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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추상 |
고암 이응로 <군>의 감상문
<군>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을 간략한 형태로 변형시켜 큰 화면속에 빽빽히 채운 그림이다. 좀처럼 선택하기 힘든 파격적이고 놀라운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그 그림에서 그가 가진 조형적 감각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를 실감할 수 있다. 조그맣고 비슷한 형태의 소재들을 배치하는데 약간의 변형만을 쓰고도 이렇게 아름다운 율동감과 조형미를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보통의 경우 작고 단순한 형태만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건 잘 맞추어진 구도라 하더라도 시각의 분산을 막아내기 힘들고, 산만한 느낌을 하나로 묶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내게 그 작품은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적당히 배치된 여백과 한번에 그렸음직한 조그마한 인물에서 보이는 시원한 운동감이 군상이되면서 아름다운 율동감으로 재탄생되는 것 같다. 많은 인물을 그려 넣었지만 모두가 취한 포즈가 약간씩 다를 뿐 아니라, 서로의 움직임을 엮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어서 군상전체가 주는 율동감은 전체 인물들이 춤을 추고 있다는 상상을 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또한 화면속 인물 사이에서 흐르는 은유한 율동감은 마치 군중의 물결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는 세부적인 설명과 묘사를 통해 상황이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중에게 인지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전하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나타내지 않고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표현으로 그 해석의 권리를 관중에게 넘긴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보는 사람에 따라 춤을 추는 군중일 수도, 새까맣게 몰려든 민중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도중 도중 적혀있는 그의 소개에 관한 글에서 그가 독일에서 살았지만 진정한 한국인으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방금 본 그의 작품 <군>이 바로 5.18광주 민주화 운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다시 고개를 들어 그 작품을 보았을 때 형용하기 힘든 전율이 이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도 않은 그 그림은 아주 잠깐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몇시간 짜리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본것처럼 뭉클한 감동이 이는 것이다. 종이의 표면에 맺힌 먹물과 붓자국, 그 조형요소가 주는 미적 체험에서 벗어나 그의 정신세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겨우 종이 위에 엊혀진 자욱들 만으로 그를 평가하려 했던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나의 무지가 오히려 미안해질 정도이다. 그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 입국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내에서 보다 국외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민주화 정신이라던지 분단상황의 이데올로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몇 작품이 당시에는 충분히 한국정부에게 거부감을 주었을 거란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그래도 비교적 다행이라 생각되는 건 마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처럼 생각되던 그가 비록 사망 후 지만 그의 가치에 대하여 재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자추상>의 감상문
이 작품은 추상회화로서 동양의 상형문자가 보여주는 신비감을 잘 살린 문자 추상이다. 물론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화면전체가 보여주는 미감은 훌륭한 것이다. 서양의 예술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서예라는 장르를 서양식 회화의 방법과 절묘한 접목을 한 것처럼 보인다. 동양의 예술인 서예는 단순히 그것이 담고있는 문학적인 내용 뿐 아니라, 아름다운 미술적인 감각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그림에서부터 출발한 상형문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양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서예의 정신을 동양인으로서 잘 알고 있었던 그 였기 때문에 이렇게 훌륭하게 회화로 재구성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살펴 보면 그가 한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진정한 이유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단지 종이 위에 올려진 조형요소들이 아니라, 그 요소들 속에 깃들어 있는 그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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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굵고 억세고 날카롭고 모진 가시 면류관을 쓰고 나와야 한다'는 김수영의 글귀에 부합하는 화가를 생각한다면 가장 먼저 누가 떠오를 것인가?
한평생 절대적 빈곤과 자아 분열로 고통을 겪었던 빈센트 반 고흐와 에드바르트 뭉크 같은 화가들이 제일 먼저 뇌리를 스칠 것이다. 우리 나라 화가 중 생전에 불우했던 작가로는 이중섭과 박수근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미술가들은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고단한 삶이 중첩되었기에 그들의 아우라는 더욱 빛을 발한다. 그들은 평생을 궁핍과 편견 속에서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생을 접어야만 했다. 하지만 세상의 축복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그들의 삶이야말로 문화사에 길이 남을 예술 작품의 모태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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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응로의 군상(1987, 한지에 수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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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고암 이응로(1905∼1989) 역시 '비운의 화가'로 꼽힌다. 때마침 덕수궁미술관에서 고암을 기리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다시 고암을 생각한다- 고암 이응로 탄생 100주년 기념전>(11. 3∼2005. 2. 13 )은 뒤늦게나마 고암의 예술적 재능과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려는 전시다.
