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홍해리

율카라마 2013. 7. 19. 15:47

1) 그리움을 위하여 / 홍해리(洪海里) 
 
                   
 
  서로 스쳐 지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너를
  보고 불러도 들리지 않는 너를
  허망한 이 거리에서
  이 모래틈에서
  창백한 이마를 날리고 섰는 너를 위하여,

그림자도 없이 흔들리며 돌아오는 오늘밤은 시를 쓸 것
만 같다 어두운 밤을 몇몇이 어우러져 막소주 몇 잔에 서
대문 네거리 하늘은 더 높아 보이고 두둥럿이 떠오른 저
달도 하늘의 술잔에 젖었는지 뿌연 달무리를 안고 있다
잠들기 전에 잠들기 전에 이 허전한 가슴으로 피가 도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네 속에 있는 나를
  내 속에 있는 너를
  우린 벌써 박살을 냈다.

  아득한 나의 목소리
  아득한 너의 목소리
  아득한 우리 목소리.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썩은 사과 냄새에 취해
  나는 내 그림자도 잃고 헤매임이여.

  흙벽에 등을 대고 듣던
  새벽녘 선한 공기를 찍는 까치소리
  한낮 솔숲의 뻐꾸기 울음
  그믐밤 칠흑빛 소쩍새 울음.

  보리푸름 위 종달새 밝은 봄빛과
  삘기풀 찔레꽃의 평활 위하여
  이 묵은 시간 거리의 떠남을 위하여.
.........................

 

2) 그리움  애란愛蘭 
 
밤하늘
반짝반짝
날고 있는
새.

그 새 날개 타고
황금벌판을 가는
한 마리 눈먼
섬.

 (시문학 1976. 7월호)

 

~~~~~~~~~~~~~~~

 

3) 그리움
 
               
그의 투명한 성에 피어 있는
성에 같은
하늘꽃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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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리움
 
            
대추꽃의 초록이나
탱자꽃의 하양,

들장미의 빨강이나
석류꽃의 선홍,

아니면
싸늘하나 따스히 녹는,

아이스크림같은
안타까움 한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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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움 - 비진도 에서
 
                    
이승 저승 따로 없는 바다에서는
물너울 너훌너훌 그 앞에서는
사랑도 미움도 매한가진데
숨기고 폭로하고 대들고 용서하고
울면서 웃어 주고 죽으며 사는 사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리운 사람
시작과 끝 따로 없는 바다에 와서
그 사람 생각나네 그리워지네

 

~~~~~~~~~~~~~~~

 

6) 그리운 서울
 
 
그대 가슴속

토끼풀꽃 한 송이 핀다 한들
여기가 서울이겠느냐
그리운 서울이겠느냐
적막강산
불어터진 젖가슴 행려병자여
까마귀 떼가 내리는 것을 보아라
쏟아져 나와 하수구처럼 흐르는
인산인해
급히들 무리지어 돌아가는
은빛 죽음의 길
덜커덕거리는 창문 밖
복면익명
북한산도 이제 시커멓게 멍이 들었구나
속수무책
서러운 꿈으로 피는 서울
먹통 불통
사랑으로 이어지던 골목길은

오리무중
가마득한 내일은
망망대해
그리운 서울
검은 수족관

햇살이여
그리운 햇살이여
일점광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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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황금감옥(黃金監獄)


