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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한국시인협회 김종철 회장 7월 5일 오후 7시께 지병으로 별세. [시집 깊이 읽기] 김종철 시선집 《못과 삶과 꿈》 / 정효구

율카라마 2014. 7. 11. 09:00

[시집 깊이 읽기]
[시집 깊이 읽기] 김종철 시선집 《못과 삶과 꿈》 / 정효구
고백 혹은 고해성사로서의 시 쓰기
   

   

못과 삶과 꿈
저자 김종철 | 출판사 시월

 1. 시선집과 핵심 감정

   어느 시선집이든 시선집 속의 시들은 이미 구면이다. 따라서 시 자체가 주는 신선함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집이, 특히 자선 시선집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속에 시인의 심리적, 미학적 메커니즘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한 시인이 자신의 시 전체를 앞에 놓고 취사선택을 하는 일, 경중을 가리는 일, 순서를 배열하는 일 등은 이미 그의 심리적 성향과 가치판단의 문제를 내재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의 시선집 《못과 삶과 꿈》은 이미 구면인 그의 시작품 속에서 낯선 시인의 속내를 찾아볼 수 있는 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이 시선집이 활판인쇄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물리적 사실은 크게 부각될 일이 아니거나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김종철의 시선집 《못과 삶과 꿈》 속엔 그의 속내를 드러내는 어떤 핵심 감정이 숨어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핵심 감정이란 한 인간의 삶과, 한 시인의 시를 지배하는 구조적 틀이자 심리적 응결체이다. 시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이 핵심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거니와, 김종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김종철의 시에서 나는 자녀의식, 학생의식, 막내의식 등을 그의 핵심감정으로 읽는다.

   거칠게 말한다면 그의 모든 시는 이와 같은 의식의 필터를 거친 변주물들이다. 그런 그의 의식의 상대편에는 부모, 선생, 보호자 등이 존재하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이들은 하느님, 절대자, 예수, 신부, 수녀,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아내 등과 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2. 어머니의 빈 젖꼭지 빨기

   김종철의 시를 읽는 데 있어서 ‘어머니’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존재이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관심은 애정을 넘어 애착에 가깝고, 어느 때는 애착을 넘어 하나의 ‘개인적 현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극복해야 할 존재이다. 어머니를 극복하지 않는 한, 어머니는 한 개인으로서의 자식의 삶을 수시로 간섭하고 왜곡시킬 위험성을 크게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어머니는 생물학적 관계 속의 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 정서적, 윤리적, 관습적 관계 속의 구성적 상(相)으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종철은 언제나 이러한 어머니의 ‘자녀’이다. 그는 어머니를 넘어서지 않고 어머니 아래 혹은 그 속에 있다. 그의 자녀의식의 원천을 보여주는 대표작이 〈어머니의 젖꼭지―초또마을 시편 10〉인데 그는 이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머니 젖을 오래도록 빨았습니다
      빈 젖꼭지라도 물지 않고서는 견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막내라고 나를 달고 다녔습니다

      큰형님이 장가를 가고
      이듬해 형수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불어터진 젖을 짜내고 또 짜내었지만
      비 온 뒤 시냇물 불어나듯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날 밤 희끄무레한 호롱불 아래
      치마폭 어디메쯤 어색하게 안긴 나는
      퉁퉁 부은 젖통을 쥐고 빨고 또 빨았습니다
      어깨 너머 어머니는 자주 칭찬을 하였습니다
      꿀꺽꿀꺽 쏟아져 나오는 젖에
      몇 번이나 길게 숨을 고르기도 하였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야 볼 수 있는 꽃!
      간밤에도 밤도둑처럼 아내의
      앞섶을 풀다가 주책없다 야단맞았습니다
                ―〈어머니의 젖꼭지―초또마을 시편 10〉 전문


   어머니, 어머니의 젖, 그 어머니의 빈 젖꼭지, 어머니의 대리물인 큰형수의 불은 젖 빨기, 어머니의 칭찬, 아내의 젖 훔치기, 그 아내에게 야단맞기, 어머니와 막내만의 밀착, 이와 같은 것이 위 시의 핵심을 이루는 표상이다. 어머니의 실재, 그러나 어머니의 결핍과 부재, 그 어머니에 대한 갈증, 아직도 ‘숨이 턱까지 차야 볼 수 있는’ 젖 빨기의 포만감에 대한 갈망, 그것을 그리워하는 한 어린 자녀의식이 위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김종철은 위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어머니의 칭찬과 아내의 야단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즐긴다. 그에게 칭찬과 야단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순종적인 유아적 자녀의식 가운데서도 막내의식의 한 발현 양상이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어머니의 젖꼭지 빨기는 형수와 아내의 그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어머니와 나 사이의 그 틈 없는 상상계적 시간에서의 온전한 나르시시즘적 충족은 자크 라캉이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하는 금기 이전의 쾌락적 세계이며, 분리된 사회 이전의 전일적 자리이기 때문이다.