물론 고암은 고흐나 이중섭에 비해 작가로서의 삶은 순탄했는지도 모른다. 이응로는 최소한 그들처럼 물감 살 돈이 없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응로는 정치적 문제로 고국을 찾을 수 없었던 아픈 상처를 지녔다. 그러한 경험은 화가로서의 그의 삶을 더욱 혹독하게 단련시켜 주었다.
생전에 그는 동양화의 현대화를 모색하는, 자신만의 위치를 확고히 점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에 의해 버림받고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그 유명한 동백림 사건) 평생 숱한 오해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그의 대표작 150여점에서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추구해 온 본래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응로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해강(海岡) 김규진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한 후, 일본의 가와바다(川端) 화학교를 수료했다. 고암은 초기에는 산수화를 주로 그렸는데 이때부터 이미 자유인으로서의 기질이 다분했다. 30년대 대나무나 매화 그림 등에서는 분출하는 듯한 먹의 번짐이나 붓질을 보이는데, 동양의 재료로 서구의 표현주의적인 풍모를 나타내는 듯하다.
동시대의 동양화가들이 적당히 정돈되고 판에 박힌 듯한 준법을 선보이는 반면 이응로는 대담한 선과 강렬한 농담으로 기운 생동하는 필치로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낸다. 스케일이 큰 금강산 풍경과 풍속도 같은 '장날', '3·1운동' 등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자유인적 기질과 함께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서민들에 대한 애정이 배여 나온다.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 동양미술연구소를 개설하면서부터 화가로서의 고암의 인생은 새로운 길에 접어든다. 그러나 1967년 북에 두고 온 아들을 보겠다며 북한 땅을 밟은 것이 빌미가 되어 '동백림 사건'에 얽혀 옥살이를 하게 된다. 하지만 감옥에서의 생활도 그의 자유로운 예술혼을 가둘 수는 없었다.
그는 좁은 공간에서도 밥풀과 한지 등으로 조형물을 만들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풀어 놓았다. 80년대 광주항쟁 뒤 본격적으로 등장한 인물 군상과 반추상 작업도 이 시절 감옥 생활이 아니고서는 쉽게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2년 반 동안의 옥살이 후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요양한 뒤 프랑스로 떠났지만 다시는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역사상 자신이 만든 작품으로 인해 박해를 받은 화가들의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나치 시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이 그랬고, 우리 나라에서도 80년대 민중미술 진영 화가들이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애초에 비정치적 성향의 그림만을 그려온 이응로가 부성의 발로로 인해 금단의 땅을 밟은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이 땅에서 '빨갱이'라는 굴레만큼이나 인간을 평생 고립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형벌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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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을 변형한 문자 추상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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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몸은 타국에 가 있었지만 고암은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지필묵을 작품의 재료로 삼았다. 그는 글씨, 특히 한자를 해체하거나 변형해 독특한 결과를 자아냈다. 이는 '문자 추상화'로 이어져 나중에는 한글의 자획을 해체하여 작업을 하는 등 실험을 펼칠 수 있었다.
결국 1989년 그에 대한 혐의가 풀렸고 이응로는 고국에서 대대적인 전시회를 가지게 됐다. 그러나 평생 맺힌 한이 한번에 풀린 탓일까. 고암은 귀국을 불과 며칠 앞두고 85세의 나이로 생을 접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비록 그는 가고 없지만 5·18광주 민주화 운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그의 작품 <군상> 시리즈에서 필자는 이응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작품을 처음 직접 대했을 때의 형용하기 힘든 전율과 함께 뭉클한 감동이 밀려들어옴을 느꼈다.
