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김이혁(金履赫) 아호 : 화은(花隱) 제목 : 고산구곡담총도(高山九曲潭摠圖) 언제 : 1803 재료 : 병풍 종이에 담채 규격 : 60.3 x 35.2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고산구곡도는 율곡(栗谷)이 해주(海州) 고산(高山)이라는 곳에 은거하던 때 지은. 고산구곡가와 그뒤 서인(西人)계열 성리학자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단순한 감상용 산수화가 아니고, 도학적(道學的)내용과 진경(眞景)의 사생(寫生)이며. 또 학파와 정치적 집단의 기념물로서의 의의가 있다. 이 고산구곡도는 전부 12폭의 병풍으로, 첫폭에는 고산석담기(高山石潭記)라는 제자(題字)가 위에 써있고, 또 율곡의 영산중즉경시(詠山中即景詩)가 있다. 이들은 각 폭마다 율곡의 고산구곡가와 이를 송시열(宋時烈)이 한역(漢譯)한 시. 그리고 김조순(金祖淳) 이하 노론(老論) 학자들의 칠언절구시가 있으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김이혁 이라는 문인화가 이하 金弘道. 金得臣. 李寅文. 尹濟弘. 吳珣. 李在魯. 文慶集. 李履承. 李義殼 등의, 당대 유명한 화가들이 함께 고산의 구곡 실경을 그린 것이다. 이 맨 앞의 총도(摠圖)를 그린 화가는 그의 성명 김이혁과 호가 화은(花隱)이란 것 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실경이라기 보다는 상상도이며. 한 선비가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초당을, 또다른 선비가 동자를 거느리고 찾아오는 산수간의 경치로, 중경과 원경에 높은 산봉우리들이 솟아있고. 그 사이로 폭포수가 보인다. 글은 김이영(金履永)이라는 사람이 썼다.
작가 : 이명기(李命基).김홍도(金弘道)합작 제목 :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 언제 : 1796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148 x 73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조선시대 회화 중에서 초상이 점하는 위치는 자못 지대하다. 특히 유교숭배로서 조상에 대한 각별한 공경과 스승에 대한 지극한 존경이 사묘(祠廟). 영당(影堂)과 서원의 발달로 현실적인 요구가 절실했다.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과 공신(功臣)이 생길 때 마다 그려졌던 공신초상. 기로연(岐路宴)의 기록화적인 성격의 도상(圖像) 및 일반 사대부의 초상에 이르기 까지 무수히 그려졌다. 또한 사찰의 승상이나. 드물긴 하지만 여인상도 있다. “서직수초상은” 오른쪽 상단에 주인공 자신이 쓴 자발(自跋)에 의해 그림을 그린 화가와 제작연대를 알수있다. 즉 초상의 얼굴은 이명기가. 몸은 김홍도가 그렸다. 이명기는 생몰연대가 미상이다. 화원 이종수(李宗秀)의 아들이며. 김응환(金應煥)의 사위이다. 1791년 정조(正祖) 어진 제작시 그는 주관화사(主管畵師)로, 김홍도는 동참화사로. 신한평(申漢坪). 김득신(金得臣) 등이 수종(隨從)화사로 참가했다. 정조는 자신의 어진을 보며 실제와 흡사하여 웃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보다 먼저 1784년에는 나주 미천서원(眉泉書院)에 봉안 되었다가 현재는 분실된채제공(蔡濟恭) 65세像)을 그린 사실이 승정원일기에 보인다. 당대에 가장 활동이 두드러졌던 두 화원에 의해 제작된 <서직수초상>은 평상복 차림으로 머리엔 검은 동파관(東坡冠)을 쓴 좌안팔면입상(左顔八面立像)이다. 