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오라비처럼
안성덕
배불뚝이를 만나면
풋살구 몇 알 건네주고 싶네
손차양을 하고 하늘을 우러르는
뒤똥뒤똥 아기 밴 여자를 보면
바람만바람만 따라가 주고 싶네
길을 가다가
도톰한 뱃속 사람꽃을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싸 안은 젊은 여자를 만나면
시디신 자두 몇 알
가만,
쥐어주고 싶네
핼쑥한 낮달도
보름달처럼 금세 핏기가 돌 것이네
배부른 누이를 보면
덜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래층 사내
덜미가 툭, 튀어나와 있다
튀어나와 밤새 칼잠을 잤을
목도리도 안 한 그의 덜미
처음에는 뒤로 솟은 목젖인 줄 알았다
며칠 전 아내가 들었다는 소문대로
게시판 정리해고 명단에 끼어
압정으로 박혀 있던 자국 같다
갈고리에 꿰어 푸줏간에 걸린 흔적 같다
한 칼 두 칼 제 살점 베어주며
더욱 불거졌을 저 덜미
사내가 밤새 소주잔 털어넣는 동안
제 목살 몇 점 베어 뒤집는 동안
삼겹살집 광두정 옷걸이는 기억했을 것이다
울음조차 꺼억거릴 것만 같은
사내의 목젖을
대롱대롱 엘리베이터 천장에 걸린 채
오를 듯 가라앉는 저 덜미를
빳빳한 와이셔츠 깃이 미안해지는 풀근길
거꾸로 매달린 물음표가
내 덜미도 걸고 있는 것 같아
사오정마냥 뜬금없이 나이를 묻던 인사부장 같아
문득 서늘해진 뒷목을 쓸어내린다
못 본 척 외면하려 돌아본 거울 속에
어디든 데려가 달라는 듯, 사내가
먼저 와 서 있다
몸붓
1
지렁이 반 마리가 기어간다
허옇게 말라가는 콘크리트 바닥에
질질 살 흘리며 간다
촉촉한 저편 풀숲으로 건너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라고
토막 난 몸뚱이로 쓴다
제 몸의 진물을 찍어
평생, 한 一자 한 자밖에 못 긋는 저 몸부림
한나절 땡볕에 간단히 지워지고야 말
한 획
2
고무타이어를 신었다
중앙시장 골목 어귀,
참빗 좀약 사세요 구두 깔창도 있어요
삐뚤빼뚤 삐뚤빼뚤
좌판 위 고무줄을 늘여 쓴다
바싹 마른입에 거품을 무는 듯
붓끝에 진땀을 찍는 듯
사내가 제 몸을 쥐어짠다
한 줄 더 써내려
몽당연필 같은 몸 필사적으로 끼적댄다
한 자 한 자 몸뚱이가 쓴 바닥을 지우며
기억뿐인 다리가 따라 간다
호모 나이트쿠스
양계장을 대낮처럼 밝힌 후, 우리는 단잠에 들지 못했다 잠깨워주지 못할 새벽닭 걱정 때문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하루 한 알씩 알을 뽑아내는 그 쏠쏠한 재미를 터득하고부터 더 이상 꿈은 없었다 내일은 없었다(잠을
자야 꿈을 꾸지 아니 내일이 오지)
어둠을 몰아내자 하늘의 별도 종적을 감추었다 붙박이별이 사라진 뒤 이정표를 잃은 우린 부평초처럼 떠돌았다
여우 난 밤 도깨비 이야기쯤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줬다 부릅뜬 가로등 아래 담장 위 넝쿨장미가 꽃 피우지 못하자, 골목
에는 연애도 시들해졌다
씨 없는 알을 낳은 닭이 울지 않는 대낮 같은 새벽, 닭의 씨가 마를새라 우리들은 더욱 허기졌다
세상에 코 베일세라 잠들지 못했다
* 호모 나이트쿠스 : 밤을 낮처럼 보내는 사람들
다람쥐 육아법
도치기라 소문난 놈은 알밤이며 잣이며 도토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창고마다 그득그득 채워놓는다는데 간혹 쇳대 채워 둔 제 곡간을 잊기도 한다는데
잃어버린 밤톨 잣 상수리가 푸르게 빈산을 채우고 고물고물 날다람쥐 새끼들도 먹여 살린다는데
곤드레 술김에도 천 원짜리 한 장 흘리는 법 없는 내 빨랫감에선 가문 봄날 모래바람 같은 담뱃가루만 풀풀 날린다는데
앉은 자리에 풀도 안나겠네, 아내는 주전부리하듯 내 허물을 우물거리는데 붓자마자 줄줄 바가지 째 새버려도 콩나물시루의 콩나물은 쑥쑥 잘도 자란다는데
저고리 안주머니에 만 원짜리 두어 장 흘려 봐?
저승사자를 따라가다
산신령님 이름이 뭐죠, 부음을 접하고 달려간 산악회원의 상가 영안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카페에서 우린 닉넴으로 통했으니까요. 누군가 핸폰으로 산신령님의 실명을 알아냈죠. 갹출한 부의금을 넣고 막 돌아서려는데 접수처 청년 방명록에 서명을 부탁하더라고요. 김만수, 평소대로 써넣으려다 가만 생각해 보니 글쎄 상주가 우릴 무슨 수로 알아보겠어요. 그래요. 고심 끝에 솔낭구, 뒤이어 고갤 끄덕이던 산꼭대기님도 닉넴을 써넣습디다. 접수처 청년 표정 참 묘해지더구만요. 일행이 선녀와 나무꾼, 이라고 계속 써넣자, 딱 뭐 씹은 얼굴을 하더라니까요. 민망하긴 우리도 매한가지였지요. 화톳불이 그렇게 화끈거리는 줄 미처 몰랐다니까요. 쥐구멍에 그냥 대가리 콱 처박고 싶은데 일행 중 하나가 자꾸만 머뭇거립니다. 누군가 거듭 채근을 해대고, 마지못해 개미만한 글씨로 에헤라디아, 라고 써넣는 순간 마지막 남은 회원 글쎄 총알처럼 뛰쳐나갑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들은, 저승사자님 같이 가요.
쪽팔려 딱 죽고 싶더라고요.
—시집『몸붓』(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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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덕 /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9년 〈전북일보〉신춘문예 당선. november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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