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人畵

[스크랩] 텅빈 충만’ 남정 최정균(南丁 崔正均, 1924~2001) 서화 유작전

율카라마 2008. 11. 6. 16:20
 우리 시대 진정한 문인화가라 할 수 있는 분을 들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문인화란 우리만의 전통 서예에서 파생된 장르로 그를 대표할 만한 여러 작가가 있겠으나 난 오래전부터 남정 최정균 선생의 작품을 눈여겨 왔었다.


  국전시대엔 사군자(四君子) 부분이라 하여 매란국죽(梅蘭菊竹) 중심의 그림으로 동양화, 한국화에 편입되어 글씨보다 그림을 주 활동영역으로 하였던 분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서인지 서예가인지 화가인지 뚜렷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하기야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의 동양예술론에서는 뚜렷한 장르의 분류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병매도1981년 작 一枝何意分南北... 작자미상의 시)

  그러나 서예를 주로 하면서 여기(餘技)로 그림을 하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조선시대에야 그런 서화 겸통의 활동을 한 문인들이 많았지만 근대 이후엔 많지 않은 듯하다. 그 만큼 이 분야에 재능을 발휘한다는 게 쉽지는 않으리라. 그래서 두 분야에 큰 성취를 이룬 분이라면 강암 송성용 선생과 남정 최정균 선생 등 손 꼽을 만큼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젊은 서예가들이 문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이 분야의 발전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연화도 : 1981년 작 북송의 학자 주돈이(1017~1073)가 지은 애련설의 구절 초록)

  지난 주 우연히 서울서예박물관을 들렀을 때 최정균 선생의 유작 기증작품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어제(9월 15일) 정식으로 오픈을 했다는 소식에 비가 흩뿌리는 오늘 오후에 다시 찾았다. 원래 김영기 서화전이 있다하여 갔으나 무림 김영기(霧林 金榮基) 선생이 아니라 겸산 김영기(謙山 金榮基) 선생으로 무림 김영기 선생과 동명이인의 서화가였다. 김영기 선생도 서화를 겸했지만 작품은 그림이 주였으며 중국에서 수학 후 중국화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탁묵(濁墨)이 대종을 이루어 신선한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공즉수 겸수익(恭則壽 謙受益) 공손하면 장수를 누리고, 겸손라면 이익을 얻는다 書經 虞書 大禹謨) 

  서예박물관 소장품 전시장은 연구실과 사무실 쪽의 열린 공간으로 최정균 선생의 정선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내게는 이미 낯익은 작품들이었다. 아마 주요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이거나 도록을 통해 눈에 익은 작품이리라.


  운치있는 병매도(甁梅圖)를 전시회 포스터 사진으로 삼아선지 전시장 내외엔 매화향이 가득한 느낌이다. 9월 2일부터 12월 2일까지 기증유물특별전시회 세 번째로 배수임 여사 기증 “남정 최정균 유작서화전”을 <텅빈충만>이란 주제어로 하였다.

(紅梅圖 1979년작 梅花如高人 매화는 고아한 사람과 같아... 남송의시인 육우 시)

  안내 팜프렛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면


  지금까지 예술의 전당은 2002년 3월 서예박물관 등록 이래 2002년 ‘산기 이겸로 기증 한중일 서예 고문헌 자료 290건 491점’과 2004년 ‘오일육 기증, 역매 오경석, 위창 오세창 컬렉션 61건 486점’을 전시하여 박물관으로서 핵심유물을 확보한바 있었다.


  이번 전시도 2006년 12월 남정 최정균 선생 미망인 배수임 여사가 선생의 대표작 39건 43점을 일괄 기증한 것을 계기로 마련하였다 한다. 남정 선생의 생전 뜻이 ‘작품은 학생들에게 교육 자료로 삼을 수 있고, 대중들에게 예술 감상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란 생각을 실천한 것이라 한다.


