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人畵

[스크랩] 월전 장우성 화백

율카라마 2008. 11. 1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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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전 장우성 작,

                               

 

 

 

월전 장우성 화백

 

1912년 충북 충주 출생.

18세 때 이당 김은호 문하로 한국화에 입문한 이후, 평생을 한국화에 헌신한 근대 한국화의 산증인. 전통적인 문인화의 격조를 현대적으로 변용 시켜 새로운 한국화의 경지를 개척해 온 한국화의 대원로(大元老)다.

그의 예술의 기본은 고고하고 격조 높은 문인정신과 회화적인 감각과 기술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킨 정신과 형식의 일치에 있다. 간략한 대상의 설정과 여백의 공간 구성을 통한 그의 화면에는 정(靜)과 동(動)의 세계가 함축된 놀라운 직관의 세계가 자리한다. 또한 문인화의 정신세계를 다루되, 현실과 사회상황으로부터 다양한 소재를 채택하여 자칫 빠지기 쉬운 관념의 함몰로부터 의연하였다. 결국 그는 한국적 전통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우리 한국화의 제 1 과제를 자신의 화폭 안에서 개척해 왔다고 할 수 있다.

1932년 선전(鮮展)에서 입선하여 화가로 데뷰한 이래, 연속 4회 특선으로 추천작가,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거쳐 워싱턴에 동양예술학원을 개설해 후학을 지도하는 등 예술가로서의 작업과 미술교육자로서의 길을 함께 걸어왔다.
현재 월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예술원 회원이다.

 

월전

 

이열모(성균관대학교 교수)


우리 미술의 특성을 요약하면 담박한 운치라 하겠다. 이 특성은 유구한 세월을 두고 형성되어진 우리 민족의 정서이고 문화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의 예술이 동방삼국 중에서도 더 청운박질(淸韻朴質)한 것은 우리의 미의식이 그만큼 소박한 자연주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특성은 아무리 서구의 역동적인 미술양식과 박진한 표현수단이 우리를 엄습한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그대로 존속될 것이다. 담박과 운치는 우리의 숙명이라고 해도 좋을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마치 조선백자나 분청사기가 우리 선조들의 숨결인 것처럼 말이다.

시대가 변하여도 지니고 가야할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미적가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때 담박과 운치말고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여기에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만의 아취가 담겨있는 것이다. 요즈음 흔히 내세우는 세계주의나 국제화가 예술에 있어 혼혈아적 무국적성의 지향이 아닌 다음에는 도리 없이 우리의 고유성을 들고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경시해 왔던 우리의 전통예술에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일본의 식민정책과 해방후의 서구문명에 떠밀려 전통이라는 말만 나와도 무조건 외면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우리의 문화는 한국성이라는 점에서 퇴영적이거나 왜곡된 전통이 판을 치는 꼴이 되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전선생이 80여평생을 두고 추구해온 작업은 바로 이 전통속에 담겨 있는 우리의 예술적 가치를 추출하여 오늘의 조형방식으로 재창조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미술가들이 전후이래 범람하는 외래사조에 매몰되어 자아상실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선생은 고고하게 지조를 지키면서 동양화 본연의 영역에서 화도를 닦아 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과거에 안주하거나 고루한 인습을 고집하지 않고 늘 참신하고 창조적인 작품세계를 펼쳐왔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선생의 회화철학은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 나는 문득 회사후소(繪事後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의 뜻은 그림 그리기에 앞서 마음 바탕이 먼저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가에서 나온 이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대학 2학년 때 월전 선생의 동양미술사 강의에서 였다고 기억된다. 그 당시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는데 40여년이 흐르는 동안 뜻은 점점 깊고 넓게 인식되어 진다. 뿐만 아니라 오늘과 같은 시대일수록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후소(後素)에서의 素(소)자를 놓고 선생은 여러 가지로 해석한 기억이 난다. '희다'고 하는 뜻으로 볼 때 바탕이 순수하여 잡스러운 것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말하고, 공과 통하므로 아무욕심이 없고 티없이 맑은 청정한 상태 그러면서도 사물의 본질, 즉 '참'을 깊숙이 간직한 초연한 세계 이러한 자세가 갖추어진 연후에 비로소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이나 가식으로부터 마음을 비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우리네 범부에게는 지극히 감내하기 어려운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세속에 묻혀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신이 탁류 속에 떠내려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라는 이 문명이 누구하나를 그냥 놓아두지를 않는다. 공동집단사회가 발달하면서 모두가 연계성을 갖고 타락의 공방자가 되고 만 것이다.

