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외 1편)
조인선
선거가 끝나자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래도
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고 아내와 아이들은 거기에다 웃으며 방울들을 달았다
드라마 속 사랑은 여전히 돈지랄이었고 걸그룹의 자태는 아슬아슬하게 매혹적이었다
뉴스는 사람들이 몰라도 될 것들만 보여주었고
오늘의 날씨는 어제보다 몸매가 육감적이었다
내가 지지한 대선후보는 생각난 듯이 죽은 자에게 엎드렸고
종말론은 인기 있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기에 충분히 절망적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프라이팬에 계란을 깬다
자세히 보니 핏줄이 보인다
날개가
하늘이 보인다
못다 한 꿈이 보인다
나는 조금은 아무렇지 않게
내 손바닥처럼 뒤집는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보인다
주름이 보이고
굳어진 사랑 속에
옹알거리는 태아 적 고단한 생도 보인다
나는 간신히 접시에 담는다
그렇게 한입 베어 먹듯 시를 적으니
생각하며 산다는 거
싸운다는 거 그게 무섭다
손끝이 두렵다
모든 생명이 오고 가는 부엌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내가 끌고 가는 나의 역사에도 찬란한 빛이 있어
계란 프라이 하나만도 못한 내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그래도 그 빛에 설익은 것 같아 나오는 건
노른자의 흔적처럼 한 방울이었다
못다 한 신음 한 조각이었다
—《문예중앙》2013년 봄호
돈을 보다
지폐 속에는 얼굴이 숨어 있다
빛을 통과한 자만이 볼 수 있는 그림자의 힘이다
기계가 인식하는 홀로그램의 양에 따라 액수도 다르지만
쾌락을 맛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손끝의 감각도 다르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똑같은 돈 없듯
어둠에서 설핏 본 얼굴만 얼굴인 줄 알았다
지폐 속에 그려진 무릉도원과 매화마저
돈이 추구하는 이상향인 줄 몰랐다
티끌 같은 한 점이 모여 눈동자가 되고 입술이 되니
그것이 모여 역사를 이루는 사막 그 자체인 줄 몰랐다
태초에도 언어가 있었을까
시간의 힘은 어디서 오기에 여기까지 왔을까
모든 혁명은 실패하고
꿈은 어디로 가시려는지
한참을 들여다보는데
여백을 가득 채운 희미한 사랑을 끝내 나는 읽지 못한다
천지를 가득 메운 언어의 피를 듣지 못한다
손끝에 묻어나는 신음 한 조각만이
온전히 보이고 들릴 뿐
두 손 감싸 쥔
새벽이 보여주는 무표정한 윤곽에
형체를 확인하느라 애쓸 뿐이었다
—《현대시》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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