이젠 기록영 화에서만 접할 수 있는 4·19의 함성이, 5·18 광주에서의 하나됨이, 가깝게는 6월 항쟁의 열기가 아련한 기억으로 다가와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군상 속에 함께 어우러져 있는 이응로의 존재도 느껴졌다. |
[해외견문록]머나먼 이국땅에 심은 동양의 숨결 |
파리의 고암 이응로 고택을 다녀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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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로 작, '수원성 화홍문' | 작년 독일 하이델베르그 옆에 있는 슈파이어 행정대학원장의 초청으로 그 대학원에 Gastforscher로 있을 때 파리의 고암선생님의 아내인 박인경여사에게 안부 인사를 드렸더니 언제 독일에 와 있느냐고 반기면서 사간을 내어 한번 파리에 다녀가라는 말씀에 많은 설레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얼마만인가? 너무나 가고 싶었고 고암선생님이 이미 고인이 됐지만 언젠가는 가봐야지하는 생각은 오랜 희망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존경하는 분들은 많지만 가깝게 인사드리고 싶었던 두분이 있었다. 한분은 일석(一石) 이희승 선생님과 고암(顧菴) 이응로 선생님이시다. 그래도 일석선생님은 1년에 한번씩 세배를 다녀오기라도 했지만 고암선생님은 뵐 기회가 없이 돌아가셔서 파리의 고택에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두분 다 대단한 지조와 고집스런 삶을 살아온 분들이기에 더욱 그랬다. 안타깝게도 1989년 겨울과 늦가을에 돌아가셨다. 나에게 평소 많은 영향과 가르침을 받고 싶었던 기회가 영영 없어졌기에 나는 한때 정신적인 혼돈과 아쉬움에 보낸 1989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오랜 질곡의 삶을 끝내고, 비록 40불혹을 앞두고 새롭게 출발하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겨우 주어진 해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고암선생님의 체취와 숨결이 담긴 고택비록 전공이 다르고 미술과 예술세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1989년부터 고암선생님에 대에 계속 관심을 갖고 공부하려고 많은 자료를 모으고 전시회 등의 이벤트행사에 참여해온 나였기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금년 1월 26일 독일 만하임에서 파리행의 ICE 기차에 몸을 실었다. 4시간 반여만에 파리 동역에 도착한 시간은 9시가 조금넘었는데도 조카와 함께 직접 역에 까지 나와 주셔 너무나 고마웠다. 고암선생님의 체취와 숨결이 담긴 고택에 도착하니 우리를 반기는 것은 세 마리의 개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개가 무척이나 신기할만큼 시람의 마음을 음미하고 헤아려 행동하는가를 이 집에 3박4일 있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고 박인경여사께서 큰 위안이 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고암선생님의 고택은 지은지 백년이 넘은 집이었고 3층 건물로 2층에서 작업을 주로 하시었고 3층은 많은 작품과 자료집들이 있었다. 별채도 있고 1993년에 지은 고암서방도 있었지만 비탈길 언덕이 있어서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는 아담스런 정원이 있는 고택의 내음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오랜된 집이라 계속 수리중이어서 조금은 정리가 되지 않았으나 여기 저기 고암선생님의 자료와 그림들이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인 박인경여사가 80이 가까운 할머님인데도 손수 밥도 지어주시고 반찬도 만들어 주셔서 고마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매우 바쁘시고 건강이 조금 좋지 않으신 데도 제가 보고 싶은 곳과 알고 싶은 것에 데해서도 자세히 안내해주시고 설명해주신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오지 못했던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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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로 작, 문자추상 | 제일 먼저 풍광이 아름다운 파리의 동쪽에 있는 묘지 페르 라세즈 묘지를 전철과 지하철을 타고 찾아갔다. 파리에서 가장 큰 묘지여서 그런지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잠들어 있었다. 작곡가 로시니, 시인 위세, 쇼팽, 알퐁스 도데, 발자크, 오스카 와일드, 프루스트, 엘로이즈와 아벨라르, 짐 모리슨 등의 문학가 예술가들의 묘소들을 볼 수 있었다. 고암선생님의 묘소도 돌로 덮어져 있었고, 1904년 서울 1989년 파리의 글자가 불어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분향을 한 후 재배를 하고 문안 인사를 드리니 만감이 교차되면서 스크린처럼 지나간다. 아마 삶의 회한일게다. 특히 이데올로기 때문에 오고 싶었던 조국을 다시 밟지 못하고 간 그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다. 북한을 세 번씩이나 다녀온 나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1967년 구속 기소된 피고인만도 34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형사사건 동배림 사건의 무기징역 구형의 공판에서 "모두 같은 민족 아닙니까?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동백림에 간 것은 자식의 소식을 듣고, 거기서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보면 민족분단의 결과입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아들이 북에 살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으니 오라고 했을 때, 거절합니까, 만났다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그만둡니까." 호소하듯이 말씀했다는 글이 생각났다. 또 한분의 절절한 말씀이 스쳐지나갔다. 