후소정신은 알고 보면 옛날 사대부들이 내세웠던 선비정신이기도 하다. 이 선비정신이 회화속에 용해될 때 격조 높은 문인화가 탄생하였고 당시 직업화가들로??범접못 할 고아하고 생동감 넘치는 남화의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을 안다. 또한 이것이 동양화로 하여금 쟁이나 얼치기들의 재주부림에서 벗어나 참다운 예술로 승화케 한 원동력의 구실을 한 것이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안으로 삭이면서 조금도 허세를 부리지 않는 도인(道人)다운 모습, 허명(虛名)이나 이재(利財)를 탐하지 않고 지조를 하늘 같이 하는 선비정신, 이 담백하기 이를 데 없는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선생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었으나 내게는 손이 미치지 않는 아련함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이 수도승 같은 고행의 길을 옛 선배들은 천명으로 알고 화도에 뛰어 들었기 때문에 현실을 극복하고 역사에 남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월전선생이 우리에게 들려준 또 하나의 말씀은 도가의 무위사상이었다. 이것은 회사후소와 함께 동양 미술의 사상적 근간이 되는 것이겠는데, 인위적으로 식상해 있는 오늘의 문화를 벗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가 자유자재 하는 마음으로 우주를 넘나드는 신선과 같은 광대무변의 세계인 것이다. 진리를 터득함에 있어 변증법적인 영역을 빌리지 않고 직관을 통해 다다르는 선과도 같은 세계, 이것이 바로 동양화 특히 문인화가 지향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고 할 수 있다.

변증법은 원래가 합리주의를 생리로 하는 서구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무위사상은 이런 것보다는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인간본성을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기는 해탈경(解脫境)이다.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천의무봉의 벌거숭이 그 자체인 것이다. 이와 같은 높은 차원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조악한 객기로 변질되기 쉽다. 더러들 회화의 기본을 무시한 채 아무렇게나 붓을 휘둘러 난잡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이 그려 놓고 천진이라거나 호쾌 운운하는 예가 그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런 작가들은 매스컴과 결탁하여 더 패기 있고 혁신적인 작가로 군림하게 되고 대중은 그 그럴싸한 위장에 현혹되어 우롱당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애초의 무위사상은 오간데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세속으로 치닫게 된다. 제작에 열중하기보다는 처세에 더 매달리게 되고 알찬 내용보다 허장성세로 이름내기에 더 급급하게 되어 순수하게 세상을 관조한다거나 예술의 참뜻을 음미하기는 어렵게 된다.

아무래도 예술가는 고독해야 한다. 세속을 멀리하다 보면 도리 없이 외로워지게 마련이다. 홀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없이 창작의 산고를 겪어 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독한 마음으로 고독 속에 묻힐 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예술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삶의 내적 실재를 다루는 것이지 형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양화는 서양화에 비해 더 내면적이다. 존재를 본질 보다 앞세우려는 실존주의와 달리 우리는 본질 그 자체를 중히 여긴다. 그렇게 때문에 동양화는 궁극적으로 정신주의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월전선생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도 후소정신과 무위사상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선생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연중 선비정신이 그윽이 배어 나옴을 알게 된다. 거기엔 한 점의 허세나 억지가 없는 잔잔한 운율의 번짐이 있을 따름이다. 안으로 농축된 깊은 사유가 조심스럽게 살포시 그것도 매우 간결하게 표출되고 있다.

