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차(水車) 위의 생 (외 5편)
이가림
눈 쓰린 땀방울 훔치며
훔치며
걷고 또 걸어서
가까스로 다다른 땅끝엔
언제나 아픈 외발로 디뎌야 하는
낭떠러지뿐
한 줌의 소금을 위해
한 가마니의 가난을 위해
우리 모두는
해가 지지 않는 수차(水車) 위에서
제 그림자를 밟고
또 밟는 걸까
땡볕 아래
눈 쓰린 땀방울에 젖어 걷는 자여
그대 부질없는 인생
한없이 바닷물을 퍼올리고
또 퍼올리노라면
언젠가
열명길에 들어
눈물로 빚은 소금 한 부대는
내놓을 수 있으리
오랑캐꽃 1
나를 짓밟아다오 제발
수세식 변소에 팔려 온 이 비천한 몸
억울하게 모가지가 부러진 채
유리컵에나 꽂혀 썩어가는 외로움을
이 눈물겨운 목숨을, 누가 알랴
말라비틀어진 고향의 얼굴을 만나면
죽고 싶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슬픈 전라도 계집애의 죄,
풀꽃들만 흐느끼는 낯익은 핏줄의 벌판은
이미 닳아진 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쑥을 뜯고 있는 주름살의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갈 수 있을까
이 곪아 터지지도 못하는 아픔
맥주잔에 넘치는 비애의 거품을 마시고
더럽게 더럽게 웃는 밤이여
나를 짓밟아다오 제발
물총새잡이의 기억 1
어디선가
황색부리 하늘색 허리의
물총새가 날아와
시냇물에 닿을락 말락
총알같이 빠르게 물살 튕기며
번뜩이는 찬란한 배때기의
한 마리 피라미를 물고
커다란 무지개의 활[弓]보다 높이
가뭇없이 사라진 뒤
뭉게구름 속에
분명 둥지를 틀고 있을
그 물총새의 푸른 울음소리 귓가에 맴돌아
하 많은 여름날
고무줄 새총으로
새하얀 신기한 구름 걸려 있는
천길 포플러의 우듬지를
얼마나 수없이 쏘았던가
겨울의 불꽃
—W에게
겨울 저자에서 몇 되의 석유와 배추를 사들고
다자이 오사무(太宰治)같이 시든 남자를 만나러 오는 그대여
하나님의 기침소리보다 더 적막한 눈발이
퍼부어 내리는 이 백팔번뇌의 뜰에서 입맞추자
순간의 거울 7
—상응
내가 문득
보조개 이쁜 누이를 바라보듯
꽃 한 송이 바라보니
새하얀 빛깔로
웃는다
가늘게 떠는
그 웃음소리에 놀라
잠 깬 이슬들이
내게 말을 걸어
이름을 묻는다
난 눈길 없는 눈길로
바라보는 돌,
그대들이 바라보면
소리 없는 소리로
웃는 돌
북(北)
사철 석탄 가루를 싣고 오는
열하 승덕(熱河昇德)의 바람 속에 서서 엄마는
홍건적(紅巾賊)같이 무섭기만 한 호밀들의 허리를
쓰러넘기며
부끄러운 달을 마중하였다 멀리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외길 따라
눈물 나는 행주치마로 가고 있었다
마른 말똥거름 따위 검불 따위
꺼멓게 널리운 모닥불의 방천뚝을 지날 때마다
어찌나 키 큰 송전선주가 잉잉 울었던지
귀신처럼 무서웠다 지연(紙鳶)이 목매달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이던가 애견(愛犬) 쫑이 죽고
빨간 새끼들만 남아 기어다니는 헛간
나도 한 마리 강아지 되어 바자니던 것을
오줌싸개의 나라에서는 자주 폭군이 되어
활 쏘는 이순신의 손자의 손자
한 웃음소리에도 어둠이 무너지고
한 돌팔매에도 참새 떼들은 떨어졌다
노을 속 참깨를 뿌린 듯이
—활판 시선집 『지금, 언제나 지금』(시월, 2011)
----------------
이가림 / 1943년 만주 열하 출생. 성균관대학교 불문과 졸업. 프랑스 루앙대학교 불문학 박사.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돌의 언어」 가작 입선,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氷河期」 당선. 시집 『빙하기』『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슬픈 반도』『순간의 거울』『내 마음의 협궤열차』 『바람개비별』, 활판 시선집 『지금, 언제나 지금』. 계간《시와시학》주간 역임. 현재 인하대 명예교수,
'Poetical language[詩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바다에 가고싶다-이은심/낭송무광 (0) | 2012.01.13 |
---|---|
[스크랩] 2011년 《문학사상》신인문학상 당선작 _ 도복희 / 그녀의 사막 (외) (0) | 2011.12.28 |
[스크랩] 꽃에 대하여 /배창환 (0) | 2011.11.17 |
[스크랩] 혼자 부르는 이름 하나 /홍신선 (0) | 2011.11.13 |
[스크랩] <시> 초겨울 (0) | 2011.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