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시 월평] 극미량의 존재와 시 / 신진숙
[시 월평] 극미량의 존재와 시 / 신진숙 | ||
김중일 · 위선환 · 임승유 · 유희경의 시![]() | ||
신진숙 |
어떤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이어서, 재현이 불가능하다. 분명 존재하지만 특정한 실체가 아니므로 계산될 수 없다. 명확한 이름이나 질량도 없다. 그 점에서 그것은 부재하는 것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부재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비존재의 존재에 가깝다. 명명될 수 없는 것과 감각되는 것 사이의 어떤 모호한 상태. 미분적(微分的)인 존재들. 말하자면 극미량의 존재이다. 분명한 실존(병명)을 획득하기 전까지는 그것의 존재(질병) 자체를 납득할 수 없는 상태 말이다.
시인은 바로 이 극미량의 삶을 증상으로 감지한다. 증상은 극히 미미해서 실체를 부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때로 그 ‘무엇’을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기실 세계가 변형되지 않고 언제나 영원불변하는 것이라면, 극미량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언제나 변화한다. 하나의 세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동해가고 있다. 끊임없는 흐름과 이행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시인이 감지하는 이 증상이란 결국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삶의 토대를 의심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실제로 증상들은, 이해할 수는 없으나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의 변화를 암시하곤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증상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증상 자체를 다시 주목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시인들은 감각할 수는 있으나 실체가 없는 기이한 존재에 대해 천착한다. 역설적인 것은 언어체계로 포획할 수 없는 어떤 상태를 시인들은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그것’을 호명해야 하는 모순된 행위를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은 시 쓰기의 진정성과 연관된다. 시인 자신이 합리적인 언어체계로부터 누락된 낯선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적 존재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논법 속에 포섭되지 못한 잔여 상태로서, 모호하고 기이한 실존을 부여받은 존재들이 아닌가. 그 점에서 그들 자신이야말로 이 세계의 증상이자 계산될 수 없는 극미량의 존재들인 것이다.
김중일 시인의 〈다녀가다〉는 이와 같은 비존재의 존재로서의 극미량의 실존을 이야기한다. 정확한 이름은 없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물과 기호들을 우회해야만 한다. 어떤 것의 존재함이 암시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증상이 존재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은 지연된다.
차갑다 옆자리가. 아스파라거스 새파란. 누가 다녀갔다 재채기처럼 순식간에 분명히. 왔다 일 년을 걷고 다시 그 절반을 걸어서. 앉았다 갔다 창문을 내다본 사이. 이제 같이 살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죽은 지 일 년 반 동안 묻고 물어 걷고 걸어. 몰래 다녀갔다 죽기 살기로 찾아와 놓고. 한번 떼써 보지도 않고, 이제 같이 살지 않겠냐며. 높이 저 높이 던져 올린 토마토가 떨어져 막 정오를 무심히 지나치는 시곗바늘에 꽂혔다, 자전거에 앉아 고개 드니.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온다, 방금 전 일어난 안장의 체온이 천천히 식어가는 속도로 분침에 말끔히 잘린 하루해의 절반이. 그 사이 다녀갔다 누가 감쪽같이. 빈 밥상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주인 없는 생일날. 밥상 아래로 갔다 식은 미역국이 얼음처럼 얼도록. 내 무릎에 앉았던 아주 작은 아이가 아이가 타고 온 공기가. 땅 위에서 죽듯 새가 결국. 구름 속에 묻히듯 나무가 마지막에. 그냥 가지 않았다, 스쳐가듯 다녀갔다. 나보다 조금 먼저 갔다 작년에. 일교차 사이로 다녀갔다, 고인의 방 안팎의 밤낮 사이로. 무심결에 고개 돌리다가 마주쳤다 아스파라거스 새파란 행운목 한 토막에 걸터앉은 꽃. 번번이 몰래 다녀가려던 꽃을 만났다 꽃의 실수로. 기왕 만난 거 꽃피듯 잠깐씩 영원히 같이 살지 않겠냐는 물음, 내 기억 속에서만 헤아릴 수 없던 꽃이 눈앞에서. 마음만이 몇십 년쯤 앞선다, 여기 없는 몸보다.
— 김중일 〈다녀가다〉 《유심》 9월호
명명할 수도 재현할 수도 없으나 감각할 수 있는 대상은 과연 실재하는가. 분명한 인과로부터 비켜나 있으며 일상적인 언어체계로도 해독할 수 없는 존재란 가능한가. 그것은 애초에 재현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는가. 이에 김중일 시인은 실체가 없는 어떤 존재를 그것의 파동 혹은 잔여물로 파악해간다. 하나의 관념에서 출발해 존재를 인식해가는 일상적인 방법과는 상반된 길을 택한다. 그것은 몸의 불투명한 감각들과 미세한 변화들을 통해 존재의 의미에 도달하려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인식론적 선택이 명확한 실체에 안착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것은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다. 극미량의 존재성만을 지닌 그것은 미세한 진동으로만 이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
가령 그것은 이 세상에 몰래 다녀간다. 재채기처럼 순식간에 스쳐가듯. 미세한 공기의 떨림과 이동이 없었다면 시인 또한 그것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무심결에 고개 돌리다가 그것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누구나 이야기하듯 세상 만물은 유전(流轉)한다. 있다가 없어지고 또 망각되기를 반복한다. 시간은 모든 존재했던 것의 흔적마저 지워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의 압력이 어떤 삶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존재 자체를 구분하기 어려운 무명(無名)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아스파라거스나 행운목의 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이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며 시간의 막을 찢고 출현한다. 그 순간 그것은 증상을 넘어 사건이 된다. 그것이 출현할 때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고 틈이 벌어진다. 그리고 작은 틈새를 통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귀환하기 시작한다.