선생의 작품은 화제와 관계없이 문인화적인 세계를 펼치고 있다. 선생이 즐겨 그리는 학이나 백로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인물이나 정물 또는 산수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나 그러하다. 거기엔 풍진 세상 저쪽에 있는 초연한 세계가 있다. 예로부터 학과 백로는 고고한 선비들의 기품과 곧잘 결부시켜서 해석되어 왔다. 선생이 학을 그린 소재성에서 오는 관념상의 의미보다는 선생 특유의 조형방식, 즉 간결하고 응축된 선으로 대상의 본질적 형태를 창출해 내고 그 주변에 긴밀한 조화를 이루는 여백을 설정함으로써 최대한의 여운을 유추해내는 화면처리에서 얻어지는 상념의 세계인 것이다. 이 고독한 인간상을 은유적으로 시사하는 학 그림뿐만 아니라 월전회화의 모든 영역에는 깊은 명상에서 얻어지는 선의 정적이 확산되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은 예술가로서의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가 아닌가 한다. 아무런 현대 교육을 받은 바 없는 분이면서도 동양화가 빠지기 쉬운 고루함이나 진부함을 일찌감치 극복하고 전진적이고 현대적인 새로운 동양화를 개척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천부적인 능력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화의 현대화라는 과제를 놓고 더러는 서구의 조형방식이나 개념을 직접 모방하거나 변조하는 형식으로 해결하려는 시행착오를 범한데 반해 선생은 전통의 진수를 추출하여 더 본질화 함으로써 현대 미학이 지향하는 이른바 순수화와 직설화에 도달한 것이다.

선생은 해방이후 우리 한국화단에 참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선구자이기도 한다.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지금 그 이 기라성 같은 많은 제자들이 옛날의 가르침에 힘입어 한국화단의 중진으로 활동하고있고 각기 독창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교육자적 천성 때문에 선생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사지를 털어 법인체 미술관을 만들어 후학들의 연구의 장으로 내어놓았다. 또한 미술상을 제정하여 유망한 작가에게 창작의욕을 북돋우는 일과 정규강좌를 개설하여 중견작가들에게 올바른 동양정신이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일 등을 통해 잊혀져가는 우리의 소중한 정신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남다른 집념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 후학들보다 더 정력적으로 제작과 교육에 전념하는 노화백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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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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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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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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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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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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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집현전 학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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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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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푸른 들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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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고향의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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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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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견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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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노송

 

<월전 장우성의 회화세계 연구 > 2000

 

1. 서론

2. 시대적 배경

3. 月田 張遇聖의 繪畵世界

4. 결론 

참고 문헌

 


1. 서론
  월전 장우성은 그림이 한갖 장이의 손재주로 치부되었던 시대, 대부분의 작가 지망생이 그러한 인식의 바탕에서 출발하고 있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장우성은 선비가 갖추어야할 교양을 쌓으면서 자기 예술의 터전을 일구어나간 화가이다.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는 필선을 위주로 한 수묵 담채의 고아한 형식에 새로운 세대의 기운을 담은 간결, 압축된 조형세계를 추구함으로서 한국화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문인화의 형식미에 현실적 리얼리즘이 융화된 경지는 고유한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현실인식을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월전 장우성은 이처럼 어느 형식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한 새로움을 모색할 줄 아는 진취적 사고를 가진 화가이다.


  80년대에 일련의 공해문제, 남북분단문제, 현실문제 등의 내용은 그의 예술세계가 고답적인 이상주의 속에 자적하지 않음을 반영해준 것이다. 음풍영얼에 안주하지 않고 비탄적 현실인식을 가짐으로서 회화를 한갖 풍류적인 산물이나 기호물이 아닌 살아있는 현실의 직접적 구조임을 일깨워 주었다. 문인화의 경지를 더욱 넓혀 주었을 뿐 아니라 문인화의 정신을 새삼 가다듬어 주었다고 하겠다. 


