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백(飛白) 외 2편
오탁번
수은주의 키가 만년필 촉만큼 작아진 오전 여덟시
싱그의 드라마를 읽으려고 가다가 그를 만났다
—47년 전에 쓴 「굴뚝소제부」의 첫머리다
간밤에 잣눈 내리고
아침 수은주가 영하 25도까지 내려갔다
만년필 촉의 비유를 쓴
젊은 날의 내가
나 같지 않다
맘대로 해도
법을 안 어기는
뉘엿뉘엿 어스름에
지팡이 그림자만
산 넘어간다
이냥저냥
희끗희끗
비백체(飛白體)로 몸을 떠는 소나무가
춥다
시인과 소설가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한 김동리가
서정주를 찾아가서
시를 한 편 썼다고 했다
시인은 뱁새눈을 뜨고 쳐다봤다
—어디 한번 보세나
김동리는 적어오진 않았다면서
한번 읊어보겠다고 했다
시인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다 읊기도 전에
시인은 무릎을 탁 쳤다
—기가 막히다! 절창이네그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단 말이제?
소설가가 헛기침을 했다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라네!
시인은 마늘쫑처럼 꼬부장하니 웃었다
—꼬집히면 벙어리도 운다고?
예끼! 이사람! 소설이나 쓰소
대추알처럼 취한 소설가가
상고머리를 갸우뚱했다
—와? 시가 안 됐노?
그 순간
시간이 딱 멈췄다
1930년대 현대문학사 한 쪽이
막 형성되는 순간인 줄은 땅띔도 못하고
시인과 소설가는
밤샘을 하며
코가 비뚤어졌다
찰람찰람 술잔이 넘쳤다
시집보내다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혜감(惠鑑),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몇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숫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지난 해 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온다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줬나?
줄잡아 몇만 평도 넘을 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었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 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김지헌 시집 보냈나?
—서석화 시집 보냈나?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거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시집『시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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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 대학원 국문과.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침의 豫言』『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손님』『우리 동네』『시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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