얼굴은 명암을 의식한 설채로 피부색이 여실하며. 왼쪽 볼에 핀 검버섯 및 주름살과 근육이 실물에 방불하게 나타낸 일종의 요철 기법이 보인다. 형형한 안광이 번득이는 눈동자의 처리 등 핍진(逼眞)한 표현이다. 얼굴에 의해 일반적으로 소흘히 다루어지기 쉬운 의복은, 별도로 김홍도(金弘道)가 그려서 인지 섬세하고 고른 필선이다. 옷주름이 사실적인 완만한 곡선으로 그려졌고, 선염(渲染)에 의한 입체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가슴에 동여맨 띠는 동파관과 동일한 짙은 묵색으로 칠해져 일직선상으로 늘어져 있다. 사뭇 단조롭고 비단 바탕색과 유사한 옷색임에 대해 화면설채에 있어, 하단 3분의1을 점한 녹색 자리표현은. 시원한 배색효과를 이루고 있다. 당시 초상화의 높은 수준을 대변하는 걸작이 아닐수 없다.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이재초상(李縡肖像) 언제 : 18세기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규격 : 97.9 x 56.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조선시대에는 초상화가 널리 발달했는데. 그 까닭은 도화서(圖畵署) 화원이 왕의 어진(御眞)을 그려 인정을 받게 되면 어용화사(御容畵師)로 출세의 길이 트여 지방 수령이 될수도 있으므로, 초상화의 사실력(寫實力)은 날로 세련되었다. 이 작품은 18세기 중엽의 뛰어난 초상 능력과 그 시대 양식을 보여준 걸작으로서, 약간 우향(右向)한 이른바 칠분좌안상(七分左顔像)이다. 면상묘사(面相描寫)의 치밀한 필치와 대범하게 다룬 간결한 옷주름의 양식이 잘 조화되어, 인물의 청수(淸秀)한 인상을 돋우어 준다. 이재는 숙종 때의 학자. 문신으로서 그의 재세(在世)는 1680~1746년 이었으므로 이 초상에 나타난 노경(老境)의 얼굴로 보아 몰년(沒年)에 가까운 연대의 제작임을 알수있다.
작가 : 김득신(金得臣) 아호 : 긍재(兢齋) 제목 : 야묘도추(野描盜雛) 언제 : 18세기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2.5 x 27.2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은 진경풍속화에서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던 김응환(金應煥)의 종자(從子)로서 도화서(圖畵署) 스승인 김홍도(金弘道) 화풍을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그러나 진경에서는 정선(鄭敾)의 화법을 익혀서 보다 호방장쾌한 면모를 보이고. 인물풍속에서는 신윤복(申潤福)의 영향인 듯 절도있는 선묘로 간결 명쾌하되 다양성을 살려나간 특성을 보여주어 오히려 청람(靑藍)의 가치가 선명하다. 또한 그는 진경풍속외에 본격적인 남종화(南宗畵)에도 기량이 돋보이는 화가였는데. 이는 그가 선배격인 김홍도나 김응환보다 심사정(沈師正)의 남종화풍이 유행되는 시기와 보다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울안에 살구꽃이 활짝핀 화창한 어떤봄날. 어느 규모있게 사는 농가에서 일어난 한때 소동을 포착한 그림이다. 도둑고양이가 마당에서 놀고있는 병아리를 어느사이 채가자. 어미닭은 죽을 각오로 달려들고. 이 소리에 놀란 주인 부부가 마루에서 방안에서 각각 하던 일을 팽개치고 쏟아지듯 달려나와 이를 쫓는 장면이다. 장죽으로 고양이를 후려치는 동작과 탕건이 벗겨지고 자리틀이 굴러 떨어진 현황을 보면, 남자는 마루에서 장죽을 빼어 물고 자리를 짜던 모양이고. 여인은 맨발인 것을 보니 방안에서 삼을 삼고 있었던 모양이다.
