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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왕(태조왕건 - 10대왕정종)

율카라마 2014. 5. 25. 12:10

1. 태조 [ 太祖,  877 ~ 943 ]

   고려 제1대왕 ( 재위  918년 ~ 943년 )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29명에 이르는 많은 후비(后妃)를 두었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2. 혜종 [ 惠宗,  912 ~ 945 ]

   고려 제2대왕 ( 재위  943년 ~ 945년 )

 

자는 승건(承乾), 휘(諱)는 무(武),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義和王后)이다. 태조는 궁예 휘하에서 나주를 정벌하고 그곳에 주둔할 때, 오씨를 만나 혼인하였다. 나주 오씨 집안의 세력은 권력이나 군사력을 갖지 못했으며 이러한 출신 배경으로 혜종은 후에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921년 박술희(朴述熙) 등의 도움으로 태자로 책봉된 뒤,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쳐서 공을 세웠다. 943년 태조가 죽자 즉위하였으나, 이복동생인 요(堯 : 뒤의 정종)와 소(昭 : 뒤의 광종)가 왕위를 엿보았다. 이 둘은 태조의 제3비 신명순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충주 지역 호족이었던 유경달(劉兢達)의 외손이었으며 충주 유씨는 혼인을 통해 여러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요와 소가 왕위에 도전하고 있음을 눈치챈 왕규는 945년(혜종 2)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으나 혜종은 요·소를 벌하지 않았다. 혜종이 요·소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불만을 품은 왕규는 왕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러한 왕권다툼 속에서 혜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945년 병으로 죽었다.

이어 이복동생 요가 왕위에 올랐는데, 혜종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사료에는 스스로 군신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와 있어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살해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젊어서부터 기질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지혜와 용맹이 뛰어났다고 한다.

능은 개성(開城)의 순릉(順陵)이다.

 

 

3. 정종 [ 定宗,  923 ~ 949 ]

   고려 제3대왕 ( 재위  945년 ~ 949년 )

 

자는 의천(義天), 이름은 요(堯), 시호는 문명(文明)이다. 태조(太祖)의 셋째 아들로, 923년(태조 6)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며,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혜종이 집권하던 시기에 왕위를 엿보았으며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를 제거하고 혜종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왕식렴(王式廉) 등의 도움을 받아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던 왕규(王規)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이 호응하지 않는 등 여전히 왕권이 확립되지는 않았다.

불교를 장려할 목적으로 946년 양곡 7만 석을 내어 여러 사원(寺院)에 불명경보(佛名經寶)·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는 등 불교 중흥에 힘썼고, 947년에는 서경성(西京城:평양성)을 쌓고 도참설(圖讖說)에 따라 그곳으로 천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경천도 계획에 개경의 호족들이 반발하였으며 역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도 컸다. 947년 후진에 유학하다 거란에 붙잡혀 그곳에서 벼슬하던 최광윤이 고려에 사신으로 와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라는 보고를 듣고 광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948년 9월, 동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치자, 직접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자기 닥친 우레와 천둥 소리에 놀라 경기가 든 이후 계속 병석에 있다가 이듬해 3월에 죽었다.

능은 개성의 안릉(安陵)이다.

 

 

4. 광종 [ 光宗,  925 ~ 975 ]

   고려 제4대왕 ( 재위  949년∼975년 )

 

자는 일화(日華), 휘는 소(昭), 시호는 대성(大成)이다. 태조 왕건(王建)의 넷째 아들이고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大穆皇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한 뒤에 그 영명(英明)함을 바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즉위한 후, 국초에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공역자를 정해 차등을 두어 쌀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함이다.

950년(광종 1)에는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의식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951년(광종 2)에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후주와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 연호를 다시 정하여 ‘준풍(峻豊)'이라 하였다가(960~963), 송나라와 국교를 연 후에는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乾德)'을 사용하였다(963~968).

956년에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선별하여 노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은 호족에게 귀속되던 세(稅)를 국가에 환원시키고 호족의 사병(私兵)을 감소시킴으로써 호족의 약화와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958년에는 후주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는 능력을 갖춘 새로운 관료층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백관의 복제(服制)를 제정하여 관료의 서열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수도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 즉 평양을 서도(西都)라고 하였다.

