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계단 (외 2편)
이준관
짐을 들고 가는 여자가 언제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떠나노 하고
투덜대며 올라가는 계단이 많은 동네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계단에서 하늘과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한다
하늘이 이기면 한 계단 내려오고
아이들이 이기면 한 계단 올라가고
계단을 올라가면 그 계단 끝집에는 해바라기 핀다
해바라기에게
금빛 시간의 태엽을 감아주는 태양
아이들은 가을이면 손에 해바라기 씨를 받아
태양에게 돌려준다
태양은 그 꽃씨를 골고루 동네에 뿌려준다
일숫돈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람의 구두에는
씹다 버린 껌처럼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계단이지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이름을 외우며 올라가는 아이들에겐
침이 꿀떡 넘어가는 무지개떡이다
강아지가 배를 깔고 엎드려 잠을 자고 간 계단에 앉아
아이들은 무릎에 턱을 괴고 머언 하늘바라기를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 닳은 몽당 크레용으로
친구에게 줄 생일 카드처럼 서쪽 하늘을 빨갛게 색칠한다
아이들이 탈 썰매를 끌고 온 순록의 뿔처럼
전봇대가 서 있는 눈 오는 날에는
아이들은 계단 옆에 눈사람을 세워둔다
그러면 방울 모자를 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하이얀 양초 같은 집집마다 불을 켜 주러 계단을 올라온다
아이들이 아침에서 저녁까지 신나게 불어대는
구멍이 뿅뿅 뚫린 하모니카 같은 계단
그 계단에 나도 발을 올려본다
해바라기나 강아지나 아이들만이 만질 수 있는
하늘을 만지러
저녁쌀 씻는 소리
저녁쌀 씻는 소리 들리네
쌀뜨물을 꽃밭에 주는 소리 들리네
부엌문 앞에서 파를 다듬는
눈 끝이 시큰해지는 파 냄새
마당에서도 장독대에서도
벌레들이 참 맑은 소리로 우네
아이들 밥 담아 주기 알맞게
조그만 밥그릇만한 분꽃이 피고
저녁 기도서 읽기 알맞게
저녁 불빛 비치네
어미 소가 송아지 부르는 소리
별이 별을 부르는 소리
들리네
비
어렸을 때는
내 머리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비를 맞으면
해바라기 꽃처럼 쭉쭉 자랄 것 같았다
사랑을 할 때는
우산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둘이 우산을 받고 가면
우산 위에서 귓속말로 소곤소곤거리는
빗소리의 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집을 가졌을 때는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이제 더 젖지 않아도 될 나의 생
전망 좋은 방처럼
지붕 아래 방이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딸과 함께 꽃씨를 심은
꽃밭에 내리는 비가 좋다
잠이 든 딸이
꽃씨처럼 자꾸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는 일이 행복하다
—시집『천국의 계단』(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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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1949년 전북 정읍 출생. 1971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동시 당선. 1974년 《심상》신인상 시 당선. 시집 『황야』『가을 떡갈나무 숲』『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부엌의 불빛』『천국의 계단』, 동시집 『크레파스화』『씀바귀꽃』『우리나라 아이들이 좋아서』『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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