   김종철의 어머니는 바로 이 세계이자 자리에 있다. 자식에게 ‘젖’으로 표상되는 삶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권력적 실체이자 무한애정의 존재인 그 상상계적 시간 속의 어머니, 그 어머니를 김종철은 지금까지 찾고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막내는 어머니에 대한 심리적 결여와 과잉이라는 양극단을 체험한다. 형과 누나가 남긴 잔여로서의 모유를 먹어야 하는 것이 막내이며, 동시에 어머니는 물론 형과 누나까지도 모성이 되어 과도한 애정을 보내는 자리가 막내이다.

   김종철에게서 이런 자녀의식이자 막내의식은 그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 신부, 수녀 등은 물론 그의 아내에게까지 향하고 있다. 가령 〈도시락 일기〉라는 시를 보면, 남편인 시인은 아내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다. “서툰 나의 처세를/ 아내는 자반고등어 한 손처럼/ 꼬옥 안아 줍니다” “자주 제 손등 찧는 못난 나를/ 아내는 꿈속에서도 도시락 싸듯 달려옵니다”와 같은 부분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김종철은 나이 40이 넘도록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어린이가 ‘자랑하듯’ 시로 들려주고 있다. 〈엄마 엄마 엄마―못에 관한 명상 36〉이라는 작품이 그것인데, 여기서 김종철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정을 들여다보며 “엄마 엄마 엄마, 엄마 하고 불러본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엄마 하면 밥 주고/ 엄마 하면 업어 주고 씻겨 주”었던 존재였음에 감동한다. 이 점 역시 그의 상상계적 어머니상의 갈망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그리고 그의 유아의식으로서의 자녀의식이자 막내의식을 보여주는 한 부분이다.

3. ‘수녀님’에게 영세명 받기

   김종철에게 가톨릭의 수녀는 ‘수녀님’이다. 그것은 그가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수녀님’에 대한 그의 의심 없는 존경과 의지는, 어머니에 대해 그가 그랬던 것처럼 확고하고 한결같다.

   일반적으로 수녀, 비구니 등과 같은 여성 출가자는 출가함으로써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기적이고 중생심을 따라 움직이는 소아의 집을 ‘출가(出家)’함으로써 그들은 자리이타(自利利他)적이고 우주적인 만인의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때의 대아(大我)적인 어머니는 세속사회의 상징계적 어머니와 구분되는 상상계의 어머니이며 우주법계와 같은 실재계의 어머니이다.

   김종철의 시에서 ‘수녀님’은 그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든든한 보호자이다. 김종철에게 ‘수녀님’은 이해관계를 따지는 중생심의 세속 어머니와 다른 ‘위대한 어머니’이다. 그 위대한 어머니에게서 김종철은 상상계적 욕구와 실재계적 욕구를 함께 충족시킨다.

   김종철의 시선집 《못과 삶과 꿈》의 서문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어린 시절 영세 교리 전담 수녀님이 장난꾸러기인 나에게 망치로 박은 못과 그 못자국으로 죄와 벌을 설명했습니다. 참으로 딱했습니다. 수녀님은 베드로, 미카엘 같은 세례명보다 아오스딩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주었습니다. 아오스딩이 누구냐고 볼멘소리로 물었더니 시인이라고 했습니다. 시인? 속으로 삐죽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람둥이이며 제 어머니 눈물을 쏙 빼게 한 고백록의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수녀님’은 김종철 시인에게 세례명을 지어준 사람이다. 그는 ‘수녀님’을 통해 개명을 한 것이다. 개명을 하였다는 것은 불교의 석가모니의 가문에 들어온 사람이 옛 성을 버리고 ‘석(釋)’씨를 택하듯, 그가 믿는 하느님의 가문에 입적(入籍)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김종철은 어머니의 김종철이자 하느님의 아오스딩이 된 것이다.

   이 하느님의 동일자로 ‘수녀님’이 있고, 그 수녀님에게 김종철은 학생이자 자녀와 같은 존재이다. 김종철은 ‘수녀님’으로부터 영세를 위한 ‘교리’를 배웠고, 그 ‘교리’가 삶과 시의 원형 상징이 되었으며, ‘수녀님’을 통해 이름까지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수녀님’에게 김종철은 의심을 품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수녀님은 그에게 세속적 생각을 낼 수 없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며, 구체적으로 “바람둥이이며 제 어머니 눈물을 쏙 빼게 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자신의 대모(代母)이자 성모이다.

