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이가림

율카라마 2011. 11. 23. 17:37

수차(水車) 위의 생 (외 5편)

 

   이가림

 

 

 

눈 쓰린 땀방울 훔치며

훔치며

걷고 또 걸어서

가까스로 다다른 땅끝엔

언제나 아픈 외발로 디뎌야 하는

낭떠러지뿐

 

한 줌의 소금을 위해

한 가마니의 가난을 위해

우리 모두는

해가 지지 않는 수차(水車) 위에서

제 그림자를 밟고

또 밟는 걸까

 

땡볕 아래

눈 쓰린 땀방울에 젖어 걷는 자여

그대 부질없는 인생

한없이 바닷물을 퍼올리고

또 퍼올리노라면

언젠가

열명길에 들어

눈물로 빚은 소금 한 부대는

내놓을 수 있으리

 

 

 

오랑캐꽃 1

 

 

 

나를 짓밟아다오 제발

수세식 변소에 팔려 온 이 비천한 몸

억울하게 모가지가 부러진 채

유리컵에나 꽂혀 썩어가는 외로움을

이 눈물겨운 목숨을, 누가 알랴

말라비틀어진 고향의 얼굴을 만나면

죽고 싶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슬픈 전라도 계집애의 죄,

풀꽃들만 흐느끼는 낯익은 핏줄의 벌판은

이미 닳아진 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쑥을 뜯고 있는 주름살의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갈 수 있을까

이 곪아 터지지도 못하는 아픔

맥주잔에 넘치는 비애의 거품을 마시고

더럽게 더럽게 웃는 밤이여

나를 짓밟아다오 제발

 

 

 

물총새잡이의 기억 1

 

 

 

어디선가

황색부리 하늘색 허리의

물총새가 날아와

시냇물에 닿을락 말락

총알같이 빠르게 물살 튕기며

번뜩이는 찬란한 배때기의

한 마리 피라미를 물고

커다란 무지개의 활[弓]보다 높이

가뭇없이 사라진 뒤

 

뭉게구름 속에

분명 둥지를 틀고 있을

그 물총새의 푸른 울음소리 귓가에 맴돌아

하 많은 여름날

고무줄 새총으로

새하얀 신기한 구름 걸려 있는

천길 포플러의 우듬지를

얼마나 수없이 쏘았던가

 

 

 

겨울의 불꽃

—W에게

 

 

 

겨울 저자에서 몇 되의 석유와 배추를 사들고

다자이 오사무(太宰治)같이 시든 남자를 만나러 오는 그대여

하나님의 기침소리보다 더 적막한 눈발이

퍼부어 내리는 이 백팔번뇌의 뜰에서 입맞추자

 

 

 

순간의 거울 7

—상응

 

 

 

내가 문득

보조개 이쁜 누이를 바라보듯

꽃 한 송이 바라보니

새하얀 빛깔로

웃는다

 

가늘게 떠는

그 웃음소리에 놀라

잠 깬 이슬들이

내게 말을 걸어

이름을 묻는다

 

난 눈길 없는 눈길로

바라보는 돌,

그대들이 바라보면

소리 없는 소리로

웃는 돌

 

 

 

(北)

 

 

 

사철 석탄 가루를 싣고 오는

열하 승덕(熱河昇德)의 바람 속에 서서 엄마는

홍건적(紅巾賊)같이 무섭기만 한 호밀들의 허리를

쓰러넘기며

부끄러운 달을 마중하였다 멀리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외길 따라

눈물 나는 행주치마로 가고 있었다

마른 말똥거름 따위 검불 따위

꺼멓게 널리운 모닥불의 방천뚝을 지날 때마다

어찌나 키 큰 송전선주가 잉잉 울었던지

귀신처럼 무서웠다 지연(紙鳶)이 목매달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이던가 애견(愛犬) 쫑이 죽고

빨간 새끼들만 남아 기어다니는 헛간

나도 한 마리 강아지 되어 바자니던 것을

오줌싸개의 나라에서는 자주 폭군이 되어

활 쏘는 이순신의 손자의 손자

한 웃음소리에도 어둠이 무너지고

한 돌팔매에도 참새 떼들은 떨어졌다

노을 속 참깨를 뿌린 듯이

 

 

 

                            —활판 시선집 『지금, 언제나 지금』(시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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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 1943년 만주 열하 출생. 성균관대학교 불문과 졸업. 프랑스 루앙대학교 불문학 박사.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돌의 언어」 가작 입선,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氷河期」 당선. 시집 『빙하기』『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슬픈 반도』『순간의 거울』『내 마음의 협궤열차』 『바람개비별』, 활판 시선집 『지금, 언제나 지금』. 계간《시와시학》주간 역임. 현재 인하대 명예교수,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만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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