나른한 봄날

코피 터진다


꺽정이 같은 놈

황금감옥에 갇혀 있다

금빛 도포를 입고

벙어리뻐꾸기 울듯, 후훗후훗


호박벌 파락파락 날개를 친다


꺽정이란 놈이 이 집 저 집 휘젓고 다녀야

풍년 든다

언제


눈감아도 환하고

신명나게 춤추던 세상 한 번 있었던가


호박꽃도 꽃이냐고

못생긴 여자라 욕하지 마라

티끌세상 무슨 한이 있다고

시집 못 간 처녀들

배꼽 물러 떨어지고 말면 어쩌라고


시비(柴扉) 걸지 마라

꺽정이가 날아야

호박 같은 세상 둥글둥글 굴러간다


황금감옥은 네 속에 있다.


~~~~~~~~~~~~~~~~

8) 여자를 밝히다


여자를 밝힌다고 욕하지 마라

음란한 놈이라고

관음증 환자라고 치부하지 마라

입때껏 치부를 한 것도 없고

드러낼 치부도 하나 없다

여자를 활짝 핀 꽃 같이 밝혀주는 것은

무엇일까

환한 대낮같이 열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둔 길을 갈 때

등롱을 들듯

꽃이라도 들어야 하는 것인가

등명접시 받쳐 놓고

불을 댕길 일인가, 아니지,

여자는 스스로 열리는 호수

환하게 빛나는 대지라서

하늘 아래

세상에서 여자를 밝힐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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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오동꽃은 지면서 비를 부른다


온몸에 오소소 솟아 있는

반짝이는 작은 털 더듬이 삼아

오동꽃 통째로 낙하하고 있다

보일 듯 말 듯

아주 연한 보랏빛으로,

시나브로

동백꽃 지듯 툭! 툭! 지고 있다

처음으로 너를 주워 드니

끈끈한 그리움이 손을 잡는다

무작정 추락하는

네 마지막 아름다운 헌신,

하나의 열매를 위해

나도 이렇듯 다 포기하고

그냥 뛰어내리고 싶다

떨어져 내린 꽃 위로

공양하듯

또, 비가 두런두런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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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동짓달 보름달


누가 빨아댔는지

입술이 얼얼하겠다

빨랫줄에 달빛이 하얗게 널려


바지랑대가 빨랫줄을 팽팽히 떠받치고 있다

꼿꼿하다

화살이다 칼날이다

새파랗게 질린 하늘로 시위가 푸르르 떨고


보름보름 부풀더니

푸른 기운을 저 혼자 울컥울컥

토해내는 달

저 하늘에 시위나겠다


철새 몇 마리 그리고 가는 곧은 길 위로

흰 빨래 옷가지 하나 흔들린다


지상에선

긴긴 밤 참이라도 드는지

별들이 빙 둘러앉아 눈을 반짝이고

동치미 동이에 달이 풍덩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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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라일락꽃 빛소리


아스팔트 위
기진한
아지랭이
벅찬 신열로
자주꽃 속을 넘나드는
금빛새
종종종
자릴 옮기며
피고 있다
꽃술마다
오르는 불길
모닥불에 묻히는 하늘
불을 지피는
여학생들의
발뒤꿈치
하얀 어질머리 가락
꽃사태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암내같은
한 다발씩의
어지러움
아픈
開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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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5월이 오거든 

 

날선 비수 한 자루 가슴에 품어라   

미처 날숨 못 토하는 산것 있거든   

명줄 틔워 일어나 하늘 밝히게   

무딘 칼이라도 하나 가슴에 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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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꽃나무 아래 서면 눈이 슬픈 사람아
이 봄날 마음 둔 것들 눈독들이다
눈멀면 꽃 지고 상처도 사라지는가
욕하지 마라, 산 것들 물오른다고
죽을 줄 모르고 달려오는 저 바람
마음도 주기 전 날아가 버리고 마니
네게 주는 눈길 쌓이면 무덤 되리라
꽃은 피어 온 세상 기가 넘쳐나지만
허기진 가난이면 또 어떻겠느냐
윤이월 달 아래 벙그는 저 빈 자궁들
제발 죄 받을 일이라도 있어야겠다
취하지 않는 파도가 하늘에 닿아
아무래도 혼자서는 못 마시겠네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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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빛나는 계절  

 

예식장 가는 길목 조그만 꽃집   
주인은 외출 중   
꽃이 피어 있다   
비인 공간을 가득 채운 阡의 얼굴   
파뿌리도 보인다   
예식장 지하 신부 미용실   
몇 송이 장미꽃의 분홍빛 친화   
그들의 손과 손 사이   
참숯으로 피일 저 서늘한 신부   
호밀밭을 들락이던 바람을 타고   
살찐 말의 갈기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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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게 가는 길 없다고 해도


나에게 가는 길이 없다고 해도

안개 속으로 길을 떠나네

어차피 사는 일이 길을 가는 것

오리무중 헤매는 일 아니던가

이슬 속으로 젖어 가는 길 어쩔 수 없네

천근만근 끌어내리는 바짓부리 땅을 끌며

구절초 쑥부쟁이 하염없이 피어 있는

가을 속으로 나는 가네 나는 가네

하늘이 모든 노래를 지상으로 내려놓을 때

나는 떠나네 노래 속으로 나를 찾아서

흙냄새 풀냄새 바람 냄새 물 냄새 맑아

자음과 모음을 제대로 짚어내는 풀벌레들

노래가 노래를 벗어 비로소 노래가 되는

길이 멀리 달아나 나의 길이 없는 곳으로

바람 잠깐 불어 빗방울 몇 개 후득이고

금방 하늘이 파랗게 가슴 저린 쓸쓸함 속으로

몸 달아 애가 타고 가슴이 아파

한 마디 한 소절에 오체투지 나는 가네

너를 찾아 간다 나의 시여 나의 노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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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한 편의 시를 찾아서


내가, 나를 떠나고

나를 떠나보냅니다

우주가 내 속으로 굴러 들어옵니다

내가 우주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나를 찾아봅니다

나를 그려 봅니다

요즘도 새벽이면 가벼운 날개도 없이

나는 비어 있는 우주의 허공을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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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시작(詩作)


초고(草稿)를 끌어안고


밀다 만 밀가루 반죽이거나

마구 잘려진 나무토막,

금나고 깨진 대리석 덩이이든가

아무렇게나 흩어진 동판이나 쇳조각

하늘에 놀고 있는 뭉게구름이나

바다 끝에 서 있는 수평선,

낯선 세상 고고의 울음을 세우려

집도의 앞에 누워 있는 산모

소신공양을 하고 태어날 아침에,

물맛이나 공기 빛깔로

낙화유수 이 강산을 물들이거나,

일 보 일 배로 한 生을 재는 자벌레나

백년을 가도 제자리인 달팽이처럼

나의 일생을 할(喝)!할 푸른 혓바닥을 위하여

소금을 뿌린다, 왕소금을 듬뿍듬뿍 뿌린다

황토 흙도 문 앞에 깔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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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미완성 시에게


저 혼자 몸이 달아

네가 무릎을 꿇느냐 아니면 내가 꿇느냐

속이 타고 애가 달아

오체투지를 할 것이냐 항복을 할 것이냐

난리 치고 안달하며

먹느냐 먹히느냐 죽느냐 사느냐

끈질기게 매달리며