작가 : 김득신(金得臣) 아호 : 긍재(兢齋) 제목 : 성하직구(盛夏織屨) 언제 : 18세기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3.5 x 28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명(明)이 야만족인 청(淸)에 멸망한후 청의 정통성을 인정치 않던 조선 지식인들은 끊겨버린 중화(中華) 문화의 적통을 조선이 계승해야 한다는 결의와 자부심을 보이게 되었다. 여기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사상이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상하에서 팽배해 가니, 미구에 이런 사상은 모든 예술형식에 조선 고유색을 노정시키게 되었다. 그결과 그림에서는 東國眞景과, 風俗畵라는 화과(畵科)가 등장하여, 조선 후기 畵壇을 풍미하게 되었다. 양 화과의 본격적인 융성은 비록 조선후기에 와서 이지만. 모두 그 발생근거를 조선성리학에 두고 있으므로, 자연 그시원은 훨씬 윗시대로 올려 잡아 보아야 하는데. 풍속화의 출발은 왕실과 귀족 그리고 사대부들이, 일반 백성의 생활사를 알기 위하여 궁중화원들에게 그리게 한 경직도(耕織圖)류의 그림에서 비록된 것이라 하겠다. 김득신의 풍속화도 이로부터맥을 이은 것인데. 경직도의 감계화적(鑑戒畵的) 성격에다가, 순수회화로서의 감상화적(鑑賞畵的)인 성격이 가미된 것이라 할수있다. 성하직구는 박덩굴이 나무울타리 위로 무성하게 타고 올라가서 큼직한 박을 달아 매놓으며, 그늘을 드리운 사립문 울타리 아래에 삿자리를 깔아놓고, 그 위에서 짚신을 삼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농가의 3대가 한자리에 있으니, 노부(老父)인 듯한 백발노인은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고. 손자인 듯한 어린아이는 할아버지의 등이라도 긁어 드리고 있는 듯한 모습인데. 찌는듯한 삼복더위인지 어른들은 모두 웃통을 벗어부쳤고, 삽살개조차 혀를 빼문채 헐떡거리고 있다. 왕실과 사회의 평안과 더불어, 대를 이어가는 농가의 평화스러운 모습이, 짚신삼기라는 소재를 빌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 : 김석신(金碩臣) 아호 : 초원(蕉園) 제목 : 도봉도(道峯圖) 언제 : 18세기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36.6 x 25.7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김석신은 자를 군익(君翼), 호를 초원(蕉園)이라 하며. 화원의 집안에서 자라, 오랜 기간에 걸쳐 그 자신이 화원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그는 김응환(金應煥)의 조카이자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陽臣) 과는 형제 사이이며. 김응환에게 양자로 입양했다. 김응환의 제자들 중에서 화단에 두각을 드러낸 김홍도(金弘道)는 김석신 보다 13세 연상이어서. 그가 김홍도에게 받은 일상적인 감화도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석신은 북한산 풍경을 그린 일련의 작품으로 비교적 날리 알려져 있으며. 어떻게 보면 산만한 듯한 느낌도 들지만. 정리된 구성과 대담하고 거친 필법으로 일종의 한국적인 리듬을 띠고 있다. 그의 실경산수화에는 그리는 즐거움이 넘쳐있어, 김응환이나 김홍도에게도 없는 청신한 자기 스타일의 준법을 가지고 있다. 김석신의 이러한 특색은 한국의 산수화가 구비하고 있는 하나의 본질이라고 도 할수 있을 것이다. 이 도봉도는 당대의 명류(名流)인 이재학(李在學). 서용보(徐龍輔)등이 도봉산에서 산책한 기념으로 만든 도봉첩(道峯帖)에 있던 그림인 것을 표제(表題)에 의하여 알수있다.
작가 : 김석신(金碩臣) 아호 : 초원(蕉園) 제목 : 선유도(船遊圖) 언제 : 18세기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31.5 x 46.7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가고중류도(笳鼓中流圖)라고도 하는 이 그림은 수묵을 주로 하고, 거기에 담청과 담록을 설채한 위에 엷은 주홍색을 점채(點彩)해서. 전체적으로 담담하고 해맑은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강 건너편의 석벽은 부벽준(斧劈皴)과 비슷하나 담묵을 써서 나타냈으며. 그위에 농묵의 태점(苔點)으로 강조하여 산뜻한 대비효과를 보여준다. 전경의 수지(樹枝)에는 담청과 담록색을 곁들인 연분홍으로 설채했으며. 강 양안(兩岸)의 인물들과 강마을의 집들은 사경(寫景)의 현장감을 나타내고 있다. 강물위에는 차일을 친 두 척의 배가 날렵한 필치로 그려졌는데. 배 안에서는 시문을 읽고 있어. 화제 그대로 가고중류강호재흥(笳鼓中流江湖載興)을 보이고 있다. 이작품은 선유(船遊)하고 있는 인물들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구상되었으며. 약간 비스듬하게 구도잡힌 이 그림의 주축은, 도도히 흐르는 강 위에 뱃놀이 정경을 한층 운치있게 해주고 있다, 인물의 표현에서 특히 얼굴은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 등과 비슷한 표현을 보이고 있으나 용묵(用墨). 용필(用筆). 포치(抛置) 등에서는 김석신 독자의 양식을 구사하고 있다.