   가족 은유는 인간들의 삶에서 기초를 이룬다. 종교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김종철이 믿는 가톨릭에서도 가족은유는 근간을 이루고 있다. 성모니, 대모니, 하느님 아버지니, 하느님의 자녀니, 믿음의 형제자매니 하는 말들은 모두 가족은유의 산물이다. 가족은유가 사용되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거친 상징계적 사회 속의 냉정한 이해관계와 금기의 긴장을 풀고 안온한 상상계적 만족을 얻는다.

   가족이란 본래 그 안에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거대한 세속사회 이전의 독특한 사회로서 상상계적 만족이 구현되는 장소이다. 하느님의 가문을 이와 같은 가족은유로 상상하며,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 속에서 상상계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대보호자인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무조건적 보호와 보살핌 그리고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김종철은 이와 같은 가족은유의 하느님 가문 속에서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배웠다. 그 의식은 앞서 말한 학생의식, 자녀의식, 막내의식 등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그의 시선집 《못과 삶과 꿈》의 서문에 있는 “처음으로 시선집을 엮습니다. 100편의 시를 뽑았지만 일백 번 죄짓고 쓴 것처럼 부끄럽기만 합니다.”라는 말 속에서, 그리고 앞서 인용한 영세 교리 배우기의 체험과 기억을 담은 문장에서 만나 볼 수 있다.

4. 성부(聖父) 혹은 ‘신부(神父)님’에게 고해성사하기

   김종철의 죄의식과 부끄러움은 기도 혹은 고백성사의 문제와 닿아 있다. 그의 시 속엔 기도의 장면과 기도의 언어가 적지 않고, 특히 고백성사의 시편은 인상적이다.

   기도와 고백성사가 이루어지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기도와 고백성사를 받을 만한 절대적 존재나 그에 준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그를 따르는 선한 순종의식이 있어야 한다.


      나는 울보입니다
      그냥 우는 게 아니라 징징징 짜는데
      온 가족들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보채면 다 들어주었습니다
      우는 아이 젖 더 준다는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돈 없다, 밥 없다, 색시 없다
      어른 되어서도 징징징 매달렸습니다
      하느님도 별수 없이 손발을 들고
      어느 날 도깨비 방망이를 던져 주며
      눈물, 뚝!
      외쳤습니다
      뚝!
      한 번도 보챈 적 없습니다
      그저 까꿍까꿍,
      못으로 숨고 싶습니다
                 ―〈울보 기도―초또마을 시편 14〉의 전문

   ‘가족― 하느님’으로 이어지는 절대적 믿음의 대상에게 시인은 ‘보채고’ ‘매달렸’다고 고백한다. 그것도 그냥 보채고 매달린 것이 아니라 ‘징징징’ 짜면서 ‘울보’가 되어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스스로 ‘울보 기도’라고 이름 붙인 그의 기도에서 가족과 하느님은 떼쟁이 자녀에게 모른 척 진다. 알고도 지는 이 게임에서 막내의식의 자녀는 욕구가 충족되고, 그 충족된 1차적 욕구 위에서 그는 점차 성인으로 옮아간다.

   그러나 그가 성인의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 되기를 자처한다. 고백성사가 바로 그것이거니와, 그는 자신의 내적 ‘애응지물(碍膺之物)’이자 트라우마를 이런 자녀의식으로서의 고백성사를 통해 해결한다.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않은 못 하나가
      말 어쩔 수 없이 숨겨 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고백성사―못에 관한 명상 1〉 전문

   못, 성당, 고백성사, 아내, 부끄러움 등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위 시에는 김종철의 김종철다움이 거의 다 들어 있다. 그는 못이라는 기독교적이며 일상적인 상징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였고, 그가 머물고 싶은 곳으로 성스러운 집으로서의 성당을 찾고자 하였으며, 애응지물을 해결하고자 하는 자녀의식으로서의 고백성사의 방식을 택하였고, 보호자와 동일체인 아내를 옆에 두고 있으며, 부끄러움이라는 학생의식을 여전히 마음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성사를 하는 위 시의 화자는 ‘울보기도’를 하던 이전의 욕구 충족적 기도에 비하면 한층 성숙한 모습의 기도를 하고 있다. 그의 기도는 채우던 기도에서 비우는 기도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못 뽑기’라는 자아성찰과 자아완성의 길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못 뽑기’로서의 기도 또한 성부(聖父)와 ‘신부님’을 앞에 두고 이루어지는 고백성사의 형태라는 점과, 고백성사라는 ‘신― 자아’ 사이의 단독 대면의 현장에까지 아내를 대동하고 있다는 점은 특징적이다. 말하자면 그의 뿌리 깊은 자녀의식과 막내의식 그리고 학생의식이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김종철은 ‘수녀님’에게 그랬듯이 ‘신부님’에게도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신부님은 그에게 성가족의 대부(代父)이다. 그는 이런 ‘신부님’을 ‘우리 신부님’이라고 자주 부른다. ‘우리’라는 말의 심층이 여기서 중요하다. 그에게 ‘신부님’은 그냥 ‘신부님’이 아니라 “우리 신부님을 보고 있으면/ 헐벗고 집 없어 걱정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밥에 대하여 1〉)와 같은 표현에서 보이듯이 ‘우리’ 속의 가족의식을, 그의 자녀의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철에겐 혈육적인 친부(親父)도 그의 자녀의식을 자극한다. 일찍 세상을 뜬 친부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비중밖에 차지하지 못하지만, 그가 친부에게 보내는 자녀로서의 심리적 기제는 다르지 않다.

