붉은 노을이

날마다 찾아주지 않았다면

저 폐선,

오래전에 숨을 놓았을 것이네

 

 

                        —시집『분월포芬月浦』(2015)에서

--------------

서상만 / 경북 포항 호미곶 출생. 성균관대 영문학과 수학, 고려대 경영대학원 수료. 1982년 《한국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시간의 사금파리』『그림자를 태우다』『모래알로 울다』『적소謫所』『백동나비』『분월포』, 동시집『꼬마 파도의 외출』『너, 정말 까불래?』등.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