잡느냐 잡히느냐 씹느냐 씹히느냐

검게 탄 가슴 황토 냄새로

함께 노래하기 위하여

너에게 뛰어들고,

너른 세상으로 사라지기 위하여

광활한 우주로 날기 위하여

무작정 엎어지고

손목을 부여잡고

찬바람 골목길, 달빛 이우는

격정적인 입맞춤을 위한 나의 맹목과

눈을 감는 너의 외로움

속옷 한 번 벗기지 못하고

물어뜯어도 너는 피 한 방울 나지 않느니

푸른 입술 둥근 허리를 안고

영원을 꿈꾸다 정점에 이르지 못한 채

떠나고 또 떠나면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외로움,

세상은 지독한 감옥이지만

너와 나의 경계는 없다는 것을

너는 너 나는 나의 세상에서

섞이고 섞이는 너와 나를 위하여

기억하라 마지막으로 기억하라

나의 미완성 금빛 詩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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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순순한 시


눈을 감아도 꿈이요

눈을 떠도 꿈이니

달빛에서 향이 나고

해에서도 꽃이 피네

설레는 햇살에 눈이 부셔

알게 모르게 사윈 것들마다

달뜨는 초록 알갱이들처럼

바람으로 돌아오는가

나물밥 먹으면 나물 향기 나고

물을 마시면 골짜기 바람

이우는 달이 차면

그리움도 지독한 형벌이라

너를 네게 보내는 죄를 짓는 일

나는 눈도 가리고

귀도 막노니 숨 가쁜 일 없어라

生이란 상처투성이

추억은 까맣게 타서 아픔이 되고

한 세월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시 쓰는 일이 아닐 건가

한 편의 순순한 시

너에게 무작정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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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작(詩作)


오순도순 살자고 흙벽돌 찍어

집을 짓듯이,


어린것들 굶기지 않으려고

농사를 짓듯이,


아픈 아이 위해 먼 길 달려가

약을 짓듯이,


시집가는 딸아이를 위하여

옷을 짓듯이,


길 떠나는 이 허기질까

새벽밥을 짓듯이,


기쁨에게도 슬픔에게도 넉넉히

미소를 짓듯이,


늦둥이 아들 녀석 귀히 되라고

이름을 짓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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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시의 경제학

  - 한 편의 시, 천년의 시


대는 침묵으로 소리를 담고

속 빈 파가 화관을 머리에 이듯,


속에선 조용히 물이 오르고

겉으론 불길 담담한,


온몸이 탱탱하고

아랫도리 뿌듯해 안고만 싶은,


오래 묵을수록

반짝반짝 빛나는 역린(逆鱗)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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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나의 시는 나의 무덤


시 쓰는 것이 무덤 파는 일임을

이제야 알겠다

시는 무덤이다

제 무덤을 판다고 욕들 하지만

내 무덤은 내가 파는 것…

시간의 삽질로 땅을 파고

나를 눕히고 봉분을 쌓는다

시는 내 무덤이다.


빙빙 날고 있는

무덤 위의

하늘이 그의 무덤이다

그는 날개로,

바람으로 시를 쓴다

그가 쓰는 시를

풀과 나무가 받아 꽃으로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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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
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
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
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
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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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등나무 아래 서면/홍해리(洪海里)-

밤에 잠 깨어 등나무 아래 서면
흐느끼듯 흔들리는
보랏빛 등불이
여름밤을 밝히고,
하얀 여인들이 일어나
한밤중 잠 못 드는 피를 삭히며
옷을 벗고 또 벗는다

깨물어도 바숴지지 않을
혓바닥에서 부는 바람
살 밖으로 튀어나는 모래알을
한 알씩 한 알씩
입술에 박아놓고 있다.
끈끈하고 질긴 여름나무
불꽃을
온몸에 안고 있다.

그을음 없이 맨살로 타던
우리는
약쑥 냄새를 띄기도 하고
소금기 가신 들풀잎마다
바닷자락을 떠올리기도 한다.
죽고 또 죽는 남자
등은 그렇게 뻗어 올라서
여름을 압도하고
알몸으로 남는 칠월의 해일
바람만 공연히 떼미쳐 놓아
우리의 발밑까지 마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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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복사꽃 그늘에서

        
        
돌아서서
새실새실 웃기만 하던 계집애
여린 봄날을 후리러
언제 집을  뛰쳐나왔는지
바람도 그물에 와 걸리고 마는 대낮
연분홍 맨몸으로 팔락이고 있네.

신산한 적막강산
어지러운 꿈자리 노곤히 잠드는
꿈속에 길이 있다고
심란한 사내 달려가는 허공으로
언뜻 봄날은 지고
고 계집애 잠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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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호박


한 자리에 앉아 한평생 폭삭 늙었다

한때는 푸른 기운으로 이리저리 손 흔들며 죽죽 벋어나갔지
얼마나 헤맸던가
방방한 엉덩이 숨겨놓고
활개를 쳤지
때로는 오르지 못할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기도 했지
사람이 눈멀고 반하는 것도 한 때
꽃피던 시절 꺽정이 같은 떠돌이 사내 만나
천둥치고 벼락치는 날개짓 소리에 그만 혼이 나갔겠다
치맛자락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지
숱한 자식들 품고 살다 보니
한평생이 별것 아니더라고
구르는 돌멩이처럼 떠돌던 빈털털이 돌이 아범 돌아와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을 뱉고 있다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 돌담 위에 앉아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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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물의 뼈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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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일탈(逸脫)/홍해리-

1
귀 눈 등 똥
말 멱 목 발
배 볼 뺨 뼈
살 샅 손 숨
씹 이 입 좆
침 코 턱 털
피 혀 힘---

몸인 나,
너를 버리는데 백년이 걸린다
그것이 한평생이다.

2
내가 물이고
꽃이고 불이다
흙이고 바람이고 빛이다.

그리움 사랑 기다림 미움 사라짐 외로움 기쁨 부끄러움 슬픔 노여움과 눈물과 꿈,
옷과 밥과 집, 글과 헤어짐과 아쉬움과 만남 새로움 서글픔
그리고 어제 괴로움 술 오늘 서러움 노래 모레 두려움 춤 안타까움 놀라움 쓸쓸함
(내일은 없다)
그리고 사람과 삶, 가장 아름다운 불꽃처럼
우리말로 된 이름씨들 앞에서
한없이 하릴없이 하염없이 힘이 빠지는 것은
아직 내게 어둠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한 그릇의 밥이 있어서일까
일탈이다, 어차피 逸脫이다.