  한 때 원광대에서 함께 서예과 교수로 있으면서 초기 대학서예교육 정립에 힘썼던 근원 김양동 계명대 교수의 남정 최정균론에 의하면 남정 선생의 일생(1924~2001)을 돌아본 후 그림과 글씨를 겸수(兼修)한 우리 시대 최고의 문인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서화 고전에 정통하면서서 창신(創新)의 세계를 추구하였던 인물로 평가된다고 칭송하였다. 김 교수는 남정의 예술세계를 4기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蓮花圖 1990년도 작 : 애련설 내용 요약) 

  제1기(1960년대, 40대 전후) 국전 출품시기로 ‘스승 소전체’의 영향이 강한 학서기(學書期)로 본인은 부끄러운 졸작의 시기로 겸허해 했지만 유려한 필치와 창달한 서품의 청수한 맛을 주던 시기로 평했다.


  제2기(1970년대, 50대 전후) ‘소전풍’의 탈각으로 개성을 위한 모색과 창작영역의 확충시기로 1975년 익산시를 떠나 서울 부암동의 난석산방시대로 자기 세계를 은밀히 예비하던 시기로 청경한 필획이 그림 속에 들어오고 다양한 용묵법과 운필법까지 들어오게 한 모색시기로 보았다.

(연중한묵 계심난석(緣重翰墨 契深蘭石) 1987 한묵의 인연이 소중하고 난석의 계합이 깊어야 함을 주제로한 대련)

  제3기(1980년대, 60대 전후) 서화가 하나 되는 독자적인 남정 예술의 완성기로 풍부한 경험과 사고의 깊이가 무르익은 60대 대가의 위치를 확고히 한 시기로 보았다. 서품의 조형적 구상이나 청아하며 속기가 쏙 빠진 문인화는 선생의 성품을 투영시킨 시기로 보았다. 이 시기에 원광대학교 서예과를 창설한 때이다.


  제4기(1990년대, 70대전후) 교수직을 퇴임하고 작품 기증을 통한 사회 환원과 정리시기로 저서 출간과 서예술 논문집의 간행 및 봉정이 있던 시기였다.

(太上隱者 지은 答人 1968 : 偶來松樹下 高枕石頭眠 山中無曆日 寒盡不知年)...)

  선생이 한국 서단에 남긴 큰 업적은 작품도 뛰어 났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학 서예과를 창설하여 한국현대서단의 발전을 견인하였던 일이다. 그간 사설인 서실과 공모전을 통해 교육되어지던 서예를 1989년 원광대학교에 최초로 서예학과를 설치하여 서예를 제도교육으로 인도한 인물이 바로 남정 선생인 것이다.


  이번 전시작품은 여러 화목 중에 연꽃과 매화에 정통하였고, 파격이나 실험을 배제한 정통적인 구도하에 담담한 묵법과 골(骨)이 살아있는 필법을 구사하였다. 이렇게 제작된 매화와 연꽃은 바로 꼿꼿하고 깨끗한 삶으로 일관한 남정 선생 자신을 나타낸 것이란 칭송이다.

(달마도 1978 : 素文의 그림에 題를 씀)

  글씨 또한 전서의 필획으로 행초서를 구사하는 소전 손재형에 닿아있지만 60대에 접어들면서 자기만의 필법과 공간으로 서화가 하나 되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평하였다.


  80년대 초 본인이 월정서실에 적을 두었을 때 가끔 남정 선생님께서 서실에 들러 월정 선생과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먼발치서 보았다. 선생을 본 인상은 근원 선생이 갈파한것처럼 굳게 다문 얇은 입술, 날카로운 콧날, 예리해 보이는 안광(眼光) 등 카랑카랑한 음성처럼 선생의 작품에서도 한 점 티끌이 없는 완벽성을 추구했다고 한다.

(묵죽도 1987 : 窓前栽有蕭蕭竹 창 앞에 쓸쓸한 대나무를 심었더니..)

  이런 가품들이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 오랜 동안 전시되고 있으니 많은 서화애호가들이 안복(眼福)을 누리기를 기원하며 도록과 포스터를 구입한 후 발길을 돌렸다.(완)

(紅梅圖 1988년 작 : 梅經寒苦發淸香 매화는 추위를 겪고나서 맑은 향기를 피우네)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카프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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