수덕사 앞에 있다가 재작년에 돌아가신 첫 번째 부인인 박귀희 할머님여사다. 몇 번 뵈옵고 인사드리거나 안부 전화드리면 이선생 가까운 시일내에 통일되는거지 하시며 여러번 되물었던 음성은 아직도 생생하다. 멀리 남편마저 멀리 보내고 자식을 보고 죽겠다며 생의 의지를 다지던 그분을 생각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녹음이 짖어 묘지라기보다 공원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평온한 예술가들의 안식처의 방문이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시청의 허가를 받아야 묻히는 곳으로 동양 사람들의 묘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고암 선생이 세운 파리 최초의 동양미술학교파리에는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지만 나는 파리 시립 동양박물관인 세르누쉬 미술관을 보았다. 고암께서 1964년부터 부설로 개설하여 파리 최초의 동양미술학교를 개설하여 유럽인들을 가르친 곳이기 때문이다. 고암은 미술학교를 통해서 배출한 문화생만도 3천여명에 이른다. 여기서 한가지 큰 아쉬움이 있다면 한국학생은 단한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박인경여사는 동백림사건 이후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고암의 근처에 오지 않는 외로운 생활이 제일 힘들었다고 회상해주시기도 했다. 그리하여 1958년 도불할 때 애기였지만, 최근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성공시키고, 고암의 뒤를 이을만큼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이융세 아들도 프랑스여자와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고 들려 주셨다. 이 학교는 세르누쉬 미술관의 관장인 엘리세프와, 평론가인 알버르, 라센느, 화가인 술라주, 자오우키, 아루퉁, 창타치엔 ,스카이, 미술사가 제이 켐 등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 후에 이 학교는 고암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고암은 생전에 동양에 대해 무지한 서양인들에게 동양을 인식시켜주고, 특히 한국에 훌륭한 예술이 있음을 깨우쳐주는 데 이 학교 설립의 목적이 있다고 말해왔다. 고암의 공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유럽에 동양예술과 한국예술의 방법과 정신을 알린 것이다. 고암이 타계한 후 미망인 박인경여사의 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세르누쉬 미술관에서 매달에 한번씩 강좌를 여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1년에 한번씩 제자들을 주축으로 동양화 실습 모임이 열리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독특한 눈길을 끈 파리의 교외의 보쉬르 센(Vaux-sur-Seine) 퐁트아즈 거리 (Route de Pontoise) 14번지 고암 고택안에 있는 고암서방이다. 한번은 전철에서 고암의 집을 밤에 오다가 내나이 또래의 파리시민 한분에게 고암집 옆에 있는 역을 물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역을 알려주며 그역 근처에 유명한 한국예술가가 살고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길래. 아마 고암서방이 있어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고암서방은 1993년 고암 이응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축된 것으로서 프랑스 최초의 전통 한국식 기와집이다. 이 한옥은 목수라고 자처하며 호를 정한 신영훈씨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한다. 가옥 전체를 한국에서 지은 상태에서 날라 현지에서 다시 조립한 것이라 한다. 25평 규모의 이 곳은 중앙의 큰 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작은 방이 배치되어 있고, 각 방의 문을 떼어 천장으로 올리면 전체가 하나의 큰 방이 되는 개방형 구조이다. 완성된 천장과 석가래 사이에 있는 마룻대에는 상량을 축하하는 글귀가 박인경여사의 친필로 새겨져 있다. 이 곳은 고암기념관의 성격으로 운영되며, 유럽 내에 한국문화 예술을 전파하는 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오고 싶었던 파리고택을 떠나며 남부도시 에비앙에서 약속이 있다며 29일 새벽녘에 같이 집을 나서는 박인경여사를 보며 대단히 존경스러웠다. 연세도 많으신데다가 본인도 이화여대 미술과 1회출신의 화가이면서도 고암의 충실한 반려자이자 동지였다. 서울 평창동 산자락 언덕에 이응노미술관 관장을 하면서 파리는 파리대로 서울은 서울대로 분주히 오가며 고암의 생전의 발자취와 자료를 포함한 작품들을 철저하게 정리하고 내년 탄생 100주년까지 준비하고 계시는 정성과 노력에 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 예술가는 이런분들에 의해 정리되고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되는구나 하는 사후관리 중요성을 실감나게 느끼었다. 행여 자신의 일과 영역에 방해가 될까봐 아들에게도 맡기지 않고 직접 챙기시며 뛰는 부지런함과 정리정돈의 철저함에 난 농담으로 고암께서 지하에서 아시면 아주 기뻐하실거라고 말씀드렸더니 내년까지만 하시고 못다한 당신의 작품활동을 재개하시겠다는 화답은 파리를 떠나는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화두였다. 마치면서 파리에서 본 이모저모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글을 쓰면서 모아둔 자료 중 1990년 5월 노령지에 실린 조병희 선생의 ??고암 이응로와 연고지 전주, 프랑스 동포신문 <오니바>1996년 12월 15일자/ 1999년 1월 15일자의 <프랑스 한인의 문화 예술활동에서의 발췌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고암의 예술세계에 대하여는 부족함이 많아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하고 1980년대에 머리 타국 땅에서 광주항쟁에 호응하여 제작한 인간시리즈 <통일무> 라고 이름붙인 작품들을 2001년 광주 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하고 기증했음을 밝혀둡니다.