~~~~~~~~~~~~~~~~~~~

28) 하얀 고독
 
너는
암코양이

밤 깊어 어둠이 짙을수록
울음소리 더욱 애절한
발정난 암코양이

동녘 훤히 터 올 때
슬슬슬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밤새도록 헤매다녀
눈 붉게 충혈된
새벽 이슬에 젖은 털을 털며
사라지는
비릿한 발걸음
유령 같은.
~~~~~~~~~~~~~~~~~~~~~

 

29) 모과 木瓜

 

 

과일전 망신이나 시킨다는

울퉁불퉁한 얼굴

속은 또 얼마나 시큼텁텁한가

 

조용히 묻혀잇는 기억 속

누렇게 부황 든 초등학교 순덕이

빛바랜 사진 한 장

 

그리움으로 고즈넉한 기억 저 편

눈을 흘기던 분홍빛 꽃잎

마음 둔 곳 어디던가

 

속 내 드러내지 않고

떠나간 자리

오래오래 번지는 추억이라는 향香

 

 

2007년 <우리시>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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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_ 석류石榴

 

줄듯

줄듯

 

입맛만 다시게 하고

주지 않는

 

겉멋만 들어

화려하고

 

가득한 듯

텅 빈

 

먹음직하나

침만 고이게 하는

 

얼굴이 동그란

그 여자

 

입술 뾰족 내밀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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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_ 겨울 놀 지다 / 홍해리



누가 망치를 내리치고 있었다
그때마다
바닷속으로 하릴없이 박히는
거대한 황금 기둥
거꾸로 보면 거대한 둥근 불꽃을
누가 바닷속에서 떠받들고 있었다
쩌릿쩌릿 옆구리에 경련이 왔다
황홀이었다
절정이었다
막장은 얼마나 먼가
우주 인력으로
끓어오르는 막무가내의 바다
입술이 푸르게 젖어
밤새도록 깊은 꿈을 꾸고 있었다

~~~~~~~~~~~~~~~~~

 

32) 아내의 여자


일요일 늦은 오후
아내가 거울 앞에 앉아 있다

할머니가 되었어도
할머니 소리 듣기 싫다고
대책없이 출현하는 점령군들에게
총을 난사하고 있다

새치라면 가려서 뽑기나 하지
여기저기 무작정 튀어나오는
게릴라, 게릴라들과
속수무책의 전투 한판

단정히 앉아
정성스레 싸우고 있는
아내의 여자

~~~~~~~~~~~~~~~

 

33) 투망도投網圖 / 홍해리

 

 

 

 

무시로 목선을 타고
출항하는 나의 의식은
칠흑같은 밤바다
물결 따라 흔들리다가
만선의 부푼 기대를 깨고
귀향하는 때가 많다

투망은 언제나
첫새벽이 좋다
가장 신선한 고기 떼의
빛나는 옆구리
그 찬란한 순수의 비늘
반짝반짝 재끼는
아아, 태양의 눈부신 유혹
천사만사의 햇살에
잠 깨어 출렁이는 물결
나의 손은 떨어
바다를 물주름 잡는다

산호수림의 해저
저 아름다운 어군의 흐름을
보아, 층층이 흐르는 무리
나의 투망에 걸리는
지순한 고기 떼를 보아

잠이 덜 깬 파도는
토착어의 옆구릴 건드리다
아침 햇살에 놀라
이선하는 것을 가끔 본다

파선에 매달려 온
실망의 귀항에서
다시 목선을 밀고 드리우는
한낮의 투망은
청자의 항아리
동동 바다 위에 뜬
고려의 하늘
파도는 고갤 들고 날름대며
외양으로 손짓을 한다

언제나 혼자서 항해하는
나의 목선은
조난의 두려움도 없이
강선처럼 파도를 밀고 나간다

저 푸르른 바다
해명에 흔들리는 하오의 투망
고층 건물의 그늘에서
으깨지고 상한 어물을
이방인처럼 주어 모은 손으로
어기어차 어기어차
다시 먼 바다로 목선을 민다

어부림을 지나
수평선으로 멀리 나갔다가
조난 당한 선편과
다시 기운 투망
난파된 밀수선에서 밀려온 밀어와
바닷바람에 쩔은 바다 사람들의
걸걸힌 말투
소금 내음새

갈매기 깃에 펄럭이는
일몰의 바다
관능의 춤을 추는 바다
둥 둥 두둥 둥 둥
푸른 치맛자락 내둘리며
흰 살결 속을 들내지 않고
덩실덩실 원시의 춤을 춘다
그때 나의 본능은 살아
하얀 골편이 떠오르는
외양에서 돌아온다

만선이 못 된 뱃전에서 바라보면
넋처럼 피는 저녁 노을
오색찬연한 몇 마리의 열대어
그들의 마지막 항의
해질 녘 나의 투망에 걸린
이 몇 마리의 파닥임을

서천엔 은하
은하직녀의 손 가락가락
밤바다를 두드리고 있다
해면에 흐르는 어부사
칠흑 만 길 해곡에까지
그곳에 흐르는 어군
물 가르며 물 가르며
나의 의식을 흔들고 있다

나의 곁을 지나는 어선의
휘파람 소리......
휘익휙 나의 허전한 귀항을
풀 이파리처럼 흔들고 있다만

찢겨진 투망을 걷어 올리며
닻을 내리는 나의 의식은
찬란한 어군의 흐름 따라
싱싱한 생선의 노랫가락을 그려
다시 투망을 드리운다
가장 신선한 새벽 투망을!

 

 

 (『投網圖』선명문화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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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지는 꽃에는 향기가 있다

 

한겨울 잠든 지붕 아래

밤새도록 도굴한 하얀 뼈

백지에 묻는다

내 영혼늬 그리운 밥상, 따순

뼈와 뼈에 틈색 난다

빛을 내지 못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그대와 나의 살피

그곳에 피어나는 노래

 

-----영원을 노래하라 우주를 노래하라

       생명을 노래하라 자연을 노래하라

       영원은 찰나 속에 묻고

       찰나는 영원 속에 있어

       그들을 잇는 밀삐는 하나라네-----

 

절필하라 절필하라 외치며

추락하는 마침표들

백지 위에 허상의 집을 짓고

향기 나는 뼈로, 부드러운 뼈로

현현한 나의 시여

지지 않는 꽃에는 향기가 나지 않는다

모순으로 마감하는

나의 뼈여, 나의 시여.

 

시집『푸른 느낌표』1969년

 

