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섭, 「바람의 냄새」(낭송 노계현)
바람의 냄새
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 봐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느냐는 듯이 바람이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시집『마계』(민음사, 2010) ―출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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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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