고암 이응로 (顧菴 李應魯)와 연고지 전주(緣故地 全州)
오늘날 전주 사람으로 고암과 면식이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그가 전주에서 물러간 해는 1932년이었으니 아흔에 가까운 나이가 아니고서는 기억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는 1904년 1월 12일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여 1989년 1월 19일 85세의 고령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서거했다. 1958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그는 건강한 모습으로 작품생활을 계속하다가 갑작스러운 호흡장애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세상을 뜨리라고는 가족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또한 고암 자신도 건강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족들을 집에 돌려보내고 홀로 신음하다가 숨을 거뒀다.
1989년 1월 (1월1일~26일)에 열리게 되는 호암갤러리 전시회에 참석하는 한편 개원 예정인 고암미술관, 동양아카데미 신축건물 등 여러 가지행사가 거의 한꺼번에 풀리기 시작하는 계제에 20년만의 그리운 귀국을 눈앞에 두고 파리 페르 라제즈묘소에 객혼(客魂)으로 남게 되었다.
고암은 1926년 22세 때 19세인 박귀희(朴貴姬)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고암이 전주에 정착한 때는 1928년이었으니 24세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그는 19세 때인 1923년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 : 1868-1933)에 사사하여 같은 해 제3회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 四君子부에서 청죽(晴竹)으로 입선하고, 이듬해 전주시 중앙동 4가 25번지에서 개척사(開拓社)라는 점방을 열고 간판을 그리는 한편 건물을 도장(塗裝)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신사구락부라는 모임도 조직했었다. 보통정도의 체구를 벗어나지 못한 그는 늘 헌팅캡을 쓰고 무릅까지 닿는 스타킹을 신는 경쾌한 차림새로 작업을 하다가도 밖에 드나들었다.
당시 그는 틈만 생기면 효산(曉山) 이광렬(李光烈 : 1885-1966)댁에 드나들었다. 효산은 고암보다 19세 연상으로 서예와 사군자로 조선 예단(藝壇)의 중견작가였으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으니 고암으로서는 존장으로 모실 수 있는 노선생이었다.
고암은 효산으로부터 예술에 대한 조예를 쌓는 한편 사사로운 일에 있어서도 친숙한 사이로 지내왔다. 고암은 사군자 가운데 대나무 그림이 뛰어나 제3회 선전 사군자부 입선에 이어 전주에서 출품한 작품으로는 1930년 제9회 선전 사군자부에서 풍죽(風竹)과 청죽(晴竹)이 입선됐다. 1931년 제10회 선전 사군자부에서 대죽(大竹)과 풍죽(風竹),청죽(晴竹),분죽(盆竹),매(梅) 등 네폭의 출품이 한꺼번에 입선되고, 특선으로 이왕직(李王職)의 상을 받는 동시에 이왕직에서 사들이는 운도 따랏으니 선전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로서 그의 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이때에 고암은 죽사(竹史)라는 호를 가지고 출품했는데 죽사란 효산이 지어준 호다.
고암은 이렇듯 화려한 화력(畵歷)을 장식하고, 세계를 향하여 용솟음치려는 꿈을 꾸고 있었으나 전주에서 그의 화려한 앞날을 예측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예술의 고장 전주에서 묘목으로 자라나서 줄기가 뻗어나고 잎이 벌어 꽃이 필 무렵 전주에서 훌쩍 떠났다.
전주에서 여덟 해를 보낸 고암은 1935년 일본에 건너가 동경본향회 연구소 서양학과에 들어갔다. 1936년에는 가와바다(川端), 화학교(畵學校)에 진학하여 남화의 대가 마쓰바야시 게안게쓰(宋林桂月)에 사사하고, 1938년 제17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동도화안(東都河岸)' '동원춘사(東園春事)'로 입선, 1939년 제18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여름날'과 '쓸쓸한 가을'로 입선, 1940년 제19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가을'로 입선, 1941년 제20회 선전 동양부에서 '봉춘흥아(逢春興亞)의 집'으로 입선, 1942년 제21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동도교외(東都郊外)'로 입선, 1943년 제22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장날'로 입선, 1944년 제23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춘추이제(春秋二題)'로 입선, 특히 1939년 선전 제18회 동양화부에서 특선하고 화신백화점에서 첫 개인전, 1940년 선전 동양화부에서 무감사로 출품하고 화신백화점에서 제2회 개인전, 1945년 조국해방 직후 귀국하여 위 그림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한편 단구미술학원(壇丘美術學院)을 창립하는데 가담, 1947년 조선미술협회 상임위원으로 출품하고 11월 전주에서 개인전, 1948년 홍익대학 동양학과 주임교수로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 1950년 전남 광주에서 개인전, 1955년 '동양화 감상과 기법'을 저술하고 대한미협이 출품, 1958년 서독에서의 초대전을 계기로 서독에 간후 파리로 자리를 옮겨갔다. 대어(大魚)는 바다를 만나야 활개를 치듯 고암의 도약은 국제적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프랑스에서의 문화 예술활동
1950년대에 유학와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 정착, 파리에서의 눈부신 활약을 통해 현지사회나 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진 화가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응로가 있다. 특히 프랑스에 한국인 화가로서의 발자취를 선명하게 심어놓은 업적을 위주로 살펴보기로 한다.
