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草堂)두부가 오는 밤
문성해
옛날에는 생각도 못한 초당을 알아
서늘한 초당두부를 알아
동짓날 밤
선연한 선지를 썰 듯 썩둑썩둑 그것을 썰면
어느 새 등 뒤로는
그 옛날 초당(草堂)선생이 난을 칠 때면
뒷목을 서늘케 하며 일어서던 대숲이 서고
대숲을 흉흉히 돌아나가던 된바람이 서고
그럴 때면 나는 초당 선생이 밀지(密旨)를 들려 보낸
이제 갓 생리 시작한 삼베속곳 일자무식의 여복(女卜)이 된다
때마침 개기월식하는 하늘 분위기로
가슴에 꼬깃꼬깃 품은 종잇장과
비린 열여섯 해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고
저자거리의 육두문자도 오늘밤만큼은 들리지 않는다 하고
밤 종일 붙어 다니는 개새끼들에게도 한눈팔지 않고
다만 초당선생 정지 간에서 저고리 가슴께가 노랗게 번진 유모가
밤마다 쑹덩 쑹덩 썰어먹던 그것 한 점만 우물거려봤으면
이 심부름 끝나면 내 그것 한 판만 얻어
뱃구레 홀쭉한 동생들과 실컷 먹으리라던
허리춤에 하늬바람 품은 듯 훨훨 재를 넘던 그 여복이
초당 선생 묵은 뒤란으로 죽어 돌아온 밤
그 앞에 서면 그 여복 생각에 선생도 목이 메였다는 그것을 나는
슬리퍼 찍찍 끌고 동네 마트에서 너무도 쉽게 공수 받아
이빨 빠진 할멈처럼 호물 호물 이리도 쉽게 먹는다는 생각에
그것이 오는 밤은
개짐에 사타구니 쓸리는 줄 모르고 바삐 재를 넘던 그 여복처럼
목숨을 내 놓지는 못할지언정
슴슴하고 먹먹한 시 한편은 내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우라질 초당두부가 오는 밤이다
* 초당(草堂) : 허엽(1517-1580). 허균, 허난설헌의 아버지.
—《시산맥》2015년 봄호
----------------
문성해 / 1963년 문경 출생.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자라』『아주 친근한 소용돌이』『입술을 건너간 이름』.
'Poetical language[詩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15년 <유심> 신인 특별 추천작 _ 문리보, 허이영 (0) | 2015.06.24 |
---|---|
[스크랩] 허형만 (0) | 2015.06.12 |
[스크랩] 서안나 (0) | 2015.05.30 |
[스크랩] 이만섭 (0) | 2015.05.30 |
[스크랩] 장옥관의 「꽃 찢고 열매 나오듯」감상 / 장석주 (0) | 2015.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