  일제의 수업기를 지나 국권을 회복함과 동시에 현재까지 지속되었던 문인사대부적인 학문과 역량을 바탕으로 채색과 수묵기법을 두루 사용하여 전통적 조형방식을 현대화함으로써 원숙한 필치로 화경(畵境)을 전개하였다. 예술이란 학문과 교양을 통한 순화된 감정의 표현이라는 월전의 작품세계에서는 인생을 너그럽게 대하는 도량과 관조의 정신이 넘친다.

 

2. 시대적 배경
 
  월전(月田)이 탄생한 것은 1912년은 일제의 무단정치시대로서 당시의 회화는 이미 조선조말엽에 이어져 왔던 청대의 고답적인 관념의식이 상당수 작가들의 의식과 필묵(筆墨)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으며 일부는 화보(畵譜)중심의 학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암흑기는 그들에게 있어서 유가적 관습의 사습(私習)방법을 더 이상 유지되게 하는 데는 상당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었으며, 그렇다고 하여서 자유분방한 외래사조의 수용이나 광역한 미술계의 식견을 넓혀 나가거나 학습의 기회를 가질 수도 없는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의 회화양식을 강요받게 되는 단일창구의 답답한 사각지대였다.


  1920년대 화단은 개인전 및 전람회 등이 많아 화단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신진, 신예들이 각자의 개성에 따라 독특한 화법과 다양한 화풍을 전개시켰다. 그들은 전통화법에서 탈피하여 각자 자신의 화법을 선택하고 창조하는 등 더욱 다채로운 전개를 보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재능이 넘치는 신인들은 이용우, 김은호, 박승무,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 등의 회화미술회(繪畵美術會)출신들과 그 밖의 고희동, 이한북 등의 일본에서 수학한 작가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배출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 미술전 관문을 통과함으로써 화단에 진출하였고 그들이 배운 은사의 영향을 받아서 여러 화맥을 형성하였다. 여러 화맥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만큼 화단의 창조적 움직임이 다채로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0년대 신예들의 작품경향과 표현수법의 내면은 세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다. 확실한 고운 필선과 맑은 담채의 인물과 동물을 주로 제재 삼은 사실적 채색 표현주의와 향토적 풍경 및 야취의 산야를 심정적으로 그리려고든 수묵 표현주의, 그리고 전통적 화법을 존중하고 고수하면서 정신적 내면성을 지향한 심상표현주의의 새 양상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감각추세와 양화 및 일본화의 직접 혹은 간접적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 현실적 채색표현주의의 활발상은 김은호, 이한복, 이영일의 작풍을 이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많은 제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친 것은 김은호였다.

 

 그의 화실에서 많은 문하생들이 모였고 그들은 모두 스승의 화퐁에 따른 선묘채색화(線描彩色畵) 방향으로 나아갔다. 곧 한유동, 장운봉, 김기창, 장우성, 조중현, 이유태 등 김은호의 문도들은 모두 채색에 중점을 두어진 인물, 동물, 정물을 그렸다. 수묵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가는 이상범이였다. 그도 제자를 가르쳐 조선미술전을 통해 화단에 진출시킴으로써 그의 계열의 향토적 산야풍경파를 형성케 하였다. 배렴, 이현옥 등이 그 신예였다. 제3의 심상표현주의파는 호남에서 허백련의 영향을 받은 정운면, 허행면 등이였다. 이들은 호남파 산수화의 새 전통을 열었다.