   성부(聖父)와 신부(神父)가 있을 때 우리는 걱정할 일이 없다. 그들은 전지, 전능, 전선한 주재자이고, 의지처이며,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도, 신부도, 우리 자신이 ‘등신불(김종철의 제4시집이 《등신불 시편》임)’처럼 주인공으로 소신공양 속에서 중생(重生)하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의 삶을 간섭하고 제약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간섭과 제약은 성부와 신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만드는 업이다.

   김종철의 시에서 그의 의식적 변화를 보여줄 가능태로 존재하는 시집은 《등신불 시편》과 《오늘이 그날이다》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철학적이며 지적인 시간론을 탐구한 시집 《오늘이 그날이다》에서조차도 그가 시간에 대해 물어볼 때는 ‘어머니’를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가 이제 어머니를 떠나기를 바란다. 사적 어머니에서 공적 어머니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가족 울타리에서 우주 속으로 가출하기를 바란다. 어머니도 가족도 우리가 최초로 만난 세계이지만,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최후로 떠나야 할 세계이다.

5. ‘ ―습니다’ 체의 사용과 남는 문제

   김종철의 시선집 《못과 삶과 꿈》 속의 많은 작품들이 ‘―습니다’ 체를 구사하고 있다. ‘―습니다’ 체는 겸양 어법이자 존경 어법이므로 듣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거부감은커녕, 공격성의 제거에 따르는 문체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과 안심을 안겨준다.

   따라서 ‘―습니다’ 체는 쓰기에 따라 상당히 훌륭한 심리적 효용성을 가져올 수 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면서도 자신을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자리에 놓는 어법, 그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말하는 자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마음을 내도록 하기 쉽다.

   김종철의 시 속에서 ‘―습니다’ 체는 이런 효과를 상당히 발휘하고 있다. 그의 시가 주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진지하게 만들고 있으며,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무게감 있게 듣도록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의 ‘―습니다’ 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위와 같은 사실과 더불어 이 문체 속에 그의 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습니다’ 체 속에 그가 지닌 착한 자녀의식, 학생의식, 막내의식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때의 이런 의식은 어머니, 성부, 신부, 수녀 등과 같은 대보호자뿐만 아니라 독자 전체를 향하는 듯하다. 그는 독자들에게 ‘―습니다’ 체를 통하여 자신을 자녀나 학생처럼 고백하고 있다.

   내가 그의 시를 읽으며 그의 보호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런 문체 탓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장녀의식’이 그의 ‘막내의식’과 결부된 투사적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습니다’ 체는 한 번쯤 탐구될 필요가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일시에 무장해제를 시키는 그 자발적 ‘―습니다’체의 비공격성과 공손함은 앞서 논한 그의 의식세계와 어울려 매우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철은 고향을 떠나 서울시편(《서울의 유서(遺書)》)을 써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고향시편(《못의 귀향》)을 쓰는 데까지 나아갔다. 고향은 탈향자가 육십갑자의 회갑처럼 한 번쯤 찾아가야 할 생의 원점이다. 그러나 그때의 고향은 유년의 고향이 아니라 이미 생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한 차례 돌린 자가 찾아가는 고향이라는 점에서 질적 차이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때의 고향은 귀향의 세계가 아니라, 그의 이번 시선집 발문을 쓴 김재홍의 말처럼 회향(回向)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회향은 어머니를 극복할 때, 그리고 보호자를 넘어설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착한 자녀나 신자이기보다는 지혜로운 자유인이나 담대한 창조적 파괴의 모험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못의 귀향’으로 생의 원점을 찾아간 김종철의 이후 세계를 기대해본다. (*)

 

 