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쌍검대무(雙劍對舞)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신윤복은 자를 입부(笠父), 호를 혜원(蕙園)이라 하며. 화원으로서 첨사(僉使)를 지냈다. 檀園 金弘道와 더불어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대성시킨 인물로. 특히 기녀(妓女)와 한량 등을 등장시키고 남녀간의 애정을 곧잘 소재로 택하여. 섬세하고 세련된 필치로 능숙하게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세력있는 귀족이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들과 가무(歌舞)에 능한 기생을 불러다가 즐기는 장면이다. 악공과 기생의 수로 보아 이 놀이가 보통 규모는 아닌데. 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오직 주인대감과 그의 자제낭관(子弟廊官)인 듯하니, 일가의 세도가 어지간한 모양이다. 혹시 혜원 신윤복을 키워준 어느 풍류 재상집에서의 한때인지도 모르겠다. 화면구성에 있어서 일체의 배경을 무시하고 검무하는 장면만가득채운 대담성을 보였으나. 주제표현에 조금도 군색함이 나타나지 않으나. 이는 인물의 포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시각의 초점이 되는 검무기생들은. 의상에서 청홍의 강렬한 대조를 보이면서 화면을 압도하는데. 주인을 비롯한 관객들과 악공들이 이를 중심으로 포열(布列)함으로서 화면의 비중은 평형을 이룬다. 그런데 검무기생의 날렵한 동작에서 오는 율동감은, 관객들의 도취된 몸짓과 악공들의 신바람나는 연주에 혼연일치를 보여 아연 활기를 띤다. 이렇게 놀이에 참석한 인물들의 심리를 꿰뚫어 순간적인 동작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놓을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화가의 예리한 안목이라 하더라도 그리 쉽지않을 일이다. 따라서 작가 신윤복이 이런 세계에 얼마나 익숙하였던가를 짐작할수 있는데. 인물들이 하나같이 극도로 세련된 차림을 보이는 것도 그의 주변을 보는듯 흥미롭다.
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청금상련(聽琴賞蓮)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후원에 연당(蓮塘)이 있고, 고목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잔디가 가득 깔린 크나큰 저택을 가진 주인이, 연꽃이 필무렵에 맘에 맞는 친구들을 청하여, 연꽃감상의 즐거움을 함께하는 모양이다. 연당을 거치는 선들바람이 청향(淸香)을 실어오고. 가야금의 청아한 선율이 이 위에 어리는데. 의관을 파탈할 정도로 자유롭게 연꽃과 여인을 즐기고 있다. 이렇게 격의없이 놀수 있는 사이라면 어지간히 무던한 사이일 것이고. 의복 차림으로 보면 벌써 당상(堂上)의 품계를 넘어 있어서. 나이도 그리 젊지는 않을 듯 하니 정말 허물없는 오랜친구들인 모양이다. 모두들 준수하게 빼어났지만 차림새가 빈틈없이 세련되어 귀족의 몸에 밴 기품을 대하는 듯하다. 이는 화원이었던 혜원 신윤복이, 궁정 주변에서 이들 귀족생활을 남김없이 눈에 익히고 살아온 때문에. 그 진면목을 이와 같이 실감나게 표현할수 있었을 것이다. 가리마를 쓴 기생의 모습에서나 갓끈을 귀밑에 잡아 맨 귀인의 관(冠)차림에서 당시의 남녀관식(冠飾)을 알수 있으며. 운치있게 둘러진 석축과 고목의 표현에서는 왕조시대의 격조높은 조원(造園)환경을 실감 할수 있다.
