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비백(飛白) 외 2편 /오탁번

율카라마 2014. 4. 5. 09:49

비백(飛白) 외 2편

 

   오탁번

 

 

 

수은주의 키가 만년필 촉만큼 작아진 오전 여덟시

싱그의 드라마를 읽으려고 가다가 그를 만났다

—47년 전에 쓴 「굴뚝소제부」의 첫머리다

 

간밤에 잣눈 내리고

아침 수은주가 영하 25도까지 내려갔다

만년필 촉의 비유를 쓴

젊은 날의 내가

나 같지 않다

 

맘대로 해도

법을 안 어기는

뉘엿뉘엿 어스름에

지팡이 그림자만

산 넘어간다

 

이냥저냥

희끗희끗

비백체(飛白體)로 몸을 떠는 소나무가

춥다

 

 

 

시인과 소설가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한 김동리가

서정주를 찾아가서

시를 한 편 썼다고 했다

시인은 뱁새눈을 뜨고 쳐다봤다

—어디 한번 보세나

김동리는 적어오진 않았다면서

한번 읊어보겠다고 했다

시인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다 읊기도 전에

시인은 무릎을 탁 쳤다

—기가 막히다! 절창이네그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단 말이제?

소설가가 헛기침을 했다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라네!

시인은 마늘쫑처럼 꼬부장하니 웃었다

—꼬집히면 벙어리도 운다고?

예끼! 이사람! 소설이나 쓰소

대추알처럼 취한 소설가가

상고머리를 갸우뚱했다

—와? 시가 안 됐노?

 

그 순간

시간이 딱 멈췄다

1930년대 현대문학사 한 쪽이

막 형성되는 순간인 줄은 땅띔도 못하고

시인과 소설가는

밤샘을 하며

코가 비뚤어졌다

찰람찰람 술잔이 넘쳤다

 

 

 

시집보내다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혜감(惠鑑),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몇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숫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지난 해 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온다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줬나?

줄잡아 몇만 평도 넘을 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었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 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김지헌 시집 보냈나?

—서석화 시집 보냈나?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거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시집『시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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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 대학원 국문과.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침의 豫言』『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손님』『우리 동네』『시집보내다』.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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