 ~~~~~~~~~~~~~~~~

 

34)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35) 절정을 위하여

조선낫 날 빛 같은 사랑도
풀잎 끝의 이슬일 뿐
절정에 달하기 전
이미 내려가는 길
풀섶에 떨어진 붉은 꽃잎, 꽃잎들
하릴없이 떨어져 누운 그 위에
노랑나비 혼자 앉아
하마하마 기다리고 있다
절망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시인이여
슬픔도 눈물로 씻고 씻으면
수정 보석이 되고
상처도 꽃으로 벌어
깊을수록 향으로 피어오르는가
마음을 닦아볼까
스스로 깊어지는 숲
속으로 들어가
흔적도 남기지 않는
바람을 만나네
무거운 마음 하나 머물고 있는
바위 속을 지나니
절정은 이미 기울어지고
풀 새 벌레 한 마리 들리지 않네
목숨 지닌 너에게나 나에게나
절정은 없다.

 

~~~~~~~~~~~~~~~~~~~

36) 종(鐘)이 있는 풍경


종은 혼자서 울지 않는다
종은 스스로 울지않고
맞을 수록 맑고 고운 소리를 짓는다
종 (鐘)은 소리가 부리는 종
울림의 몸,
소리의 자궁.
소리는 떨며
가명가명 길을 지우고
금빛으로 퍼지는 울림을 낳는다

2
종은 맞을수록 뜨거운 몸으로 운다
나의 귀는 종
소리가 고요 속에 잠들어 있다
종은 나의 꿈을 깨우는 아름다운 폭탄
그 몸 속에 눈뜬 폭약이 있다
위로의 말 한 마디를 위하여
종은 마침내 소리의 집에서 쉰다

3
종은 때려야 산다
선다
제 분을 삭여 파르르 파르르 떨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울음으로
하나의 풍경이 된다

~~~~~~~~~~~~~~

37) 초여름에서 늦봄까지


1
그해 여름
혼자
빨갛게 소리치는
저 장미꽃더미 아래
나는
추웠네
한겨울이었네
속살 드러내고 속살대는
초여름 문턱에 서서
나무들은 옷을 껴입고 있었네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2
천둥과 번개 사이로
불볕더위가 느릿느릿 지나가고
흰 이슬 방울방울
지천으로 내리는
황금벌판---
발가벗고 누워도
부끄럽지 않았네
온몸의 광채
저 높은 거지중천으로
흥겹게 퍼져
하늘을 덮고 있었네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의 알갱이도 금빛으로 익어
투명한 빛살로 원을 그리고
견고한 열매 속
하늘로 하늘로 길이 열리고 있었네.

3
온 세상에 흰눈이 내려쌓여
천지가 적막에 잠길 때
포근한 눈이불을 뒤집어쓴
보리밭 이랑이랑
별로 뜨고 있었네, 나는,
긴긴 밤 서성이며
잠 못 드는 저 보리싹들을 안고
일어서는 은빛 대지는
가장 지순한 한 편의 위대한 시를
깊이 깊이 품어안은 채
수천 수만의 꽃봉오리를 밝히고 있었네.

4
산비둘기 울음으로
쑥 냉이 꽃다지 벌금자리로
돋는 사랑이여
차라리 질경이 속에 들어가
작디 작은 씨앗이 되어
그리움이 이는 풀밭길
연초록으로 피어나고 싶네
빛과 어둠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을 잇는 끈이 되어
두 손길 마주잡고
눈에 젖는 사랑
따숩은 세상길에
그의 시간이 되고 싶네
무량공간으로, 나는.

~~~~~~~~~~~~~~~~~

 

38) 난蘭과 시詩

                

 

진초록 보석으로 날개를 달고

눈을 감고 눈을 뜬다

만 가지 시름이 적막 속으로 사라지고

가장 지순한 발바닥이 젖어 있다

내장산 비자림 딸깍다릴 지날 때에도

영원은 고요로이 잠들어 있거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

투명한 이른 봄날 이른 아침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인女人의 중심中心

실한 무게의 남근男根이 하늘에 걸려 있다.

 

                     -졸시 "난꽃이 피면

 

 ~~~~~~~~~~~~~~~~~~~~

 

39)  가을 - 홍해리

   

만났던 이들을

모두 버리고

이제 비인 손으로

돌아와

푸른 하늘을 보네

맑아진 이마

오랜만에

만나는

그대의 살빛

無明인

내가

나와 만나

싸운다

~~~~~~~~~~~~~~~~~

 

40)  가을 단상

   

한때는

오로지 올라가기 위해

올라서기 위하여

올라갔었지마는

이제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

내려가는 일

아름답게 내려가는 일


산천초목마다

저렇듯 마지막 단장을 하고

황홀하게 불을 밝히니

하늘이 더 높고 화안하다

들녘의 계절도

무거운 고개를 대지의 가슴에 묻고

깊은 사색에 젖어

이제 우리 모두 우주의 잠에 들 때


맑게 울려오는 가락

천지 가득 퍼지고

잔잔히 번지는 저녁놀

들판의 허수아비를 감싸안는다


산자락 무덤가의 구절초도

시드는 향기로 한 해를 마감하고

그리고

과일이 달려 있던 자리마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되니,


오르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기 위하여

아름답게 내려가기 위하여

깊이 깊이 껴안기 위하여

오르는 것뿐.