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월야밀회(月夜密會)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장안의 인적이 끊어지고 보름달만 휘영청 밝게 비치는 야밤중에. 골목길 후미진 담그늘 아래에서. 남녀가 어우러져 깊은 정을 나누고 있다. 남자의 차림새가 전립(氈笠)을 쓰고, 전복(戰服)에 남전대(藍纏帶)을 매었으며. 지휘봉 비슷한 방망이를 들었으니, 어느 영문(營門)의 장교일시 분명한데. 이렇듯 노상에서 체면없이 여인에게 허겁지겁하는 것은, 필시 잠깐밖에는 만나볼수 없는 사이인 때문일 것이다.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버린 옛 정인(情人)을 연연히 못 잊어, 줄이 닿을 만한 여인에게 구구히 사정하여 겨우 불러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지만. 여기서 이렇게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듯하다. 이쪽 담모퉁이를 도는 곳에 비켜서서, 동정어린 눈길로 이들을 지켜보는 여인은, 밀회를 성사시킨 장본인인 것 같다. 차림새가 여염의 여인은 아닌듯 하여, 장교를 만나고 있는 여자의 전력(前歷)도 대강 짐작이 간다. 조선시대의 화류계를 주름답던 사람들이, 대개 각영문의 군교(軍校)나 무예청(武藝廳)의 별감(別監)같은 하급 무관들로서, 이들이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상기할 때. 군교 차림의 이런 애틋한 밀회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연소답청(年少踏靑)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조선조의 후기문화가 황금기를 이루고 있던 시대에. 서울 장안의 귀족생활은 아마 가장 호사가 극치를 이루었을 것이다. 따라서 귀문(貴門)자제들의 행락도 어지간히 극성스러웠을 듯한데. 이 그림은 그 시대를 산 신윤복의 붓을 통하여 그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수 있겠다. 진달래꽃 피는 봄철이 되자 협기 만만한 반가(班家)의 자제들이 장안의 기녀들을 대동하고 간화답청(看花踏靑)의 봄나들이에 나섰는데. 이들의 옷차림은 장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멋을 부리고 있다. 보라색과 옥색 천으로 발 굵게 누빈 저고리에 향낭(香囊)을 달아 차고, 홍록의 갖은 주머니를 긴 띠매어 치레하며. 행전은 짧게 치고, 중치막의 앞 두 폭을 뒤로 잡아매어서 뒤폭만 꼬리로 늘이어 걸음마다 나풀거리게 하고 있다. 장안 명기들의 미태(美態)에 홀딱 빠진 양반자제들은 체면불구하고. 말탄 기생에게 시중드느라 담뱃불을 붙여 대령하며. 구종되기를 자원하여 갓을 벗어 마부 주고, 마부 벙거지를 제가 쓰고서 검은띠를 허벅대님으로 매고, 말고삐를 잡고있다. 한 친구는 시간에 늦었는지. 갓을 벗어 짊어지고 옷자락에 바람 일며, 동자 구종을 몰아 급히 달려오는데. 나귀탄 기생의 초록 장옷도 깃발처럼 나부낀다. 암벽에는 진달래나무인 듯 분홍꽃을 가득 피운 나무들이 군데군데 있고. 구름 같은 기생의 트레머리에도 그 꽃가지가 꽂혀있다. 물빛으로 갈라 놓은 삼거리 주변의 청태점(靑苔點)이 분분하여 답청이 실감된다.
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단오풍정(端午風情)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음력으로 5월 초닷샛날은 단오(端午)라 하여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이래로 명절을 삼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부터 큰 명절의 하나로 지켜왔다. 이날이 되면 남자들은 씨름판을 별여서 힘내기를 하며 즐기고. 여인들은 창포물에 머리 감고 그네를 뛰며 노는 것이 우리네의 전래풍속이었다. 이 그림은 단오날 추천놀이를 나온 한떼의 여인네들이, 시냇가에 그네를 매고 냇물에 몸 씻으며.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지금의 정릉이나 성북동 골짜기는 물론이고. 삼청동이나 인왕산 계곡을 비롯하여. 남산이나 낙산주변의 여러 골짜기들이 모두 이런 놀이에 적합하였을 것이다. 인적이 끊긴 후미진 곳이기에 마음놓고 저고리를 훌훌벗어 던졌지만. 미처 산에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몰랐던가. 