960년에는 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광종은 이들을 귀양 보냈으며 이때부터 참소하는 사람이 많아 옥이 가득차 임시 감옥을 두었으며 죄없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이 시기부터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숙청으로 광종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위화(威化)·무주(撫州)·안삭(安朔)·습홀(濕忽)·송성(松城)·낙릉(樂陵)·운주(雲州)·신도(信都)·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박평(博平)·고주(高州)·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축성하였다.

능호(陵號)는 헌릉(憲陵)이다.

 

 

5. 경종 [ 景宗,  955 ~ 981 ]

   고려 제5대왕 ( 재위  975년∼981년 )

 

휘(諱) 유(伷). 자 장민(長民). 광종의 장남. 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 비(妃)는 신라 경순왕의 딸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金氏), 문원대왕의 딸 헌의왕후(獻懿王后) 유씨(劉氏), 대종(戴宗) 욱(旭)의 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헌정왕후(獻貞王后) 두 자매, 원장태자의 딸 대명궁부인(大明宮夫人) 유씨(柳氏)이다. 9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즉위하자 경종은 사면령을 내리고 광종 대에 억울하게 죽은 자의 자손에 복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살육전이 일어나고 집정(執政)을 맡은 왕선(王詵)은 태조의 아들인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경종은 왕선을 귀양보내고 복수법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순질(筍質)과 신질(申質)을 각각 좌우집정(左右執政)으로 삼고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했다. 집정제를 좌·우집정제로 바꾼 것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됨을 막기 위해서였다. 내사령은 왕명을 출납하던 관직으로 좌·우집정을 내사령으로 겸하게 한 것은 왕명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집정을 왕이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976년에는 전시과(田柴科)를 제정하였다. 이는 고려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977년에는 과거를 재개하였다. 980년에는 정계에 복귀한 최지몽이 왕승(王承)의 모반을 예견하여 제거하였다.

뒤에 정치를 등한시하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소인(小人)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군자(君子)를 멀리하였다.  태평(太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시호는 헌화(獻和)이며

능은 영릉(榮陵)이다.

 

 

6. 성종 [ 成宗,  960 ~ 997 ]

   고려 제6대왕 ( 재위  981년∼997년 )

 

휘(諱) 치(治). 자 온고(溫古). 시호 문의(文懿). 태조의 손자. 어머니는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 981년(경종 6)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정치·사회·문화 제도 전반을 정비하여 고려왕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된다.

성종의 내치 중에서는 관제개혁을 들 수 있는데, 거유(巨儒) 최승로(崔承老)의 자문을 받아, 유교를 국가의 지도원리로 삼고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를 확립하였다. 관제개혁에 있어 중앙에 3성(省)과 6부(部)를 두었으며, 서무를 분장(分掌)한 7시(寺)를 설치하였다. 또 언론(言論)을 맡은 사헌부(司憲府), 군국(軍國)의 기밀기관인 중추원(中樞院) 등을 두었다.

한편 지방에는 처음에 12목(牧)을 설치하였으나 후에 10도(道)·12주(州)로 나누어 다스렸다. 또 권농정책에 힘썼다. 993년(성종 12)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요(遼)나라의 군대가 고려에 침입하자 서희(徐熙)를 요군(遼軍)의 진영에 보내서 외교담판으로 요나라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후에 여진족(女眞族)이 차지하고 있던 지금의 평북 일대, 즉 장흥(長興)·귀화(歸化)·곽주(郭州)·구주(龜州)·안의(安義)·흥화(興化)·선주(宣州) 등에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능은 개성의 강릉(康陵)이다.

