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서쪽
이곳에 다다른 햇살은 지상에서 가장 가파른 절벽이다
본 적 없는 태양의 뒤편 그 저녁이 우리의 주기를 이루어
지구가 내내 어깨를 기대 저물어 갈 때
국경의 여인숙은 불을 켜고
하루를 떠내려 온 우리들 행장을 풀고 태양의 적멸을 보네 이곳은 고대사원에 뚫린 비밀의 구멍 그리하여 나란히 선 우리들 젖은 옷깃을 말리고 소리가 된 적 없는 말들이 흘러가는 동안 멈추어 서서 귀 기울이는 이는 없었네 육지에 다다르지 못한 파도들이 밀려와 지평선을 만들었으나 태양은 수시로 몸을 바꿔 수평선을 몰아가고 나는 부신 눈을 자주 비비네
절벽이 된 햇살, 파편이 되어 능선을 베니 온몸에 차마 꽃이 되지 못한 피멍들 피고 나란히 선 우리들 끝내 울지도 못하고
바람이 버리고 간 말과 눈물이 몰락하는 서쪽에 앉아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오랜 유배지의 벽에 기대니
달이 걸어와 이마를 어루만지네
다시 강을 건너 이 변방까지 찾아오는 태양의 동쪽
국경의 옛 여인숙이 불을 끄는 시간
북극의 피아노
검은 눈보라를 쥘 때는 모래의 발소리를 기억해
낮고 좁아 희미한 계단이 잘 보이도록
걷다 보면 점점 더 북쪽으로
갈수록 뒤돌아보는 일이 줄었다
나무는 어둠 쪽으로 기울어 호수도 말이 줄었다
엷어지는 이 시간은 회색과 암청색의 건반 사이
음계 없는 피아노는 밤새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누군가 내 발치에서 울다 가는 꿈
지금은 흐린 색들이 서로의 옷소매를 꿰매는 시간
어제는 얼음을 쓰다듬다가 얼음의 결정에 눈을 찔렀지
내일은 좀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동공 안의 공동(空洞)이
공동 안의 적막이 나를 쓰다듬어준다면
낡은 양탄자의 보푸라기처럼 떠는 날들과
혼자인 구름과 함께 혼자가 되는 구름의 날들
—꼭, 다시 만나자 사라지도록
누군가 내 머리맡에 써놓고 간 낙서
꼭 다시 만나요
침묵의 영토 끝에서
나는 나를 여기서 저기까지 옮겨놓는다
흰 말과 검은 음 사이 반듯한 결정들의 결정을 지나
얼굴에서 얼굴을 지우며
손끝에서 마음을 지우며
모퉁이에서 모서리를 지우며 점점 더 북쪽으로
처음의 영토로 간다
사라지도록
가위
오수에 빠졌네 차갑고 더러운 나는 가능하면 이곳에서 먼 곳을 상상하네 상상이 가능할 때까지 가상과 상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은 쓸쓸하고 조용한 꿈 나는 마음껏 도망치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사라진 것들이 하나씩 되살아나네 한때 사랑한다 말하던 사람들
미쳤니,라고 물으면 미쳤냐고 대답하는 혼잣말
힘드니,라고 물으면 힘드냐고 되묻는 혼잣말
혼자 꾸는 꿈
꿈의 그늘
그늘을 그늘로 바라볼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면
필요 이상의 피로와 이상(異常)을 지난
지금 여기는 수상(水上)의 들판
내 말은 흔들려 수풀처럼
내 말은 지워져 소망 없이
덥고 슬픈 오수에 빠졌네 나는 내 말을 되돌릴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말의 고삐는 늦춰지지 않는다네 고삐를 잃은 말들이 갈 곳도 모른 채 달리는 들판 한 무리의 양들이 구름을 몰고 떠난 자리는 사라진 동공처럼 어둡고 무서워 아침에 깨어나는 일도 캄캄하고 슬픈 일 이제 돌아온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네 한때 사랑한다 믿었던 오래된 사람들
슬프다고 생각하면 꿈이 되는 슬픈 잠
외롭다고 생각하면 잠이 되는 외로운 꿈
어느 날 아무도 깨우지 않는 오수에 빠졌네
버려진 정원에 버린 나를 보며 버려진 내가 우는
오수의 풍경 없는 꿈
가시를 위하여
통증을 용서해요
부분이면서 어느덧 전체가 된 나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사이,
날을 세운 날은 아니지만
나이면서 당신이고,
당신이지만 나인
시간을 견뎌요
나는 기원에서 멀어졌다 이미 나는 숲의 변형이며 혹은 바다의 변종이다 형식에서 멀어져 속도 없고 겉도 없는 어떤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사라진 내용이지만, 여전히 전체를 제압한다 형식을 제압한다
나는 혀의 어순이다 돌기들 사이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하나의 돌기는 혀일까 바늘일까 미각은 우리의 옛 성질이었으나 지금 너는, 나는 혀인지 바늘인지, 짠맛인지 쓴맛인지 수시로 아픔을 확인하는 너인지 나인지
같은 온도를 갖기 이전에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러니 제 분을 못 이긴 팔매질을 용서해요
때로 실감의 모서리에 손을 베일 때마다 차가운 그 각도의 질량에 대해 생각한다
때로 나는 말의 어법을 가졌지만 통증으로 변이된, 겨우 피 흘리지 않는 실감이다 비유로 은폐되는 실감의 형식이다
혀끝으로 나를 찾는 당신,
피 흘리지 않고 아팠지만
다가설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날을 세운 날들은 아니었지만
찾는 순간 서로를 지울 우리
통증을 용서해요 나를 잊어요
—시집 『얼룩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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