바위틈에 숨어든 상좌중 둘이서 기막힌 진경에 희희낙락 즐거워 어쩔줄을 모르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그래서 혜원은 짐짓 화면의 초점을 딴곳으로 옮기려고. 그네 뛰는 여인에게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히고, 머리손질을 하는 여인에게는 엄청나게 큰 트레머리를 모두 풀어 놓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네 뛰는 여인의 다홍치마에 반회장 노랑저고리만으로도, 지극히 선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백설 같은 속옷이 반 넘어 내보이는 것은, 반라의 여인들에게서 훨씬 더 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주유청강(舟遊淸江)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왕도(王都)의 화려한 문물은 여유있는 귀족생활의 격조 놓은 운치에서 찾아볼수 있다. 녹음이 우거지고 강심에 훈풍이 일어나자, 몇몇 자제들이 한강에 놀이배를 띄우고 여가를 즐기는 것 같다. 외형적인 호사를 금기로 여기던 조선시대 귀족들이니, 호화선을 꾸밀 리 없고 다만 일엽편주에 차일을 드리우고, 풍류를 아는 기생들과 젓대잡이 총각 하나를 태웠을 뿐이다. 신록이 그늘진 절벽 밑을 감돌아 나가는 뱃전에서는, 유량한 생황소리와 동랑(洞朗)한 젓대소리가 섞바뀌어 일어나서 강심에 메아리 지고, 일렁이는 잔물결은 뱃전을 두드리니. 여기에 詩情이 흐르는 사랑이 무르익는다. 뱃전에 엎디어 스치는 물살에 손을 담가 보는 여인이나, 이를 정겹게 턱을 고이고 지켜보는 선비의 모습에서도 그렇거니와. 어깨를 감싸고 담뱃대를 물려주는 한쌍의 남녀에게서는, 시샘이 날 만큼 농밀한 사랑이 엿보인다. 이런 중에서도 남의 일에는 아랑곳없이 망연히 뒤짐지고, 시상에 잠기는 여유를보이는 것은 역시 왕조귀족의 몸에 밴 교양이라 할수 있겠는데, 삿대질에 열심인 뱃사공도 자기일에 충실하고 있어서. 음악을 연두주하는 두사람의 모습과 함께 질서있는 조화를 이룬다.
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미인도(美人圖)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114.2 x 45.7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혜원 신윤복이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후기문화가 난숙기에 접어들면서 왕도귀족들이 향락적인 생활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그는 세습화원가문 출신으로 궁정귀족들과 연계된 생활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을 터이므로 그들의 취향과 속내를 속속들이 잘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언저리에 놀면서 여체미(女體美)에도 일가를 이룰 만큼 통달해 있었기에. 귀족들의 향락적인 감상안을 춘족시킬 수 있는 농도 짙은 여속도(女俗圖)를 타고난 예리한 솜씨를 발휘하여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남긴 여속도 중에서 이렇듯 한 인물을 대상으로 그려낸 것은 유일한 것이어서. 쥐면 부서질 듯한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아마도 혜원의 사람이었던 듯하다. 깃과 고름. 곁바대는 자주빛으로 하고. 끝동만은 옥색 천을 대어 멋을 부린 회장저고리는. 당시 유행의 첨단이었을 것이고. 윗단을 잣주름으로 촘촘히 주름잡고 허리밑을 불룩 키워서 숨막힐 듯 잘록한 세요(細腰)와, 탐스러운 둔부를 강조한 스란치마와. 곁바대 밑으로 살짝흘린 연지빛 속고름도 일류 멋장이가 아니면 부릴수 없는 색태(色態)였을 것이다.삼단같이 윤기있는 커다란 트레머리를 귀밑머리 하늘거리는 갸날픈 목으로 다소곳이 받쳐이고, 옥색 끝동 밖으로 내민 상아빛 손으로는, 연자주빛 수마노 노리개와 진자주빛 고름을 수줍은듯 매만지며.옥색 스란치마 밖으로 외씨 같은 버선발을 상큼하니 내민 모습은, 장안 한량들의 애간장을 남김없이 녹여 내었을 것이다. 갸날픈 이목구비에서는 야산에 홀로 핀 제비꽃처럼 청초한 맛이 있는가 하면. 겨드랑이 밑으로 흘린 속고름과 치마 밖으로 살그머니 내어민 외씨버선은. 선정적인 요염미를 물씬 풍기고 있어. 관연 어째서 수많은 장안 여인중 유독 이 이인을 화폭에 남겨 놓았는지 수긍이 갈 만하다.
김윤덕류 거문고 산조 / 진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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