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명의 풀꽃나라] 강을 깨우지 마세요
★*… 산 너머로 해가 떨어지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지자 꽃밭에 서 있던 작은 천사등이 파랗게 불을 밝혔네요. 천사등 아래쪽에는 손톱만한 태양열 전지판이 달려 있는데, 등은 낮 시간 내내 햇빛을 거기 모아두었다가 밤이 오면 푸른빛을 내놓지요. 깨끗한 빛, 햇살이 준 선물입니다.
패어런츠 명사 두 화가의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

저는 초중고, 대학까지 무난했구요. 결혼하고 아이 둘 낳은 후, 38세에 대학원에서 하고 싶던 공부를 일년 정도 다시 했습니다. 40세에 미술동네에 뛰어들어 비상업용 갤러리를 10년 운영했구요, 50살에 큰 딸을 잃은 후, '어디 한번 제대로 살아보자'고 덤비면서 환경단체 '풀꽃세상' 만들어 4년간 죽자고 일했구요, 지금은 '풀꽃평화연구소'에서 미화부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습니다. 그림도 그리고 간간히 글도 씁니다.
성격은 매우 수줍고 다감한 편이데 불같은 데가 있어서 한번 성격 나오면 문제의 매듭을 확실하게 집니다.
사람을 사귀면 끝까지 가자는 스타일이구요, 친구는 딱 한 명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옷의 취향은 중세의 시골 아낙네 스타일이구요, 좋아하는 옷은 빵꾸가 나고 너덜너덜해도 땜질을 해서 입고 다닙니다. 그런데 누가, 제 스타일을 따라하면 그 사람을 속으로만 싫어합니다. 숫자에는 아주 많이 약하고, 머리가 아파서 생각조차 하기 싫어합니다. 음악은 또다른 벗과 같은 데, 집에서 편히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길거리를 가다가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깊이 감동을 받습니다. 반찬은 김치를 제일 좋아하고, 꽃이나 풀은 뭐든 지 감동을 받고, 싫어하는 동물은 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에 대해 내린 결론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하여 태어났다' 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는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그의 홈피에는 이렇게 주인장 소개가 적혀 있다>

초록색 담쟁이덩굴이 아름답다
그의 사무실은 이렇게 풀꽃세상처럼 예쁜 건물 맨 위층에 있었다.
얼마 전까지 민간환경단체 '풀꽃세상'의 창립자이며 대표였던 정상명 씨.
나비 한 마리가 훨훨 날아 꽃에게 생명을 주어 열매를 맺게 하고는 얼른 다른 꽃들로 자리를 옮겨 새 터를 또 여물게 하듯 그는 그런 여유로움과 새로운 것에 대한 미학을 지니고 있었다.
환경운동이나 환경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꽤 낯설어 보임직한 '풀꽃세상', '풀꽃연구소'...
그가 말하는 풀꽃이란 무엇일까? 풀에서 피는 꽃들만을 일컬어 상용되는 명사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자연스럽게 자연의 품속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체들을 담는 폭넓은 자연의 농축된 함축어였다. 주인장의 눈에는 자연의 모든 것이 꽃처럼 아름답고 꽃처럼 평화롭기를 바라며 지은 명명(命名)이었다.
풀꽃연구소와의 만남
사무실 입구에 들어서면 사방이 책으로 가득한 곳에 소설가 최성각씨와 정상명씨, 풀꽃연구소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다. 책장들을 병풍 삼아 가운데 자리잡은 소파 역시 무척 편안했다. 그리고 사무실의 분위기는 에세이만큼이나 따듯했다. 찻잔도 손잡이가 없는 유리잔과 투박한 녹차 잔, 그리고 하얀 도자기로 된 찻잔이 있다. 이곳에서 차를 마실 때는 셀프다. 누구든 원하는 종류의 차를 원하는 양만큼 가져다 자유롭게 만신다. 왼쪽 편에는 소설가 최성각씨가 수북이 쌓인 책들 사이로 책상을 놓고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에는 캔버스가 올려진 이젤과 그림 도구들이 어우러진 정상명씨의 책상이 있는데 책상 뒤편에 유난히 눈에 띄는 액자가 있다.
언제나 사람들을 만나면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정상명씨. 고작해야 '거시기 있잖아요.'가 전부였던 그가 많은 매스컴들의 스폿을 받으며 뚜렷한 가치관과 감성을 갖춘 환경운동의 잔 다르크가 된 것은 가슴속 남모르는 아픔 뒤의 잉태였다. 바로 사무실에서 제일 눈에 띄는 액자 속의 주인공과 관계가 있었다.

