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는 옛부터 문인사대부들의 가장 많은 애호를 받으면서 사군자의 으뜸으로 꼽혀 온 것이다. 그것은 대나무의 변함없는 청절한 자태와 그 정취를 지조있는 선비의 묵객들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늘 푸르고 곧고 강인한 줄기를 가진 이러한 대나무는 그래서 충신열사와 열녀의 절개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대나무가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으나 수묵화의 기법과 밀착되어 문인사대부들의 화목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북송의 蘇東波와 文同이었다. 소동파는 특히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의 본성을 작가의 직관력으로 체득하여 나타낼 것을 주장한 '中成竹論' 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동은 '湖州竹派'를 형성하여 묵죽화의 성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南宋 때에 이르러 묵죽은 더욱 유행하였고 元代에는 문인사대부들의 저항과 실의의 표현방편으로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 때 벌써 李에 의해 [竹譜] 7권이 만들어져 화법이 체계적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죽의 생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묵죽화가로서 유명하였다.
元代에는 이 밖에도 조맹부, 吳鎭, 瓚 등의 명가들이 나와 가늘면서 굳센 묵죽화풍을 형성했으며, 이러한 전통이 明代의 夏 (1388∼1470)등을 통해 자연미와 이념미가 융합되면서 청대로 계승되었다.
죽을 그리는 데 묵죽을 기본으로 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으나 묵죽 이전에 寫竹과 채색죽의 방법이 이미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사죽은 사생에 의한 대나무의 묘사방법이고 채색죽은 윤곽을 선묘로 두르고 안에 칠을 하는, 이른바 彩의 방법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대나무는 수묵법과 결부됨으로써 비로소 동양회화의 중심적 창작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氣韻과 정신의 주관적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墨이란 선으로서 작용할 뿐 아니라 색채를 대신한 면으로서도 작용한다. 文同이나 蘇東波에 의해 처음 시도된 묵죽은 바로 대상물의 외형적 사생을 떠난 傳神의 실천적 방법으로 죽을 그린 것이 되며, 이 때의 묵은 현상세계 너머의 조화력을 암시하는 것으로 묵선이나 목면 모두 그 기운을 담는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묵죽과 동양회화가 지니고 있는 사의정신은 이러한 창작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묵죽도 묵란과 마찬가지로 서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찬은 서법 없는 묵죽은 병든 대나무를 보는 것 같다고 했으며, 明代의 王 은 서법과 죽법은 동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묵란이 짧고 긴 곡선의 반전 등을 통해 풍부한 변화를 보이는 데 비해 묵죽은 직선이 위주이며 그 구도에서도 보다 다양한 것이 특색이다.
묵죽을 그리는 데도 절차와 방법이 있는데, 줄기(幹)와 마디(節), 가지(枝)와 잎(葉)마다 그리는 순서가 있다. 먼저 죽간을 그리고 다음에 가지를, 이어서 방향과 필법을 변화시켜 잎을, 마지막으로 마디를 그리는 것이 청대 이후 확립된 죽화법이다.
이 순서는 시에서의 起承轉結과 같다. 이러한 붓질의 흐름은 사군자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지만 그 중에서도 죽의 경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묵죽을 그리는 것이 다른 사군자에 비해 어렵게 여겨지는 것은 대나무의 형태 자체는 단순하지만 일기와 계절적 정취에 따른 변화가 다양하고 미묘하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이러한 기후와 자연적 정경에 따라 晴竹, 仰竹, 露竹, 雨竹, 風竹, 雪竹, 月竹 등의 화제로 다루어졌는데 대가들조차 50년을 그린 후에야 비로소 그 경지가 터득되고 마음에 드는 죽화를 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곧 묵죽의 높은 경지와 깊은 맛을 시사하면서 이러한 사군자그림들이 결코 본격적인 회화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기초 내지는 예비단계의 차원이 아니라 동양 회화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