시인은 불가능한 현존과 만나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시간이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김중일 시인은 그것을 “꽃”이라 부른다. 아주 짧은 순간 피었다 지는 꽃의 시간이 한평생 살아가는 것보다 영원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새들이 집중하는 하늘을,
햇살의 경사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오른 새를, 빛의 꼭대기에 이르러서 빛무리 속으로 날아오른
새의 높이를, 높은 구름의 아래를 지나는
잦은 날갯짓을,
날갯짓에 구름이 스치는 디테일을,
묻다
땅거미가 그을던 그해의 늦은 가을을, 치켜세운 손가락에 끄름이 묻던 무렵의
기후를, 내가 바라보던 저 사람의
어둔 등허리를, 저 사람이 바라보던 그 사람의
검정 묻은 뒷모습을, 그 사람이 바라보던 지평 너머를, 거기로부터도 까맣게 먼
오늘을,
묻다
거기에 있지만 이름을 모르는 여럿을, 이름을 불렀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한 사람을, 내가 나를 만지는
나를,
묻다
뒤통수를 비춘 빛이 두개골에 스미어서 환한, 앞이마가 밝은 잠시간을,
묻다
저무는 들녘에 내려앉는 새떼를, 저물녘의 아래에 고인 흐린 물빛을,
튀어 오른 물고기의
뱃비늘이 번뜩이는 짧은 묘사를, 그때의 손등을 때리는 물방울의
단단한 무게를,
— 위선환 〈묻다〉 《유심》 9월호
위선환 시인의 〈묻다〉에서 “묻다”는 무슨 의미인가. 만일 ‘묻다’가 어떤 것을 땅속에 묻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무엇의 종결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생명을 다한 것들을 땅속에 묻어주는 의식. 가령 이 시에서는 새들이 집중하는 하늘, 새의 날갯짓, 또는 날갯짓에 구름이 스치는 디테일 등을 묻는다. 또 이름을 불렀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한 사람을 묻는다. 강물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뱃비늘이 번뜩이는 짧은 묘사와 함께 생에 대한 애도마저도 함께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것들은 묻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을 달리하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생명을 다한다는 것은 생의 가능성을 다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날갯짓은 새의 본질이다. 디테일들이 사라진다면 본질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실해가고 있는 것은 존재(새) 자체가 아니라 존재들 내부의 본질적 힘, 즉 (새의) 생명-되기이다.
그런데 그것이 비단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일까. 인간의 인간-되기 또한 언젠가는 존재할 수 없는 삶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문명의 바퀴가 멈추지 않는 한, 언젠가 생명 전체가 종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생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왜 존재의 근본이 되는지. 시인이 말하는 ‘(땅에) 묻다’가 ‘(물음을) 묻다’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울타리를 지날 때 나도 모르게 쥐었던 손을 놓았다 나팔꽃의 형태를 따라 한 것이다
오므렸다고 폈다가
안에 든 것이 뭔지 모르면서 그랬다
살아 있다면
뛰어다녔을 것이고 뛰어다니면 어지럽고 뛰어다니면 시끄러우니까 쉬는 시간인가 보다 그러면서 붓 같은 걸로 살살 털어주면서 붓을 갖다 놓으면서 문을 닫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창백한 도감이었는지 모른다
물가에 앉아서 생각에 빠져서 종이에 싸갖고 온 것을 풀어보다가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머니에 넣어오다니 내일은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천천히 일어날 때
쏟아지는 빛의 한가운데였다
물감이 마르는 동안이라고 했는데
아직 거기 남아서 꿈틀대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뭔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 임승유 〈근무〉 《시로 여는 세상》 가을호
보이지 않는 것의 실재에 관한 인식은 임승유 시인의 〈근무〉라는 시에서도 발견된다. 시적 주체는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것은 실체가 없기에 명확하게 호명하기 어렵다. 뭔가를 쥐고 있었는데, 두 손을 펴 보면 텅 빈 허공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허공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자. 나팔꽃이 피었다 사라졌을 때 허공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허공은 나팔꽃의 현존을 기억하거나 증언해줄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존재뿐만 아니라 부재까지도 기억해야 한다. 그 때문에 임승유 시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감각하려 노력한다. 그녀에게 그 일은 시인의 권리이자 시인의 책무인 셈이다. 이를테면 시인은 나팔꽃의 형태를 따라 손을 쥐었다 편다. 그것은 꽃의 사라짐이 완전한 부재, 즉 허공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례와 같은 행동이다. 존재하지 않는 나팔꽃의 형식으로 손의 모양을 오므려 보는 동안 시는 더 많은 생 혹은 죽음을 기억할 것이고 그것은 시가 더 많은 생명들과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이 사라진 꽃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시는 더 이상 시가 될 수 없다. 시인은 꽃의 모양뿐만 아니라 꽃의 존재-하기 자체를 기억해야 한다. 만일 보이는 꽃과 더불어 꽃의 형식 속에 내재한 보이지 않는 꽃의 삶 전체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가 차갑게 형해가 된 꽃의 도감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꽃을 잃어버린 꽃, 시를 잃어버린 시이다.
