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oriental painting

[스크랩] 고암 이응로

율카라마 2008. 11. 8. 17:27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1904∼1989)화백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기념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지어진 미술관에서요. 그리 크지 않은 곳이고, 자가용이 없이 그곳에 가려면 인사동에서 출발하는 미술관 순회버스를 타야 하기에 조금은 불편한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봄이 시작되는 날의 조용한 오후에 마음을 편하게 하고 그곳을 찾는 다면, 미술관이 주는 여유를 흠뻑 누리실 수 있을 거에요. 게다가 미술관 순회 버스는 데이트 코스로도 좋을 만큼 지나는 길들이 아름답거든요.

일제 식민지시대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어느 겨울에 조선 말기의 선비 집안에서 이응노 선생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숙부는 의병을 일으키다 성공하지 못하자 자결을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부친 또한 한문만을 고집해서 당시 학교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너무 좋아해서 학교에 가길 간절히 바랬고, 학교에 가서도 친구들이나 선배들의 그림을 대신 그려줄 정도였다고 해요. 그러니 부모님과의 갈등은 적지 않았을 것 같죠?

결국 그는 화가가 되기 위하여 열 아홉살에 가출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처음에 시작한 그림들은 선비 정신을 담은 문인화, 수묵화 등의 한국화였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 해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이란 작품으로 입선을 하게 되었구요.

30대가 되자 고암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미술계에서 유행하고 있던 서양화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지요. 이 때부터 전통적인 사군자를 그리는 문인화에서 벗어나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뒤 해방 후에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한국회화를 개척한다는 정신으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시작합니다. 물론 6.25 전쟁 중에도 그는 작품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1957년에는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 주체의 전시회 등, 국제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겼는 데요, 덕분에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던 프랑스 평론가의 초청으로 고암은 프랑스로 이민을 가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하거나, 그림 공부를 하기도 하고, 제자들에게 동양미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답니다.

그 뒤 고암은 간첩누명을 쓰기도 하여 몇 번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작업은 계속되었고, 특별히 광주 민주화 운동을 화제(畵題)로 하여 200호의 화폭에 수 천명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넣는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그림을 보고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을 연상했다고 하네요. 물론 고암은 두 의미 모두 자신의 심정이라 말했답니다.

“ 내 그림은 모두 제목을 ‘평화’라고 붙이고 싶어요. 저 봐요. 모두 서로 손잡고 같은 율동으로 공생공존을 말하는 민중 그림 아닙니까? 그런 민중의 삶이 곧 평화지 뭐. 이 사람들이 바로 민중의 소리이고 마음이야. 요즘은 자꾸 이것만 그리게 되는 데 사실 이걸 시도한 지는 오래 전부터지요. 감옥생활하기 전부터 생각했던 주제인데 감옥이 내게 자극을 주어서 형상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 셈이지요.”

이렇게 설명했던 고암 선생의 군상화들은 1980년부터 그가 작고하던 1989년까지 사이에 주로 제작되었다고 해요. 사람들을 그린 그의 작품들에는 1인상을 비롯해서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려진 대작까지 있답니다. 그 크기와 색상도 각각이고요.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가 그린 여러 그림들 중에서 198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진 군상화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군상화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운동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한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이 조물주라도 되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죠. 기호화된 형태로 그려져서 움직임 정도만 파악되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지만, 가만히 그 안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한없는 생명력과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 군상 (1981) ]
짙은 노란 빛 바탕의 한지에 붉은 색으로 바탕을 채우고, 그 위해 검은 먹으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그려넣었습니다. 달리고, 뛰고, 춤추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붉은 바탕으로 인해 더욱 활기가 넘쳐 보입니다.

 

 

 군상 (1985) ]
이 그림 또한 붉은 색과 노란 색으로 배경을 만들고, 그 위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취하는 포즈와 움직임으로 화폭을 가득 채운 것입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그림에서 뛰쳐 나올 것처럼 보이네요.

 

 

군상 (1986) ]
전시회에는 이렇게 큰 작품들도 볼 수 있으며, 매우 작은 작품들도 볼 수 있는 데요, 그림이 작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지만 이렇게 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이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왠지 인간 세계를 내려다 보고 있는 조물주의 기분이라고 할까요?

 

 

[ 군상 (1988) ]
매우 선명한 흰 종이에 굵은 선으로 표현된 군상화이네요. 그 속에 있는 사람의 몸짓에서는 알 수 없는 자유와 희망, 절망과 좌절, 분노와 고통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생명력있는 몸짓이면서도 자유를 향한 몸짓이지요. 반핵운동이든, 독재에 대한 항거이든, 통일에 대한 마음이든지 모두 그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군상 (1988) ]
약간은 힘이 없이 먹물이 흘려진 듯 그려진 그림입니다. 흐릿하면서도 날렵한 필치에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의 가벼운 몸짓을 느끼게 합니다. 두 팔을 들고 하늘을 향해 있는 그네들은 금방이라도 날아 오를 듯 하네요.

 

 

 군상 (1989) ]
화려한 색상의 배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여러 사람들의 움직임을 화면에 가득 채웠습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소 굵고 경직된 듯하게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색상도 다소 진한 듯하구요.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의 강도에 따라 이렇게 강하게 그려진 것 같습니다.

 

 

군상 (1989) ]
확실하게 뒷 배경과 바닥으로 구분된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려내었습니다. 검은 색과 푸른 색을 배경으로 하고, 옅은 황토색으로 사람을 그려 내었기에 그들의 동작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군상 (1989) ]
앞의 그림처럼 흐리게 채색된 사람들이 바닥에서부터 뛰어 올라 하늘로 오르고 있는 듯 하게 그려진 작품이네요. 자유를 갈망하여 자신을 잡아당기고 있는 모든 억눌림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 같습니다.

 

 

[ 군상 (1989) ]
두 팔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모두 비슷한 포즈를 취하면서 춤이라도 추고 있는 듯 하죠. 혹은 다른 의미로 몸짓을 만들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추상화를 보듯이, 이 그림 또한 바라 보는 이의 마음대로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다.

 

 

 군상 (1989) ]
이번에는 푸른 색으로 만들어진 배경 위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작게 그려졌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들도 멀어지고 있네요. 그림을 바라 보고 있는 자신과 그림 속 사람들의 거리가 다른 그림에서 보다 더 느껴지기도 하네요. 왠지 바쁜 도시 생활에 찌든 듯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문화' http://cafe.daum.net/munkorea 경복궁 옮김>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카프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