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관의 「꽃 찢고 열매 나오듯」감상 / 장석주
꽃 찢고 열매 나오듯
장옥관
싸락눈이 문풍지를 때리고 있었다
시렁에 매달린 메주가 익어가던 안방 아랫목에는 갓 탯줄 끊은 동생이 포대기에 싸인 채 고구마처럼 새근거리고 있었다
비릿한 배내옷에 코를 박으며 나는 물었다
―엄마, 나는 어디서 왔나요
웅얼웅얼 말이 나오기 전에 쩡, 쩡 마을 못이 몸 트는 소리 들려왔다
천년 전에 죽은 내가 물었다
―꽃 찢고 열매 나오듯이 여기 왔나요 사슴 삼킨 사자 아가리를 찢고 나는 여기 왔나요
입술을 채 떼기 전에 마당에 묻어놓은 김장독 배 부푸는 소리 들려왔다
말라붙은 빈 젖을 움켜쥐며 천년 뒤에 태어날 내가 말했다
―얼어붙은 못물이 새를 삼키는 걸 봤어요 메아리가 메아리를 잡아먹는 소리 나는 들었어요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미역줄기 같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얘야, 두려워 마라 저 소리는 항아리에 든 아기가 익어가는 소리란다
휘익, 휘익 호랑지빠귀 그림자가 마당을 뒤덮고 대청 기둥이 부푼 내 안고 식은땀 흘리던 그 동짓밤
썰물이 빠져나간 어머니의 음문으로
묵은 밤을 찢은
새해의 빛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
천 년 전 죽은 ‘나’와 천년 뒤 태어날 ‘나’는 안방 아랫목에 갓 탯줄 끊고 새근새근 잠든 동생 옆에 누운 산모에게 ‘나는 어디서 왔나요’라고 묻습니다. 한 생명이 나오려면 우주 만물이 다 함께 회임해야 하지요. 마을 못은 쩡, 쩡, 몸 트는 소리를 내고, 김치를 채운 김장독은 배 부푸는 소리를 내고, 대청 기둥은 부푼 배 안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네요.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을 빌려 태어나지만, 실은 비존재의 저 캄캄한 우주 속에서 홀연히 “꽃 찢고 열매 나오듯”, 혹은 “사슴 삼킨 사자 아가리 찢고” 나오듯 온 것이랍니다. 생명이 우주 만물의 축복과 조력을 받으며 나오기 때문에 이 생명이 소중하고 값진 것이겠지요. 싸락눈이 문풍지를 때리는 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새로 태어나고 있겠지요.
장석주 (시인)
'Poetical language[詩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서안나 (0) | 2015.05.30 |
---|---|
[스크랩] 이만섭 (0) | 2015.05.30 |
[스크랩] 야생화처럼 /이만섭 (0) | 2015.05.28 |
[스크랩] 자화상(自畵像)/서정주/(낭송:단이 권영임) (0) | 2015.05.25 |
[스크랩] 김종삼의「장편(掌篇) 2」감상 / 손택수 (0) | 2015.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