85년간을 세상에 머물면서 그림을 배우고, 그리며 가르쳤던 고암 이응로의 생애는 한국생활 44년간, 일본생활 10년간, 파리생활 31년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을 크게 둘로 나누면 도불이전과 이후, 즉 1958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응로의 파리시대는 1958년 12월 ~ 1989년 1월까지이지만 작품활동은 1960년 초부터 1988년 말까지이다. 약 30년간 이응로는 시간에 관계없이, 장르에 관계없이, 마티에르에 관계없이, 그야말로 영역과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활동을 했다.
예를 들면 1960년대에는 주로 콜라주에 몰두하였지만 문자추상도 그렸고 군상도 그렸다. 물론 산수, 화조, 사군자를 그리기도 하였다. 1070년대에는 문자 추상화를 많이 그렸지만 콜라주도 하였고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자유롭게 했다. 1980년대 역시 많은 군상작품에 몰두하면서도 사군자와 화조도 많이 그렸다. 물론 이 파리시대의 산수, 화조, 사군자는 한국에서의 작품과는 아주 다른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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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로 작, '반전평화' | 한국의 화가로서 분단의 아픔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했던 고암 이응로는 지난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어둠속에서 예술뿐만 아니라 민족의 문제를 깊이 고뇌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파리에서 그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1964년 아내인 박인경 여사의 내조와 함께 파리의 '동양미술학교'를 세워 수천명의 제자를 길러냈다는 점이다. 그 중 불행이도 한국인 제자는 단 한명도 기르지 못한 점을 선생은 가장 애석해 했는데, ??동베를린 사건??으로 인해 그는 2년간 한국의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심지어 이 옥중에서도 그림 그릴 재료를 얻을 수 없자 끼니 때마다 밥알을 조금씩 때어 모아서 소조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간장을 잉크삼아 화장지에 데생을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작품을 한 작가이다.
파리에서 제작된 영화 '응노 리(Ungno Lee)'는 그의 생활과 예술세계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예술가로서의 그의 위치가 최고 수준에 올랐음을 입증해주는 것이었다.
1999년 1월 10일 이응로 타계 10주기를 맞아 그의 예술세계를 조망하고 재점검하고자 파리의 가나보부르 화랑 전시를 주관한 이호재사장은 말한다. 그동안 해외에서 활동한 원로 작가들이 적지 않았지만 고암 이응로처럼 자신의 정신을 현지 사람들의 마음 깊이 심어놓은 경우는 찾기 어렵다. 고암 이응로가 프랑스에 남긴 자취는 제자들의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1993년 파리 근교 퐁트와즈에 건립된 전통 한국식 건물인 고암서방은 그가 남겨놓은 유형의 흔적이다. 고암서방은 이곳을 찾는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을 느끼게 해주는 상징물처럼 되어있다.
고암이 생전에 심혈을 기울였던 파리의 동양미술학교는 현재 그의 아들 융세와 함께 아내인 박인경여사가 계속 꾸려가고 있고, 고암서방을 중심으로 하는 이응로 미술관 건립의 꿈 역시 여전히 싹을 티우고 있다. | 이응로의 그림여정 그 변화무쌍
문자추상 작업과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의 희생자로 기억되는 한국화의 대가 고암 이응로(1904~1989)의 생애는 그 자체로 서구사조와 숨바꼭질을 계속했던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축약판이다. 사군자 문인화에서 시작한 고암의 그림편력은 재료와 구도의 제약에 짓눌린 전통화법의 경계를 끊임없이 벗어나 서구 전위 추상미술과 집요한 회통을 꾀하는 여정이었다. 그 사이로 분단과 냉전의 시대사가 끼어들어 작가와 부딪히면서 화력은 더욱 핍진한 면모로 변해간다. 해방 뒤 일본색 털기에 급급해 퇴행적 문인화풍에 뜬금없이 주저앉았던 다른 한국화가들에 견주어 프랑스로 가면서까지 민족의식과 분방한 표현욕구를 한껏 밀고나간 고암의 성취는 단연 커보인다.