  1936년에 등장한 후소회(後素會)는 젊은 20대 동양화가들의 모임으로 김은호의 제자들에 의해 창립되었으며 그 동안 서울 권농동 161번지에 자리잡고 있던 김은호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고 주목을 끌었던 동문들이 상호 친목과 정기적인 동문회 개최를 통한 의욕적인 단합활동을 다짐한 것이 그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우리 나라 현존하는 최장수 동문전으로 1996년 창립 60주년을 맞아 5월 17일부터 25일까지 예술의 전당 미술과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
  1945년 8·15 민족해방은 미술계에도 새로운 방향 설정을 위한 진통을 겪게 하였다.


  미술계는 결코 방치해 둘 수만 없었던 과거의 오점들을 애써 한꺼번에 씻어내려는 노력을 거듭하게 되었다. 동시에 농채(濃彩)이든, 설채(設彩)이든 그 유형을 구분하지 않고 채색의 질료에 의해 표현된 작품성향은 모두 일본화의 냄새를 풍기는 반민족적 화풍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적 잔재의 극복은 가장 시급하고도 구체적인 현안이었다. 일본화의 감염의 극복은 먼저 도안 풍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기교적인 진채의 방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묵중심의 선묘주의를 지향하게 했다. 선묘의 가치가 자각되면서 청말 신문인화에서 엿볼 수 있는 선조의 분방한 구성에서 감화를 받은 월전 장우성은 해방 후 새롭게 출범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동양화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49년 우리 나라 미술의 발전·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미술문화정책의 주요행사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창설하였으며 미술계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50년 국전을 통해 활동한 작가 가운데 심사위원급의 장우성, 배렴은 이이 선전시대에 화고한 작가적 위치를 다졌으나, 그들의 경향에도 다소 변모가 추진되었다. 장우성은 해방이후로 오면서 새로이 문인화의 세계를 지향하여 세련된 감각과 격조를 나타냈다.


  사회적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단체조직과는 달리 오로지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과 이념정립을 위한 몇몇 작가의 순수한 움직임을 대표한 것은 단구미술원(檀丘美術圓)이었다. 그것은 8·15해방과 더불어 나타난 전통화가들만의 최초의 그룹이었다. 단구미술원 동인들은 사제관계의 계보를 초월하여 다같이 새로운 민족 회화의 진로를 개척한다는 신념으로 모이고 있었다. 동인들의 당면 과제는 일본화풍의 극복과 우리 화맥의 계승 및 전통의 재창조였다. 그 점은 해방과 함께 전통화단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점의 하나였다. 이러한 노력들로 인하여 1955년부터 미술계는 안정적 분위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1957년을 전후로 50년대 후반기의 주요경향들로는 이전의 농채양식으로부터 설채와 수묵을 대거 혼용하려는 의도적인 측면을 볼 수 있었다. 장우성 역시 하원식의 간명한 필선과 농설채가 하모니를 이루는 인물들을 보여 주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허백련, 노수현, 김은호, 박승무, 변관식 등 이른바 6대가로 지칭되는 동양화의 노장들이 잇따라 타계하였다. 이리하여 70년대 들어오면서 동양화단에서는 활발한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한편으로는 지나친 해외사조의 범람과 실험적 추세가 가져오는 위기의식으로 인하여 전통에의 회귀와 관심이 촉발되었다. 장우성은 서양 것, 새 것의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우리의 정신적 자산에 뿌리를 두어야 예술의 생명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3. 月田 張遇聖의 繪畵世界
 
  1931부터 1945년까지 채색화시기로 그림의 소재는 주로 남종 문인화와는 거리가 먼 세필진채색의 인물화였다. 그러나 이 인물화는 그가 해방과 함께 서울대 미대 초대 동양화과 교수로 임명되면서 문인화로의 커다란 변화를 보이게 된다. 1936년 정기적인 동문회를 열기 위하여 후소회(後素會)를 발족하였다. 후소회란 이름은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란 그림 그리기에 앞서 마음 바탕이 먼저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월전(月田)이 서울대학교 교수시절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주던 이야기로 자신도 항상 이 말을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


  1945년의 8·15민족해방은 월전의 예술에도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해방과 함께 월전은 새로운 양식의 민족회화를 찾아 전력투구하게 되고 그 결과 도달하고 이루어 낸 것이 그의 문인화·남화이다.