             —《유심》2009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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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구/1958년 출생. 1985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저서로 《우주공동체와 문학의 길》 《상상력의 모험》 《몽상의 시학》 《시읽는 기쁨1-3》 《한국현대시와 평인의 사상》 등 다수. 대한민국문학상(신인상) 시와시학상 수상. 현재,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김종철 시선집 《못과 삶과 꿈》 / 정효구
고백 혹은 고해성사로서의 시 쓰기
   

   

못과 삶과 꿈
저자 김종철 | 출판사 시월

 1. 시선집과 핵심 감정

   어느 시선집이든 시선집 속의 시들은 이미 구면이다. 따라서 시 자체가 주는 신선함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집이, 특히 자선 시선집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속에 시인의 심리적, 미학적 메커니즘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한 시인이 자신의 시 전체를 앞에 놓고 취사선택을 하는 일, 경중을 가리는 일, 순서를 배열하는 일 등은 이미 그의 심리적 성향과 가치판단의 문제를 내재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의 시선집 《못과 삶과 꿈》은 이미 구면인 그의 시작품 속에서 낯선 시인의 속내를 찾아볼 수 있는 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이 시선집이 활판인쇄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물리적 사실은 크게 부각될 일이 아니거나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김종철의 시선집 《못과 삶과 꿈》 속엔 그의 속내를 드러내는 어떤 핵심 감정이 숨어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핵심 감정이란 한 인간의 삶과, 한 시인의 시를 지배하는 구조적 틀이자 심리적 응결체이다. 시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이 핵심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거니와, 김종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김종철의 시에서 나는 자녀의식, 학생의식, 막내의식 등을 그의 핵심감정으로 읽는다.

   거칠게 말한다면 그의 모든 시는 이와 같은 의식의 필터를 거친 변주물들이다. 그런 그의 의식의 상대편에는 부모, 선생, 보호자 등이 존재하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이들은 하느님, 절대자, 예수, 신부, 수녀,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아내 등과 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2. 어머니의 빈 젖꼭지 빨기

   김종철의 시를 읽는 데 있어서 ‘어머니’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존재이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관심은 애정을 넘어 애착에 가깝고, 어느 때는 애착을 넘어 하나의 ‘개인적 현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극복해야 할 존재이다. 어머니를 극복하지 않는 한, 어머니는 한 개인으로서의 자식의 삶을 수시로 간섭하고 왜곡시킬 위험성을 크게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어머니는 생물학적 관계 속의 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 정서적, 윤리적, 관습적 관계 속의 구성적 상(相)으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종철은 언제나 이러한 어머니의 ‘자녀’이다. 그는 어머니를 넘어서지 않고 어머니 아래 혹은 그 속에 있다. 그의 자녀의식의 원천을 보여주는 대표작이 〈어머니의 젖꼭지―초또마을 시편 10〉인데 그는 이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머니 젖을 오래도록 빨았습니다
      빈 젖꼭지라도 물지 않고서는 견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막내라고 나를 달고 다녔습니다

      큰형님이 장가를 가고
      이듬해 형수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불어터진 젖을 짜내고 또 짜내었지만
      비 온 뒤 시냇물 불어나듯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날 밤 희끄무레한 호롱불 아래
      치마폭 어디메쯤 어색하게 안긴 나는
      퉁퉁 부은 젖통을 쥐고 빨고 또 빨았습니다
      어깨 너머 어머니는 자주 칭찬을 하였습니다
      꿀꺽꿀꺽 쏟아져 나오는 젖에
      몇 번이나 길게 숨을 고르기도 하였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야 볼 수 있는 꽃!
      간밤에도 밤도둑처럼 아내의
      앞섶을 풀다가 주책없다 야단맞았습니다
                ―〈어머니의 젖꼭지―초또마을 시편 10〉 전문


   어머니, 어머니의 젖, 그 어머니의 빈 젖꼭지, 어머니의 대리물인 큰형수의 불은 젖 빨기, 어머니의 칭찬, 아내의 젖 훔치기, 그 아내에게 야단맞기, 어머니와 막내만의 밀착, 이와 같은 것이 위 시의 핵심을 이루는 표상이다. 어머니의 실재, 그러나 어머니의 결핍과 부재, 그 어머니에 대한 갈증, 아직도 ‘숨이 턱까지 차야 볼 수 있는’ 젖 빨기의 포만감에 대한 갈망, 그것을 그리워하는 한 어린 자녀의식이 위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김종철은 위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어머니의 칭찬과 아내의 야단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즐긴다. 그에게 칭찬과 야단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순종적인 유아적 자녀의식 가운데서도 막내의식의 한 발현 양상이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어머니의 젖꼭지 빨기는 형수와 아내의 그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어머니와 나 사이의 그 틈 없는 상상계적 시간에서의 온전한 나르시시즘적 충족은 자크 라캉이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하는 금기 이전의 쾌락적 세계이며, 분리된 사회 이전의 전일적 자리이기 때문이다.