고암탄생 100주년 기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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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그린 수묵담채화 <농가>.
| 덕수궁 미술관에서 3일 개막한 고암 탄생 100주년 기념전 ‘다시 고암을 생각한다’는 냉전의 서슬에 온전히 조망되지 못했던 고암 그림의 연대기적인 전모를 양지로 이끌어낸다. 고암의 회고전은 89년 호암갤러리 유작전과 94년의 호암 5주기전, 99년 가나아트의 10주기 전이 잇따랐지만 초기작부터 말년까지의 그림 여정을 망라한 전시는 처음이다. 22년 서화가 해강 김규진 문하에 입문해 사군자를 그리던 시기부터 일본 유학기, 해방 뒤 반추상 모색기, 프랑스로 건너간 뒤의 콜라주·문자추상을 거쳐 말년의 군상 연작시기에 이르기까지 60여 년의 화력을 4부로 나눈 뒤 150여 점의 그림과 조형물, 유품 등으로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
20년대 사군자부터 80년대 군상연작까지 150여점 작품 4부로 나눠
전시의 가장 큰 미덕은 낯선 30~50년대 미공개 그림들을 다수 입수해 초창기 작업세계의 얼개를 구체적으로 전해준다는 점이다. 예컨대 30년대 대나무나 매화 그림 등에서는 이미 터져 분출하는 듯한 먹의 번짐이나 자글거리는 듯한 붓질로 표현적 욕구를 드러내며, 일본유학기 시냇가 갈대밭 등을 그린 <황량> 등에서는 길게 이어지는 원근 파노라마 구도로 일본채색화 특유의 사실적 정경을 표현한다. 전통 준법에 구애받지 않고 툭 먹덩이를 찍고, 패인 굵은 선으로 산기운을 자유롭게 표현해 시각적 쾌감이 두드러지는 금강산 풍경도, 삽화 일러스트 같은 <장날><3·1운동> 등의 작업에서도 불쑥불쑥 이런 자유인적 기질은 배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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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 1957년작 <금강산 전도>.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1988년 그린 만년기의 대작 <군상>. 한지에 파라핀과 담채를 섞어 그렸다.
| 50년대 이후에는 서구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아 인물이나 풍경도상이 더욱 단순화하고, 대담한 반추상의 경지로 진전되는데, 잭슨 폴록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생맥><해저> 등의 전위적 작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후반기 문자추상 못지않게 파격과 일탈의 조형욕구가 30년대부터 꿈틀거리고 있음을 출품작들은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3, 4부는 ‘빠삐에 콜레’란 불어로 유명한 서체 콜라주와 일련의 유명한 문자추상, 80년대 광주항쟁 뒤 본격적으로 등장한 숱한 인물 군상 반추상작업들이 나온다. 68년 투옥될 당시 철사와 한지 밥풀 등으로 만들었다는 군상 조형물, 프랑스 모빌리에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고암의 타피스트리 2점도 고인의 색다른 체취를 전한다. 초창기 미공개 작품 다수를 수집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입문기와 일본유학기, 해방 뒤 화력에 대한 면밀한 고증과 의미부여 없이 단순 끼워넣기 식으로 작품을 배치해 전시가 후줄근한 모양새를 면치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2월13일까지. (02)779-5310.
한편 서울 평창동 이응노 미술관(02-3217-5672)에서도 그의 창작활동을 담은 기록사진 100여 장과 유품, 완성·미완성작들로 생전 파리의 아틀리에를 재구성한 ‘빠리 이응노 아뜰리에’ 전을 12월31일까지 열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 |
[미술] 그들은 낡은 미학의 전복을 꿈꿨다
장 뒤뷔페, 포트리에, 마티유와 잭슨 폴록 그리고 박서보와 남관과 이응로까지.
한국과 서구 추상미술의 한 정점을 장식했던 거장들의 작품이 한 자리에 모인다. 2차대전 이후 미술사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던 유럽의 `앵포르멜' 미술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운동을 중심으로한 `한국과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격정과 표현'전이 오는 17~5월14일까지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참여작가는 우리나라에서 권옥연, 김창열, 남관, 박서보, 윤명로, 이세득, 이응로, 정창섭, 최만린, 취욱경씨 등의 작품 36점이, 외국작가로는 카렐 아펠, 장 미셀 아틀랑, 장 뒤뷔페, 장 포트리에, 잭슨 폴록, 조르주 마티유, 앙리 미쇼, 안토니 타피에스 등의 작품 34점 등 모두 70점이 전시된다. 특히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1944년 이후 인간 존재의 갈등을 파격적인 형식으로 표현한 볼스의 <니렌도르프>를 비롯해 국내에선 만나기 힘들었던 뒤뷔페, 포트리에의 작품 등이 이번 전시회를 더욱 빛내준다.