  월전은 1946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되었는데 제1회 동양화과 학생들은 박노수, 장운상, 권영우 3사람이었다.
  월전은 제자들에게 유가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나 도가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강조하였는데 회사후소는 그림 그리기에 앞서 마음 바탕이 먼저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후소(後素)라고 하는 소(素)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먼저 희다고 하는 뜻으로 볼 때 바탕이 순수하고 잡스러운 것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말하고 공(空)과 통하므로 아무 역심도 없고 티없이 밝고 청정한 상태 그러면서도 사물의 본질 즉 참을 깊숙히 간직한 초연한 세계 이러한 자세가 갖추어진 연후에 비로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도가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은 인위적인 것으로 싫증나 있는 오늘의 문화를 벗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가 자유로운 마음으로 우주를 넘나드는 신선과 같은 광대무변의 세계인 것이다. 진리를 터득함에 있어 변증법적인 연석(演釋)을 빌리지 않고 직관을 통해 다다르는 신과 같은 세계, 이것이 바로 동양화 특히 문인화가 지향하는 기운생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사상은 이런 것 보다는 자유하고 싶은 인간본성을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기는 해탈경이다.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천의무봉의 벌거숭이 그 자체인 것이다. 이와 같은 높은 차원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조아한 객기로 변질되기 쉽다.


  월전 장우성의 작품 특질은 화면 물체 풍의 현실감보다는 그 물체의 상당한 배치와 그로 인하여 생기는 공처공간(空處空間) 즉, 여백이 큰 작용을 하고 있다. 이 여백의 미는 동양화에서는 제일 중요한 특질로서 공간개념을 크게 둘로 나누어서 현실공간과 공처공간(空處空間)으로 나눈다면 손쉽

게 알아볼 수 있는 현실공간도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소홀하기 쉬운 공공간에 더욱 뜻을 두는 것인데 이것이 곧 월전 작품의 특질이며 또 하나는 그의 작품에 구현되고 있는 격조의 세계이다. 이 격조의 세계는 작가의 인격과 그 사상을 조형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잘 어울렸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1950년 5월 첫 번째 개인전에서 인물화로서의 필력과 남종문인화로서의 단아한 사상을 보여주었다. 신문에 난 수화(樹話) 김환기의 평을 보면 당시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보송보송한 횐종이의 민감과 그 휘청거린 양모모필의 생리를 잘 다루는 화가도 드물 것이다. 숨어서 습작을 얼마나 했기에 여기에 이르렀는지 재주만 가지고는 곧잘 되는 일이 아닐게다"
  문인화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배경으로 시·서·화에 능한 지식인들이 계승하여 온 예술로서 객관적인 외형이나 기교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정신적인 면을 표현한 그림으로 전문화가의 그림과는 다른, 격조를 지닌 영역으로 취급되었다. 월전은 문인화적인 정신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조형기법을 가미하여 새로운 문인화를 창조하였다.


  모자상은 정확한 필선과 고운 세필묘사로 그려져 있어 인물화에 능한 월전의 기량을 엿보게 한다. 한국적인 성모의 가장 거룩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성모자의 의복을 한복으로 처리했으며 버선을 치마로 덮어 드러나지 않게 했다. 지긋이 감은 성모의 성안과 순금으로 처리한 머리 뒷부분의 후광이 성스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티없이 청정한 성모와 아기예수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백과 함축미를 강조하는 문인화적 기법을 채택하고 있다. 소박해 보이면서도 우아하고, 잔잔하면서도 긴 여운이 흘러 넘치는 〈성모자도〉는 후소(後素)의 정신과 맥이 닿아 있다.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만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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