~~~~~~~~~~~~~~~~~~

 

41)  가을 연가

   

이런

저녁녘에 홀로 서서

그대여

내 그대에게서

숨 막히게 끝없는 바다를 보노니,


그 바다를 가로지르는

맑은 바람 속에서

물소리에 씻겨

막막하던 푸르름

애타던 일

모두 잔잔해지고,


맑은 넋의 살 속

흘러가는 세월의 기슭에

그리움이란 말 한 마디

새기고 새기노니,


기다린다는

쓸쓸함이란 아픔도

화려하기만 한

이런 가을 저녁에

그대여.

~~~~~~~~~~~~~~~~~

 

42) 가을빛

   

새벽녘 빗소리에 잠이 깨이다

비온 다음

투욱 툭

튀어나오는 가을빛

맑은 살의 깊은 잠을 위하여

햇살은 부숴지고 있느니

이 따스함이여

솔잎 사이

부드러운 바람은 영글어

혼자서 생각으로 일어서고 있느니

반야여

별빛도 익어

뚜욱 뚝 떨어지는 가을밤

은빛 이마에 빛나는

수수밭 위의 기러기 울음

한 점

두 점

깊어가는 작별인사.

~~~~~~~~~~~~~~~~

 

43)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먼저 떠나간 시인들의 눈빛이

비취로 풀려 하늘에 찬다

하늘 가득 보석으로 반짝이다

지상으로 지상으로 내린다

그들이 남겨놓은 노래들이

노을처럼 그리움처럼

밤새도록 적막강산을 가득 채우고

사람들은 저녁이 와도

등불을 밝히지 못한다


가을이 오면

허공중에 떠돌던

마른 뼈다귀 같은 비애를 안고

가을걷이 끝난 들판으로 가라

한 줄의 시를 찾아

허수아비 목쉰 노래를 따라가면

저 높고 푸른 하늘밑

누구도 채우지 못하는 공간을

맑은 영혼의 가락으로

저들 노래들이 와 선다

~~~~~~~~~~~~~~

44) 가벼운 바람

 

사람아

사랑아

외로워야 사람이 된다 않더냐

괴로워야 사랑이 된다 않더냐

개미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얼음판 같은 세상으로

멀리 마실갔다 돌아오는 길

나를 방생하노니

먼지처럼 날아가라

해탈이다

밤안개 자분자분 사라지고 있는

섣달 열여드레 달을 배경으로

내 생의 무게가 싸늘해

나는 겨자씨만큼 가볍다.

~~~~~~~~~~~~~~~~

 

45) 5월에 길을 잃다

 

팍팍한 길 나 홀로 예까지 왔네
나 이제 막막한 길 가지 못하네
눈길 끄는 곳마다
찔레꽃 입술 너무 매워서
마음가는 곳마다
하늘 너무 푸르러 나는 못 가네.

발길 닿는 곳마다 길은 길이니
갈 수 없어도 가야 하나
길은 모두 물로 들어가고
산으로 들어가니
바닷길, 황톳길 따라 가야 하나
돌아설 수 없어 나는 가야 하나.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나

 

~~~~~~~~~~~~~~~~~~~

46) 사랑이여 가을에는

- 향부자香附子

 

사랑이여 가을에는

네 몸에 불을 질러라

다 태워버려라

한여름 피어오르던 짙은 젊음

이제 마른 풀잎으로 남아

시든 허상뿐

겉불을 질러

겉으로 무성한 허무의 껍질

다 태우고 나면

허망한 잿더미

바람에 풀풀 날리고

다 쓸려가고 나면

남을 것은 이 지상엔 없다

땅 속 깊이 묻혀

불로도 타지 않고,

죽지 않고 박혀 있는

사랑의 뿌리

다시 캐내어

불로 사루고 사루면

까맣게 남는 새까만 알갱이

그것도 사랑은 아니다

다시 씻고 부시고 닦으면

한 줌 금으로 남을까

다 타서 없어진

네 사랑이 향기로울까

사랑이여

이 가을에는

네 몸에 불을 질러라

다 태워버려라.

 

(시집『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

 

47) 시詩를 찾아서

 

세상이 다 시인데,

앞에서 춤을 추던 놈들

눈으로, 귀로 들어와

가슴속에서 반짝이다

둥지를 틀고 있다

바다에 그물을 친다

나의 그물은 코가 너무 커

신선한 시치 한 마리 걸리지 않는다

싱싱한 놈들 다 도망치고

겨우 눈먼 몇 마리 파닥이는 걸

시라고, 시라고 나는 우긴다

오늘밤엔 하늘에 낚시를 던져

별 한 마리 낚아 볼까

허공의 옆구리나 끌어당겨 볼까

물가에 잠방대는 나의 영혼

지는 노을이나 낚을까 하다

미늘만 떨어져 나가고

수줍게 옷고름 푸는 별도 잡지 못하고

천년이 간다

길은 산보다 낮은데

나는 산 위에서

우모羽毛 같은 몸으로

천리는 더 가야 하리라

시를 만나려면.

 

(시집『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

48) 사랑의 뿌리


지난 봄날 나는 너를 보냈다
그 동안 든 정 때문에 찰칵
마지막 사진을 찍고 
모를 것이 정이라고
그간 서로 붙어 살아왔다고
떠나려 하지 않는 너
단호하게 결별을 선언했지만
뿌리는 두고, 너는
몸만 가버렸다
필요 없는 사랑은 화근거리
사랑이면 은밀히 묻어두었을 것을
사랑의 오독이었을까
시간이 가면
뿌리도 저절로 솟아오르리라
지층 깊이 박혀 있는 너를 보내려
다시 입 꽉 다물고 촬영을 하고
몽혼을 하고
집게로 뿌리를 물고 뽑아올린다
바르르 바르르 몸이 떨리고
자지러질 듯 혼절할 듯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너도 나도 울고 있었다
나도 너를 떠나보내기 아쉬웠던가
재차 마취를 하고
무지막지하게 떨치려 해도
옴짝달싹도 않던 너---
드디어 손을 놓고 너는 울었다
너 있던  자리 얼기설기 꿰매고 
허탈과 통증으로 일그러진 한밤
시커먼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온다
너의 흔적이, 너의 상처가,
뼛속의 적막이 온몸을 찍어누른다


사랑은 부드러운 힘, 
지독한
또는 
악랄한.


(시집『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

49) 금란초金蘭草 

 

무등無等의

산록


금빛

화관을 이고


황홀한 

화엄세계를


한 송이로


열고 있는

여자女子.