구름이 해를 가리고 마침내 비가 내리는, 이야기라기엔 비좁고 사연이라기엔 주어가 없이 가로지른 목책 아래 울음을 씻느라 뒤도 돌아보지 못하는 개울은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잠시 사라진다 廢屋의 사람들은 그 물로 밥을 지어 일가를 이룬다 이따금 휩쓸려 떠내려간 이도 있을 테지만, 지나간 일은 탄식도 비명도 내놓지 않는다 어떤 날은 그늘도 없이 일사에 시달린다 根幹이 짚어주는 이마가 차가워 칭얼대는 어린아이와 마당을 비운 가족들과 짖지 않는 개처럼 왕래하지 않는 저녁과 밤 나는 아무것도 건너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망설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니 어디쯤에서 어딘가로 곧 도착할 것이다 이곳이 아닌, 좀 더 숲에 가까운 창 쪽으로 몸을 붙인 옆자리 여자는 잠을 깨려 들지 않는다 덮은 것도 없이
— 유희경 〈도착(倒着)〉 《현대시》 9월호
앞의 시들이 어떤 대상을 향한 시선이었다면, 유희경의 시 〈도착(倒着)〉은 시인 자신을 향한다. 그의 존재 자체가 실체를 지니지 않은 극미량의 실존으로 표현된다. 이름을 가졌지만 그는 좀처럼 호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라기엔 비좁고 사연이라기엔 주어가 없”는 상태와 비슷하다. 그의 삶은 누군가 실수로 거꾸로 입은 옷(倒着)처럼 자세히 보기 전에는 잘 구분이 가지 않는 삶이다. “폐옥(廢屋)의 사람들”처럼, 시인은 마치 곧 사라져갈 존재들의 표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기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이다. 이들은 항시 자본의 논리 바깥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인이라는 종족의 종말이 이미 예정된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 애잔하고 희미한 존재의 빛 가운데에서 무언가 더 따뜻한 것을 발견한다.
물론 그것은 인간적인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근심을 덮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휴머니즘과 무관하다. 그것은 더 애틋한 쪽이다. 즉, 머리보다 몸이 먼저 사람의 온기를 찾는 본능적이고 아릿한 행위이다. 따뜻함을 찾는 행위는 추구도 지향도 아닌 단지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숲에 가까운 창 쪽으로 몸을 붙”이듯, 우리는 더 따뜻한 것을 향해 몸을 기울인다. 물론 이 적잖이 안쓰러운 애틋함이란 아무런 힘도 없다. 그것은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도 더 나은 미래를 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은 미세하지만 삶이 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가령 버려진 집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일가”가 생기고 돌보아야 할 “아이”가 태어난다.
근간(根幹)이 흔들릴 정도로 위태로운 삶이지만, 망설임과 주저함으로 가득 찬 희미한 이 존재들을 통해 생의 의미는 진정으로 오롯하다. 모든 것이 휩쓸려 사라질지도 모르는 삶에서 그래도 여전히 탄식도 비명도 없이 “일사”를 견디고 삶을 다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어디쯤에서 어딘가로 곧 도착할 것”을 믿으며 살아가야 하리라.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차가운 어깨를 걱정하며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탄 기차가 어딘가에 도착(到着)할 때까지 잘못 입은 옷이지만 벗지 않고, 실존의 의미를 다할 때까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염려하지 않는 것,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에만 사로잡힌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극미량의 삶에 대한 시적 관철이 시적 윤리의 근간이 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이처럼 극미량의 존재에 대한 시인의 사유는 보다 근본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감각한 것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보다 철저하게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물음을 던져야 한다. 물음이 사라진 존재는 이미 삶을 다한 존재이다. 생명을 상실한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이다. 같은 이유에서 질문을 추방한 사회 역시 죽은 사회이다. 어떤 의미에서 물음은 생명의 본질이다. 기실 물음에 대한 촉구야말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의 존재가 지닌 진정한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음의 진정성을 통해 시가 암울한 우리의 세계를 어떻게 변형하는지를 지켜볼 일이다. (*)
—《유심》201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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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숙/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평론집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