   김종철의 어머니는 바로 이 세계이자 자리에 있다. 자식에게 ‘젖’으로 표상되는 삶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권력적 실체이자 무한애정의 존재인 그 상상계적 시간 속의 어머니, 그 어머니를 김종철은 지금까지 찾고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막내는 어머니에 대한 심리적 결여와 과잉이라는 양극단을 체험한다. 형과 누나가 남긴 잔여로서의 모유를 먹어야 하는 것이 막내이며, 동시에 어머니는 물론 형과 누나까지도 모성이 되어 과도한 애정을 보내는 자리가 막내이다.

   김종철에게서 이런 자녀의식이자 막내의식은 그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 신부, 수녀 등은 물론 그의 아내에게까지 향하고 있다. 가령 〈도시락 일기〉라는 시를 보면, 남편인 시인은 아내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다. “서툰 나의 처세를/ 아내는 자반고등어 한 손처럼/ 꼬옥 안아 줍니다” “자주 제 손등 찧는 못난 나를/ 아내는 꿈속에서도 도시락 싸듯 달려옵니다”와 같은 부분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김종철은 나이 40이 넘도록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어린이가 ‘자랑하듯’ 시로 들려주고 있다. 〈엄마 엄마 엄마―못에 관한 명상 36〉이라는 작품이 그것인데, 여기서 김종철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정을 들여다보며 “엄마 엄마 엄마, 엄마 하고 불러본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엄마 하면 밥 주고/ 엄마 하면 업어 주고 씻겨 주”었던 존재였음에 감동한다. 이 점 역시 그의 상상계적 어머니상의 갈망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그리고 그의 유아의식으로서의 자녀의식이자 막내의식을 보여주는 한 부분이다.

3. ‘수녀님’에게 영세명 받기

   김종철에게 가톨릭의 수녀는 ‘수녀님’이다. 그것은 그가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수녀님’에 대한 그의 의심 없는 존경과 의지는, 어머니에 대해 그가 그랬던 것처럼 확고하고 한결같다.

   일반적으로 수녀, 비구니 등과 같은 여성 출가자는 출가함으로써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기적이고 중생심을 따라 움직이는 소아의 집을 ‘출가(出家)’함으로써 그들은 자리이타(自利利他)적이고 우주적인 만인의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때의 대아(大我)적인 어머니는 세속사회의 상징계적 어머니와 구분되는 상상계의 어머니이며 우주법계와 같은 실재계의 어머니이다.

   김종철의 시에서 ‘수녀님’은 그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든든한 보호자이다. 김종철에게 ‘수녀님’은 이해관계를 따지는 중생심의 세속 어머니와 다른 ‘위대한 어머니’이다. 그 위대한 어머니에게서 김종철은 상상계적 욕구와 실재계적 욕구를 함께 충족시킨다.

   김종철의 시선집 《못과 삶과 꿈》의 서문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어린 시절 영세 교리 전담 수녀님이 장난꾸러기인 나에게 망치로 박은 못과 그 못자국으로 죄와 벌을 설명했습니다. 참으로 딱했습니다. 수녀님은 베드로, 미카엘 같은 세례명보다 아오스딩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주었습니다. 아오스딩이 누구냐고 볼멘소리로 물었더니 시인이라고 했습니다. 시인? 속으로 삐죽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람둥이이며 제 어머니 눈물을 쏙 빼게 한 고백록의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수녀님’은 김종철 시인에게 세례명을 지어준 사람이다. 그는 ‘수녀님’을 통해 개명을 한 것이다. 개명을 하였다는 것은 불교의 석가모니의 가문에 들어온 사람이 옛 성을 버리고 ‘석(釋)’씨를 택하듯, 그가 믿는 하느님의 가문에 입적(入籍)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김종철은 어머니의 김종철이자 하느님의 아오스딩이 된 것이다.

   이 하느님의 동일자로 ‘수녀님’이 있고, 그 수녀님에게 김종철은 학생이자 자녀와 같은 존재이다. 김종철은 ‘수녀님’으로부터 영세를 위한 ‘교리’를 배웠고, 그 ‘교리’가 삶과 시의 원형 상징이 되었으며, ‘수녀님’을 통해 이름까지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수녀님’에게 김종철은 의심을 품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수녀님은 그에게 세속적 생각을 낼 수 없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며, 구체적으로 “바람둥이이며 제 어머니 눈물을 쏙 빼게 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자신의 대모(代母)이자 성모이다.