~~~~~~~~~~~~~~~~

50) 상사화相思花 

 

내가

마음을 비워

네게로 가듯

너도

몸 버리고

마음만으로 

내게로 오라

너는

내 자리를 비우고

나는

네 자리를 채우자

오명가명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

마음의 끝이 지고

산그늘 강물에 잠기우듯

그리움은

넘쳐 넘쳐 길을 끊나니

저문저문 저무는 강가에서

보라

저 물이 울며 가는 곳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곤비한 영혼 하나

낯설게 떠도는 것을!

 

(시집『푸른 느낌표!』2008, 우리글

~~~~~~~~~~~~~~~~~~~~

51) 산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 
―隱寂庵에서
      

꽃 지며 피는 이파리도 연하고 고와라
때가 되면 자는 바람에도 봄비처럼 내리는
엷은 듯 붉은빛 꽃 이파리 이파리여
잠깐 머물던 자리 버리고 하릴없이,
혹은 홀연히 오리나무 사이사이로
하르르하르르 내리는 산골짜기 암자터
기왕 가야할 길 망설일 것 있으랴만
우리들의 그리움도 사랑도 저리 지고 마는가
온 길이 어디고 갈 길이 어디든 어떠랴
하늘 가득 점점이 날리는 마음결마다
귀먹은 꽃 이파리 말도 못하고 아득히,
하늘하늘 깃털처럼 하염없이 지고 있는데
우리들 사는 게 구름결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가는 길이 물길 따르는 것일지라
흐르다 보면 우리도 문득 물빛으로 바래서
누군가를 위해 잠시 그들의 노래가 될 수 있으랴
재자재자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소리 따라
마음속 구름집도 그냥 삭아내리지마는
새로 피어나는 초록빛 이파리 더욱 고와라.

  

(시집『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
52) 먹통사랑 


제자리서만 앞뒤로 구르는

두 바퀴수레를 거느린 먹통,

먹통은 사랑이다

먹통은 먹줄을 늘여

목재나 석재 위에

곧은 선을 꼿꼿이 박아 놓는다

사물을 사물답게 낳기 위하여

둥근 먹통은 자궁이 된다

모든 생명체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도 어둡고

먹통도 깜깜하다

살아 있을 때는 빳빳하나

먹줄은 죽으면 곧은 직선을 남겨 놓고

다시 부드럽게 이어진 원이 된다

원은 무한 찰나의 직선인 계집이요

직선은 영원한 원인 사내다

그것도 모르는 너는 진짜 먹통이다

원은 움직임인 생명이요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직선이 된다

둥근 대나무가 곧은 화살이 되어 날아가듯

탄생의 환희는 빛이 되어 피어난다

부드러운 실줄이 머금고 있는

먹물이고 싶다, 나는.

~~~~~~~~~~~~~~~~~

53) 엽서


시월 내내 피어오르는

난향이 천리를 달려 와

나의 창문을 두드립니다

천수관음처럼 서서

천의 손으로

향그런 말씀을 피우고 있는

새벽 세시

지구는 고요한 한 덩이 과일

우주에 동그마니 떠 있는데

천의 눈으로 펼치는

묵언 정진이나

장바닥에서 골라! 골라! 를 외치는 것이

뭐 다르리오마는

삐약삐약! 소리를 내며

눈을 살며시 뜨고

말문 트는 것을 보면

멀고 먼 길

홀로 가는 난향의 발길이

서늘하리니,

천리를 달려가 그대 창문에 닿으면

'여전히

묵언 정진 중이오니

답신은 사절합니다'

그렇게 받아 주십시오

그러나

아직 닿으려면 천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

54)  지독한 사랑

 

