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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정희 시인의 시

율카라마 2009. 12. 6. 20:16

* 겨울 사랑 -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 겨울 사랑은 광화문 교보생명 본사 사옥 '광화문 글판'에 올린 시 입니다.

* 파꽃길 - 문정희

흰 파꽃이 피는 여름이 되면
바닷가 명교리(明敎里)*에 가보리라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냄새를 따라가면
이 세상 끝에 닿는다는 명교리에 가서
내 이름 부르는 바다를 만나리라
어린시절 오줌을 싸서
소금을 받으러 가다 넘어진 바위
내 수치와 슬픔위에
은빛소금을 뿌리던 외가 식구들
이제는 모두 돌아가고 없지만
서걱이는 모래톱 속에 손을 넣으면
차가운 눈물샘은 여전히 솟으리니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냄새를 따라가서
그리운 키를 쓰고 소금을 받으리라
넘실대는 여름바다에
푸른 추억의 날개를 달아주리라

*명교리(明敎里) : 이곳은 전남 보성에 있는 마을 입니다.


* 소리 - 문정희

끓는 쇳물 속에 어린 딸을 바치고도
해와 달이 예순 번을 바뀐 후에야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는 에밀레종도
처음엔 소리가 없었다네

종신 속에 기포가 많아
헛구멍들이 소리를 다 잡아먹은 거지

그래서 허공에 매달리기
십년 이십년 백년......그렇게 바래지기
또 오백년......헛것들이 다 사라지고
자연히 구멍이 메워져서, 어느날
지잉, 징
하늘 땅을 울렸다네

오, 허공에 매달리기 올해 겨우 마흔해
내 몸속을 흐느는 바람길 수천리


* 풀잎 - 문정희-

돌틈새에서 파릇한 햇살들이
놀라 깨어나면
나는 조그맣고 서러운
사랑으로 눈뜨리
누가 이런 날
발자국 소리를 숨길 수 있으랴
온세상에 눈부신 소문이
가뭇없이 퍼진다 한들


* 순간 - 문정희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 노래 - 문정희

나와 가장 가까운 그대 슬픔이
저 강물의 흐름이라 한들

내 하얀 기도가 햇빛 타고 와
그대 귓전 맴도는 바람이라 한들

나 그대 꿈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대 또한 내 꿈을 열 수 없으니

우리 힘껏 서로가 사랑한다 한들


* 성에꽃 - 문정희

추위가 칼날처럼 다가든 새벽
무심히 커튼을 젖히다 보면
유리창에 피어난, 아니 이런 황홀한 꿈을 보았나.
세상과 나 사이에 밤새 누가
이런 투명한 꽃을 피워 놓으셨을까.
들녘의 꽃들조차 제 빛깔을 감추고
씨앗 속에 깊이 숨 죽이고 있을 때
이내 스러지는 니르바나의 꽃을
저 얇고 날카로운 유리창에 누가 새겨 놓았을까.
하긴 사람도 그렇지.
가장 가혹한 고통의 밤이 끝난 자리에
가장 눈부시고 부드러운 꿈이 일어서지.
새하얀 신부 앞에 붉고 푸른 색깔들 입 다물듯이
들녘의 꽃들 모두 제 향기를
씨앗 속에 깊이 감추고 있을 때
어둠이 스며드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저토록 슬픈 향기를 새기셨을까.
한 방울 물로 스러지는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들을


*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시인의 집 - 문정희

폼페이, 네 상처를 보러 왔다
목욕하다 죽은 네 둘째딸의 젖꼭지를 보러 왔다
네 아내의 가슴에서 터져 버린 화산을 보러 왔다
가열한 절망 위에 홀로 천 년을 꿈틀거리는
아름다운 폐허, 그곳에서
아침 새떼처럼 서식하는 시를 만나러 왔다

너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지구 끝에서 몰려든 호기심 앞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재앙들
주점과 도서관과 검투사들의 욕망이
인기 관광상품으로 널려 있는 이 거리에서
나는 자꾸 길을 잃는다
오래 쓰다듬고 나면 상처도
이리 환한 눈을 뜨더냐
그렇다면 시간은 무엇이고 비애는 무엇이냐
드디어 '시인의 집'앞에서 발을 멈춘다
대문에 상징으로 개 한 마리 그려 놓고
시인은 영원히 외출중
술에 취해 귀가하는 그를 위해
골목에는 아직도 야광석이 불을 밝히고 있다
그는 어디선가 상처를 팔고 있나 보다

서울에서도 그의 초라한 옷자락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발이 부르트도록 파멸과 절망을 뒤적인다
싱싱한 비극 위에 살아나는 언어의 혈육을 찾는다
폼페이 시인의 집 앞에서
시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 젊은날 - 문정희

새벽별처럼 아름다웠던 젊은날에도
내 어깨 위엔
언제나 조그만 황혼이 걸려 있었다
향기로운 독버섯 냄새를 풍기며
속으로 나를 흔드는 바람이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무수히 빠져나가는
은비늘 같은 시간들

모든 이름이 덧없음을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아! 젊음은
그 지느러미 속을 헤엄치는
짧은 감탄사였다

온몸에 감탄사가 붙어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른 잎사귀였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광풍의 거리
꿈과 멸망이 함께 출렁이는
젊음은 한 장의 프래카아드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서 너와 함께
낡은 어둠이 되고 싶었다

촛불 밖에 스러지는
하얀 적막이 되고 싶었다


* 고독 - 문정희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 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 키 큰 남자를 보면 -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 목숨의 노래 -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 유리창을 닦으며 - 문정희

누군가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 러브호텔 - 문정희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민음사,


*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제16회 정지용 문학상 당선작

 

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출생.
동국대 대학원 졸업,
21회 현대문학상 수상(75).
시집<꽃숨> <새떼> <우리는 왜 흐르는가>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대> <남자를 위하여> 등

제16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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