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語들
이만섭
신국의 말은 천 개의 귀를 지니고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구석에 가서 중얼거린다
그런데 벽과 벽 사이 주름 접힌 귀가 있다
다시 창가로 나와 내 흘린 말들을 주어 드는데
문밖의 새와 나무가 비켜보고 있다
새도 나무도 없는 빈들에 나가
소리치듯 혼잣말을 허공에 쏟아내는데
지나가던 바람이 채어 간다, 너의 것이 아니라는 듯
어디에도 함부로 내놓을 수 없는 말들,
길을 걸으며 무시로 내뱉은 그간의 말들은
들풀이 듣고 샛강이 듣고 미루나무가 들었을 터이니
나의 산책길도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저 귀들이 쫓아와
예리한 날로 나를 베이려 든다
입때껏 나는 궁핍을 채우기 위해
저들이 지닌 말들을 조탁하다가 허전함만 키웠는가,
오늘은 강가에 가서 내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강은 이미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내가 흘린 말들의 역순을 밟아
그간의 부끄러움을 거둬들이며
내 말을 관통하는 저들의 귀를 배워야겠다
『시로 여는 세상』2012년 겨울호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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