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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24세 때 동지부사(사신)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 연경에 가 머물면서 두 달 여 동안 청나라의 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 밑에서 공부했다. 옹방강은 이전 왕희지체인 ‘반듯한 글씨’ 대신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글씨에 집어 넣은 ‘신서예이론’을 시작한 학자다. 하지만 옹방강이 막상 이론에 딱 맞는 글씨체는 별로 만들어내지 못한 데 비해 추사는 그 이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씨를 여럿 써냈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최완수 실장은 “추사는 외래문화를 배운 뒤 그보다 수준이 높은 우리 것을 만들어냈기에 참된 세계화에 성공한 학자”라고 말한다. 추사의 의미가 오늘에도 되새겨지는 이유다.
1층에 전시된 추사의 행서(行書)와 예서(隸書)가 ‘그림 같은 글씨’라면 2층에 전시된 난(蘭) 그림은 붓을 단순하게 놀린 ‘글씨 같은 그림’이다. 이슬의 무게에 눌려 머리가 옆으로 휜 꽃대와 단출한 잎새는 추사가 즐겨 그렸던 소재다. 추사 그림 맞은 편에 전시된 이하응의 묵란(墨蘭) 여섯 점을 보면 이하응이 추사의 스타일을 배웠으되 추사에게서 “난초 그림은 최고”라는 평을 들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추사를 ‘19세기의 대표적 지식인’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으로만 알고 있을 게 아니라, 대표작품들을 여러 점 보면서 그를 느껴볼 수 있는 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