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문정영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돌멩이 생김새만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
후박나무 잎은 후박나무 잎만큼 젖고
양귀비 꽃은 양귀비 꽃만큼 젖어서 후생이 생겨난다.
여름비는 풍성하여 다 적실 것 같은데
누운 자리를 남긴다.
그것이 살아가는 자리이고
다시 살아도 꼭 그만큼은 빈다.
그 크기가 무덤보다 작아서 비에 젖어 파랗다.
더 크게 걸어도
더 많이 걸어도
꼭 그만큼이라는데
앞서 빠르게 걸어온 자리가
그대에게 먼저 젖는다.
—《포엠포엠》 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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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1959년 전남 장흥 출생. 건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낯선 금요일』『잉크』.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만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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