앵포르멜 미술은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등장한 서정적인 추상의 한 흐름으로 전후세대와 실존주의가 만나면서 일어난 문화형식이었다. 앵포르멜은 또 그 이전까지의 정형화된 기하학적 추상에 반기를 들면서 비정형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했다. 함께 전시되는 미국의 잭슨 폴록, 프란츠 클라인 등의 추상표현주의는 뜨겁고 격정적인 추상미술을 주도했던 몇몇 미국 작가들을 묶는 것이다.
이 두가지 서구 미술경향은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6·25 이전 추상은 유영국, 김환기 화백 등 몇몇이 독자적으로 시도하는 수준이었지만, 50년대 접어들어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등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추상미술은 그야말로 대세를 이루게 된다. 그런 흐름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작가들이 바로 60년대 이후 우리 미술계를 주름잡은 이른바 모노크롬을 비롯한 추상 작가들로서 이들은 상업적 성공과 명성을 얻었다. 일본에서 미술을 배운 원로들과는 다른 차별성과 정체성을 원했던 50~60년대의 아카데미즘 1세대들은 유일한 대안으로 앵포르멜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전후 추상미술전'은 이처럼 우리 미술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서구 추상회화의 주요 작가들과 이를 받아들여 우리 미술계의 주역으로 성장한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비교해보는 모처럼의 기회일 것이다. (02)771-2381. 구본준 기자

제목: 구성
이응로 (李應禿 1905∼1989)
요약
설명
동양화가. 호는 고암(顧庵)·죽사(竹史).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 김규진(金圭鎭) 문하에서 동양화를 배웠고, 일본에서는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柱月(송림주월)]의 지도를 받았다. 1925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대죽》 《청죽》 《풍죽》 등이 입선·특선하였고, 광복 뒤에는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과 대한미술협회를 통해 재야작가로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홍익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때 작품으로 《노우(怒牛)》 《새》 《숲》 《봄》 《비원(秘苑)》 등이 있는데, 서민상·풍경·전쟁체험 등을 형상화한 것이다. 1958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 정착하여 동양미술연구소를 개설하고 동양화를 지도하는 한편, 파케티화랑을 통해 이루어진 작품활동은 1960년대 후반까지 콜라주기법과 자유로운 수묵담채 형상의 작업을 추구하고, 이후 10년 동안 문자추상(한글·한자의 서예적 추상)의 작업을 시도하였다. 1965년에는 제8회상파울루비엔날레전에서 명예대상을 받았다. 한편 1967년 <동베를린사건>에 연관되어 소환, 투옥되었고, 1977년 백건우(白建宇)·윤정희(尹靜姬) 부부의 북한납치미수사건에 관계된 것으로 밝혀져 한때 국내미술계와 단절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종래의 추상형식에서 구상적 표현으로 돌아가 《인물군중상》 연작을 시도, 긴박한 움직임이 있는 화면을 통한 의중(義衆)의 시각적 발언을 시도하였다. 파리 정착 이후 작품은 대부분 제목이 없이 발표되었으며, 1983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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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로/이응로 그림(《여름》, 1944년,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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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로/이응로 그림(《군중》, 1985년,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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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로/이응로 그림(《사슴》, 1958년, 개인소장) |
 문자추상이라는 한국적 추상화를 개척한 화가

그는 글씨, 특히 한자를 해체하거나 변형하여 특이한 추 상적 효과를 낸 ‘문자 추상화’로 동양적 정서를 표현해냈다.

먹을 이용해 많은 사람이 움직이거나 춤을 추는 것 같은 독특한 표현을 하기도 했다.

화풍은 사실적인 남화계였으나, 동양의 서예정신과 문인화정신을 기반으로 서양 의 콜라주기법을 혼용하여, 독특한 환상적 기호로써

추상적인 화면은 모이고 흩어지면서 일정한 형상들을 암시하게 된다. 이 시기(약 60년대 중반)를 초기 문자추상시기라고 하는데, 이때의 문자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된 암벽 의 글자와도 같이, 정확하게 읽을 수 없게끔 지워지고 뭉개진 상태이다.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문자는 더욱 간결하고 장식적인 구조로 변한다. 이 시기를 후기 문자추상시기라고 하는데, 초기의 문자는 한자의 흘림체에 가깝다면, 후기의 문자는 한글의 자모와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작품은 다른 시기와는 달리 색채도 밝고 화사해지게 된다.

<정찬용 아트겔러리 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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