   가족 은유는 인간들의 삶에서 기초를 이룬다. 종교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김종철이 믿는 가톨릭에서도 가족은유는 근간을 이루고 있다. 성모니, 대모니, 하느님 아버지니, 하느님의 자녀니, 믿음의 형제자매니 하는 말들은 모두 가족은유의 산물이다. 가족은유가 사용되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거친 상징계적 사회 속의 냉정한 이해관계와 금기의 긴장을 풀고 안온한 상상계적 만족을 얻는다.

   가족이란 본래 그 안에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거대한 세속사회 이전의 독특한 사회로서 상상계적 만족이 구현되는 장소이다. 하느님의 가문을 이와 같은 가족은유로 상상하며,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 속에서 상상계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대보호자인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무조건적 보호와 보살핌 그리고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김종철은 이와 같은 가족은유의 하느님 가문 속에서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배웠다. 그 의식은 앞서 말한 학생의식, 자녀의식, 막내의식 등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그의 시선집 《못과 삶과 꿈》의 서문에 있는 “처음으로 시선집을 엮습니다. 100편의 시를 뽑았지만 일백 번 죄짓고 쓴 것처럼 부끄럽기만 합니다.”라는 말 속에서, 그리고 앞서 인용한 영세 교리 배우기의 체험과 기억을 담은 문장에서 만나 볼 수 있다.

4. 성부(聖父) 혹은 ‘신부(神父)님’에게 고해성사하기

   김종철의 죄의식과 부끄러움은 기도 혹은 고백성사의 문제와 닿아 있다. 그의 시 속엔 기도의 장면과 기도의 언어가 적지 않고, 특히 고백성사의 시편은 인상적이다.

   기도와 고백성사가 이루어지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기도와 고백성사를 받을 만한 절대적 존재나 그에 준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그를 따르는 선한 순종의식이 있어야 한다.


      나는 울보입니다
      그냥 우는 게 아니라 징징징 짜는데
      온 가족들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보채면 다 들어주었습니다
      우는 아이 젖 더 준다는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돈 없다, 밥 없다, 색시 없다
      어른 되어서도 징징징 매달렸습니다
      하느님도 별수 없이 손발을 들고
      어느 날 도깨비 방망이를 던져 주며
      눈물, 뚝!
      외쳤습니다
      뚝!
      한 번도 보챈 적 없습니다
      그저 까꿍까꿍,
      못으로 숨고 싶습니다
                 ―〈울보 기도―초또마을 시편 14〉의 전문

   ‘가족― 하느님’으로 이어지는 절대적 믿음의 대상에게 시인은 ‘보채고’ ‘매달렸’다고 고백한다. 그것도 그냥 보채고 매달린 것이 아니라 ‘징징징’ 짜면서 ‘울보’가 되어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스스로 ‘울보 기도’라고 이름 붙인 그의 기도에서 가족과 하느님은 떼쟁이 자녀에게 모른 척 진다. 알고도 지는 이 게임에서 막내의식의 자녀는 욕구가 충족되고, 그 충족된 1차적 욕구 위에서 그는 점차 성인으로 옮아간다.

   그러나 그가 성인의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 되기를 자처한다. 고백성사가 바로 그것이거니와, 그는 자신의 내적 ‘애응지물(碍膺之物)’이자 트라우마를 이런 자녀의식으로서의 고백성사를 통해 해결한다.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않은 못 하나가
      말 어쩔 수 없이 숨겨 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고백성사―못에 관한 명상 1〉 전문

   못, 성당, 고백성사, 아내, 부끄러움 등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위 시에는 김종철의 김종철다움이 거의 다 들어 있다. 그는 못이라는 기독교적이며 일상적인 상징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였고, 그가 머물고 싶은 곳으로 성스러운 집으로서의 성당을 찾고자 하였으며, 애응지물을 해결하고자 하는 자녀의식으로서의 고백성사의 방식을 택하였고, 보호자와 동일체인 아내를 옆에 두고 있으며, 부끄러움이라는 학생의식을 여전히 마음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성사를 하는 위 시의 화자는 ‘울보기도’를 하던 이전의 욕구 충족적 기도에 비하면 한층 성숙한 모습의 기도를 하고 있다. 그의 기도는 채우던 기도에서 비우는 기도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못 뽑기’라는 자아성찰과 자아완성의 길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못 뽑기’로서의 기도 또한 성부(聖父)와 ‘신부님’을 앞에 두고 이루어지는 고백성사의 형태라는 점과, 고백성사라는 ‘신― 자아’ 사이의 단독 대면의 현장에까지 아내를 대동하고 있다는 점은 특징적이다. 말하자면 그의 뿌리 깊은 자녀의식과 막내의식 그리고 학생의식이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김종철은 ‘수녀님’에게 그랬듯이 ‘신부님’에게도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신부님은 그에게 성가족의 대부(代父)이다. 그는 이런 ‘신부님’을 ‘우리 신부님’이라고 자주 부른다. ‘우리’라는 말의 심층이 여기서 중요하다. 그에게 ‘신부님’은 그냥 ‘신부님’이 아니라 “우리 신부님을 보고 있으면/ 헐벗고 집 없어 걱정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밥에 대하여 1〉)와 같은 표현에서 보이듯이 ‘우리’ 속의 가족의식을, 그의 자녀의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철에겐 혈육적인 친부(親父)도 그의 자녀의식을 자극한다. 일찍 세상을 뜬 친부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비중밖에 차지하지 못하지만, 그가 친부에게 보내는 자녀로서의 심리적 기제는 다르지 않다.