초영이에게 보내는 풀꽃편지
60*40cm 정도 액자 속 예쁜 딸의 사진, 손바닥만한 사진을 이웃 사진관에서 이렇게 크게 뽑았다고 말문을 연 그는 차마 자세히 질문하기도 어려운 사랑하는 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면 날아갈 것같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초영이는 노란 국화와 대화를 하고 봄날이면 꽃 짐을 지고 놀았다. 커가면서도 늘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언제나 엄마의 분신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그 아이가 23살이 되던 해, 초영이는 엄마와 작별을 고했다. 화재로 인해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곧 출동한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8대씩이나 들이닥쳤지만 골목길에 가득 대놓은 차들 때문에 초영이는 돌아올 수 없는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정상명 씨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뻔히 눈을 뜨고 그 아이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만 했다고 이야기하는 그는 벌써 눈가에 이슬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너무 급히 먼 길을 떠나느라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고 풀꽃 뒤로 숨어버린 딸에 대한 기억들
-"늘 선한 마음으로 사세요. 감동에 차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대해요.
평화와 사랑의 기쁨을 누리세요. 살아 있음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만 하세요."
네가 내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 너 때문에 이제 화랑 문을 닫는다. 그리고 너 때문에 나는 다시 이곳에서 '풀꽃세상'을 펼치려고 한다. 예전에는 영원이라는 단어가 내게는 추상적이기만 했다. 그러나 그 말이 이제는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네게 소리 내어 조용히 말한다.
꽃잎 뒤에 숨어 있는 이쁜 너, 희고 맑은 또 하나의 나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말한다.
"사랑해, 영원히...!"
큰딸의 말처럼 그는 감동에 차서 세상을 아름답게, 평화와 사랑을 부추기기 위함이라고 삶의 이유를 말한다.
딸의 바람을 담아 나이 오십에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창립하고, 미친듯이 일을 시작한 정상명씨.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자!'는 풀꽃세상의 생각은 사이트를 통해 퍼져나가 이제는 환경운동가들의 낯설지 않은 친구가 되었다.
사람의 소유욕과 아름다움에 대한 탐식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며 아름다웠던 보길도 갯돌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그는 모든 자연은 거기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초창기 사재를 털어 가며 아낌없이 환경운동에 몸을 던졌던 그의 열심은 이제 풀꽃세상의 터를 근사하게 닦았다. 그리고 나비처럼 또 다른 연구로 골똘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들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정상명씨는 자신의 후반기 인생을 오직 큰딸의 미소를 보기 위해 풀꽃세상을 열었다. 그리고 풀꽃 뒤에서 속삭이는 딸에게 말한다.
"초영아, 사랑해!"
딸에게 전하는 풀꽃편지

네가 내 곁을 그렇게 느닷없이 떠난 후, 내 정신은 오로지 다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초영아, 네가 여기 살아 있는 동안 그리워하고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런 세상의 실현을 위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나는 잠도 안 자고, 숨도 안 쉬고, 오로지 그 생각만 했다.
'가장 아름다운 일은 선을 위해서 일하는 것, 어린애 같은 순진성으로 이 세계의 경이로움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것!' 네가 내게 준 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쾌했다. 봄 햇살처럼 눈부신 생에 대한 긍정, 그 긍정의 힘이 결국 '풀꽃세상' 일을 시작하게 했단다. 하지만 우리네 생활은 지금 얼마나 천박한 가치들로 뒤덮여 있는지 모른단다. 걷잡을 수 없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우리의 삶은 얇고 비참하기 짝이 없다. 엄마는 이 세상이 완전한 '풀꽃세상'이 되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낙원이나 정토나 '풀꽃같은 세상'이 언제 이뤄졌었더냐. '풀꽃세상'은 없다. 하지만 엄마가 애쓰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풀꽃세상'을 그리워하고, 꿈꾸고, 지금보다 자연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조금 더 겸손해지고, 이 세상을 우리가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기 위해 애쓰도록 부추기는 일, 그게 엄마의 몫이 아닐까 싶다.
갑작스레 떠나느라 미처 유언을 남길 틈이 없었던 너를 떠올리면, 유언은 엄마에게 사치일지도 모른다. 유언은 살아남은 자에게는 '시작의 말'일 뿐이다. 네가 가고 엄마가 새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의 삶이 네 동생 샘이에게도 영향을 미치기를 바랄 뿐이다.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에 엄마는 늘 감사한다.
지금 내 정신은 지극히 건강하고 무엇인가로 충만해 있다. 내 생의 어느 순간에도 지금처럼 건강하고 충만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적은 없었다. 지금처럼 생이 전면적으로 투명하게, 확실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생에 대해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 생에서 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를 찾았기 때문이다. 너 때문이다. 네가 저 꽃잎 뒤로 숨어 버리면서 내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꽃잎 뒤에 숨어 있는 이쁜 너, 희고 맑은 또 하나의 나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말한다.
"사랑해, 영원히...!"
글쓴이 이광종 포토그래피 김선진
*Parents, 2004.7월호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만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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