 

 

7. 목종 [ 穆宗,  980 ~ 1009 ]

   고려 제7대왕 ( 재위  997년∼1009년 )

 

이름 송(誦). 자 효신(孝伸). 시호 선양(宣讓). 경종(景宗)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990년(성종 9) 개령군(開寧君)에 봉해졌는데, 997년에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모후(母后)를 천추태후(千秋太后)로 존칭했다. 관리의 봉급제도인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김치양과 함께 음모, 후계자인 왕의 당숙(堂叔)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승려로 만들어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간파한 목종은 서경(西京)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康兆)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하였으나, 강조에 의해 폐위되어 충주(忠州)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는데, 그가 즉 제8대 왕 현종(顯宗)이다.

능은 공릉(恭陵)이다.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 문헌에는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와 있다.

 

 

8. 현종 [ 顯宗,  992 ~ 1031 ]

   고려 제8대왕 ( 재위  1009년 ~ 1031년 )

 

자 안세(安世). 휘(諱) 순(詢). 시호 원문(元文). 태조의 여덟째 아들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 어머니는 경종의 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孝肅太后).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追尊王)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처음에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12세 때 천추태후(千秋太后:경종비 헌애왕후)의 강요로 숭경사(崇敬寺)에 들어갔다.

1006년(목종 9)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졌으며,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해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 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강조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참패하고, 다음해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남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왕이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성(城)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1018년 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하였으나,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의 뛰어난 전술로 구주(龜州)에서 섬멸하여 물리쳤다(龜州大捷).

다음해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사치와 호화로운 의식·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기하였다.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여 폐지된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키고, 선유(先儒)를 존숭하는 뜻에서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을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한국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또한,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제작에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였다. 지방 관제를 합리적으로 조절하기 위하여 12주의 절도사(節度使)를 폐하고, 5도호부(都護府) 75도(道)에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다시 이를 폐하여 4도호부·8목(牧)·56지주(知州)·56군사(郡事)·18진장(鎭將)·20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사심관(事審官)의 선출을 엄격히 하였다.

능은 경기 개풍군의 선릉(宣陵)이다.

 

 

9. 덕종 [ 德宗,  1016 ~ 1034 ]

   고려 제9대왕 ( 재위  1031년∼1034년 )

 

자 원량(元良). 시호 경강(敬康). 이름 흠(欽). 현종(顯宗)의 장남으로 모후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1022년(현종 13) 태자로 책봉되고, 1031년에 즉위하였다. 그후 거란(契丹)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이 압록강에 가설한 부교(浮橋) 및 보성(保城)을 파괴할 것과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였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삭주(朔州) ·영인진(寧仁鎭) ·파천(派川)에 축성하였다.

이듬해 8월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압록강구로부터 영원(永遠)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까지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성하게 하자 동여진인(東汝眞人)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처음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실시하고, 왕가도를 감수국사(監修國史)로, 황주량을 수국사(修國史)로 삼아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능은 숙릉(肅陵)으로 개성(開城)에 있다.

 

 

10. 정종 [ 靖宗,  1018 ~ 1046 ]

   고려 제10대왕 ( 재위  1034년 ~ 1046년 )

 

자 신조(申照). 휘(諱) 형(亨). 시호 용혜(容惠). 현종(顯宗)의 둘째 아들. 덕종(德宗)의 동생. 어머니는 원성왕후(元成王后) 김씨(金氏). 비(妃)는 용신왕후(容信王后) 한씨(韓氏), 용의왕후(容懿王后) 한씨, 용목왕후(容穆王后) 이씨(李氏). 1022년(현종 13) 내사령(內史令)에 올라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으며, 1027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1034년(덕종 3) 덕종이 죽자 즉위하여 명주성(溟州城)을 수축, 이듬해 북계(北界)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을 수축하고, 또 창주(昌州:平北 昌城)에도 성을 쌓았다. 1036년 각 도의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고 여러 위(衛)의 군인 중 경전이 부족한 자에게는 공전(公田)을 더 주었다. 1037년 거란(契丹)의 침입을 받고 다음해부터 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044년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완성시켰다. 또 예성강(禮成江)의 병선(兵船) 180척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州鎭)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국방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듬해 비서성(祕書省)으로 하여금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1046년 장자상속과 적서(嫡庶)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다.

능은 개성(開城)의 주릉(周陵)이다.

출처 : 벽진이씨(碧珍李氏)
글쓴이 : 늘푸른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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