   성부(聖父)와 신부(神父)가 있을 때 우리는 걱정할 일이 없다. 그들은 전지, 전능, 전선한 주재자이고, 의지처이며,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도, 신부도, 우리 자신이 ‘등신불(김종철의 제4시집이 《등신불 시편》임)’처럼 주인공으로 소신공양 속에서 중생(重生)하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의 삶을 간섭하고 제약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간섭과 제약은 성부와 신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만드는 업이다.

   김종철의 시에서 그의 의식적 변화를 보여줄 가능태로 존재하는 시집은 《등신불 시편》과 《오늘이 그날이다》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철학적이며 지적인 시간론을 탐구한 시집 《오늘이 그날이다》에서조차도 그가 시간에 대해 물어볼 때는 ‘어머니’를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가 이제 어머니를 떠나기를 바란다. 사적 어머니에서 공적 어머니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가족 울타리에서 우주 속으로 가출하기를 바란다. 어머니도 가족도 우리가 최초로 만난 세계이지만,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최후로 떠나야 할 세계이다.

5. ‘ ―습니다’ 체의 사용과 남는 문제

   김종철의 시선집 《못과 삶과 꿈》 속의 많은 작품들이 ‘―습니다’ 체를 구사하고 있다. ‘―습니다’ 체는 겸양 어법이자 존경 어법이므로 듣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거부감은커녕, 공격성의 제거에 따르는 문체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과 안심을 안겨준다.

   따라서 ‘―습니다’ 체는 쓰기에 따라 상당히 훌륭한 심리적 효용성을 가져올 수 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면서도 자신을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자리에 놓는 어법, 그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말하는 자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마음을 내도록 하기 쉽다.

   김종철의 시 속에서 ‘―습니다’ 체는 이런 효과를 상당히 발휘하고 있다. 그의 시가 주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진지하게 만들고 있으며,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무게감 있게 듣도록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의 ‘―습니다’ 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위와 같은 사실과 더불어 이 문체 속에 그의 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습니다’ 체 속에 그가 지닌 착한 자녀의식, 학생의식, 막내의식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때의 이런 의식은 어머니, 성부, 신부, 수녀 등과 같은 대보호자뿐만 아니라 독자 전체를 향하는 듯하다. 그는 독자들에게 ‘―습니다’ 체를 통하여 자신을 자녀나 학생처럼 고백하고 있다.

   내가 그의 시를 읽으며 그의 보호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런 문체 탓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장녀의식’이 그의 ‘막내의식’과 결부된 투사적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습니다’ 체는 한 번쯤 탐구될 필요가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일시에 무장해제를 시키는 그 자발적 ‘―습니다’체의 비공격성과 공손함은 앞서 논한 그의 의식세계와 어울려 매우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철은 고향을 떠나 서울시편(《서울의 유서(遺書)》)을 써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고향시편(《못의 귀향》)을 쓰는 데까지 나아갔다. 고향은 탈향자가 육십갑자의 회갑처럼 한 번쯤 찾아가야 할 생의 원점이다. 그러나 그때의 고향은 유년의 고향이 아니라 이미 생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한 차례 돌린 자가 찾아가는 고향이라는 점에서 질적 차이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때의 고향은 귀향의 세계가 아니라, 그의 이번 시선집 발문을 쓴 김재홍의 말처럼 회향(回向)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회향은 어머니를 극복할 때, 그리고 보호자를 넘어설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착한 자녀나 신자이기보다는 지혜로운 자유인이나 담대한 창조적 파괴의 모험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못의 귀향’으로 생의 원점을 찾아간 김종철의 이후 세계를 기대해본다. (*)

 

 

             —《유심》2009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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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구/1958년 출생. 1985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저서로 《우주공동체와 문학의 길》 《상상력의 모험》 《몽상의 시학》 《시읽는 기쁨1-3》 《한국현대시와 평인의 사상》 등 다수. 대한민국문학상(신인상) 시와시학상 수상. 현재,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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