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길을 갔다
김 근
여자가 살을 파내고 나를 심는다
나는 아무 저항 없이 여자의 살에 뿌리를 내린다
내 실뿌리들이 혈관을 타고 여자의 온몸으로 뻗어나간다
여자를 빨아먹고 나는 살찐다
언젠가 여자는 마른 생선처럼 앙상해질 것이다
옛날에도 그랬다
나는 커다란 종기처럼 여자에게서 자랐다
나라는 고름 주머니를 달고 여자가 길을길을 갔다
소풍
처음 맡아보는 역겨운 꽃냄새를 풍기며 알몸의 여자들이 알몸의 남자들에게 안겨 우르르 남자들 풀밭 위로 쓰러지고 한몸으로 여자들과 남자들 풀밭을 굴러다녀 풀들은 짓이겨지고 그들의 알몸에 푸른 풀물 들어 풀잎에 베인 여린 살 속으로도 풀물이 스미고 속까지 온통 풀물 든 살들이 서로 섞여 풍경도 제 색깔을 버리고 그들의 살덩이 속으로 그만 뛰어들고 어느 살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무인지 하늘인지 모를 오후 처음부터 여자였고 남자였고 나무였고 하늘이었는지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된 그런 오후 지디진 반죽처럼 흘러내리는 저 살들 저 풍경을 누가 다 다시 따로따로 저 덩어리들을 빚나 빚나 아흐 먹나 먹어버리나 나 그만 헝클어지고 사이다 병 같은 바람이 내 사타구니를 간지럽혀 끄억끄억끄억 트림에서는 나 그 많은 트림을 모아두면 내 몸도 역겨워 부우웅 떠오를 것만 같아 그런 오후 소풍 가자 우리 알몸으로 재잘대는 시냇물을 따라 날 저물기 전에 비가 와도 풀밭으로 아흐 풀밭으로
밝은
어쩌자는 것이냐
검고 축축한 가지에 발가벗은 아이들이 주렁주렁 제 성기를 내놓고 매달릴 때 성기를 까뒤집어 빛을 발하다 덜 여문 그 빛 사흘을 못 가고 꽃처럼 시들어질 때 그 시듦이 또한 당신의 공중에 구름을 불러와 그 묵직한 구름이 지상에 천만 개 다리를 뻗을 때 그 다리 아주는 지상에 닿지 못할 때 퍼렇게 그만 죽을 때 죽은 자리에서 바람이 자꾸 구멍을 찾을 때 음악은 되지 못하고 소리만 커다란 바람이 내 온몸의 구멍들로 엄습해 들어올 때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짐승도 인간도 아닐 때 당신과 내가 서로 몸을 바꿔 입고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일 때 다시는 나는 내가 아니고 당신은 당신이 아닐 때 남자도 여자도 아예 버릴 때 우리의 발바닥이 우리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때 우리의 꼬리가 영영 우리의 머리를 만나지 못할 때 당신과 내가 그만 당신과 나를 넘어 범람할 때 떠내려갈 때 아예 사라질 때 그럴 때
봄은 당신과 내 것이 아닌 눈동자들로 분주하고 깨끗한 시체처럼
저기서 여기로 그늘 하나 거리를 더듬으며 기어 기어 오는데
—시집『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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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 /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뱀소년의 외출』『구름극장에서 만나요』『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현재 ‘불편’ 동인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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