나,

이제

그대와 헤어지려 하네

지난

60년 동안 나를 먹여 살린

조강지처

그대를 이제 보내주려 하네

그간 단단하던 우리 사이

서서히 금이 가고

틈이 벌어져

이제 그대와 갈라서려 하나

그대는 떠나려 하지 않네

남은 생을 빛내기 위해

금빛 처녀 하나 모셔올까

헤어지는 기념으로

사진도 두 번이나 찍고

그대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던

나의 나태와 무관심을 나무랐지만

그대를 버리기

이렇게 힘들고 아플 줄이야

이 좋은 계절

빛나는 가을에

오, 나의 지독한 사랑,

6번 어금니여

나 이제 그대와 작별하려 하네!

~~~~~~~~~~~~~~~~~~~~

55) 白宮 속 까만 씨앗을 위하여

 

1
작년 여름
죽을둥살둥 죽-을-둥-살-둥
2층 지붕 TV 안테나까지 감고 올라가
하늘등을 달고 종을 울리던
말라버린 나팔꽃 줄기를 본다
아직도 쇠 파이프를 악착같이 움켜쥐고 있다
이미 길은 끊어지고
목숨도 다했지만
죽어서까지도 필사적이다.

2
올라갈수록 이파리도 커지고
줄기도 튼실해지던 너
네가 떨어뜨린 씨앗들이
올해도 마당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길을 찾아가는 것은 길을 내는 일
꽃을 피우는 일은 잠깐
그 아름다운 찰나를 위하여
너는 온몸으로 몸부림을 쳤다
얼마나 힘든 노역이었더냐
너의 몸이 손이었다
일손이었다.

3
몸으로 파이프를 장악하여 너는
왼쪽으로, 위로만 방향 지시를 했지
그것이 무슨 예언이었을까
아래쪽의 비난의 소리를 묵살하고
고통의 달콤한 맛을 즐기려 했을까
父祖의 권위를 지키고 싶었을까.

4
밑에서 뿌리를 잘라 놓아도
몸 안의 남은 피 한 방울까지 짜 올려
마지막 꽃송이를 피우고 나서야
잎은 시들고 줄기는 말라 파이프에 매달렸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힘으로
천리 먼 길 白宮 속 까만 씨앗을 익혀
피의 족보를 쓰는 독기와
서럽던 역사도 있어 너는 아름답다.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56) 찔레꽃 필 때 

 
제 가슴속
하얀 그리움의 감옥 한 채 짓고
기인긴 봄날
홀로
시퍼렇게 앓고 있는 까치독사
내가 줄 게 뭐냐고
먼 산에서
우는 뻐꾸기
해배될 날만 기다리는
오동나무 속
새끼 딱따구리
까맣게 저무는 봄날---.

~~~~~~~~~~~~~~~~

59) 조팝나무꽃

 


숱한 자식들
먹여 살리려
죽어라 일만 하다
가신
어머니,

다 큰 자식들
아직도
못 미더워
이밥 가득 광주리 이고
서 계신 밭머리,

산비둘기 먼 산에서 운다.

 

~~~~~~~~~~~~~~~~~~~~

60) 꽃다지꽃

 

꽃에서 꽃으로 가는 완행열차
나른한 봄날의 기적을 울리며 도착하고 있다
연초록 보드란 외투를 걸친 쬐그마한 계집애
샛노랗게 웃고 있는 앙증맞은 몸뚱어리
누가 천불나게 기다린다고
누가 저를 못 본다고
포한할까 봐 숨막히게 달려와서
얼음 녹아 흐르는 투명한 물소리에, 겨우내내
염장했던 그리움을 죄다 녹여, 산득산득
풀어 놓지만 애먼 것만 잡는 건 아닌지
나무들은 아직도 생각이 깊어 움쩍 않고
홀로 울고 있는 초등학교 풍금소리 가득 싣고
바글바글 끓고 있는 첫사랑,
꽃다지꽃.

~~~~~~~~~~~~~~~~~

61) 고추꽃을 보며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작고 보잘것없는 흰 꽃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어찌 저것이 밀애를 했나
푸른 고추를 달고
소리 소문도 없이 속에 하얀 씨앗을 가득 담는지
햇빛 쨍한 날
어느새 검붉게 피를 토하며
시뻘건 독을 모아
씨앗들을 노랗게 영글리는지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내는지
참,
모를 일일세
허구한 날
하고많은 꽃 다 제쳐두고
오늘 내 네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버린 영혼을 네 매운 몸으로
비벼대고 싶어서일까 몰라
오랫동안 햇빛에 취한 너를 보며
내 홀로 골몰하는 것은
너의 우화등선
아니 수중 침전을 위해서인가
드디어
네가 죽어 눈앞이 환하다
세상이 시원하다
어, 시원해,
잘 익어 곰삭은 고추장 만세!

~~~~~~~~~~~~~~~~~

62) 사랑은 덧없는 덫

-나팔꽃


1
금빛
햇살로
열려
바르르
떨다
주름주름
말리는
陰脣

2
허공만
가득한
대낮,
소리없이
지는
통꽃잎,
꽃잎들

3
사랑은
덧없는
덫.

~~~~~~~~~~~~~~~~

63) 點心에 대하여



점심은 한가운데 점을 보는 것이다
오늘 점심은 마음에 까만 점을 놓는다
아니, 가슴에 불을 켠다
배꼽은 텅 빈 바다에 둥둥 떠 돌고 있다
오늘 점심은 2500원짜리 자장면으로 때운다
매끄러운 면발의 먼 길을 들고 나면
전신으로 졸음이 솔솔 불어온다
자장자장 자장가도 흘러든다
금방 그릇 가득 희망과 절망이 출렁인다
2500원이면 퇴계 선생 두 분과
은빛 하늘을 날아가는 학이 한 마리
자장면을 비울 때는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이라고 해야 짜장,
맛이 더 나는지 알 수가 없다
나와 나 사이의 틈새를 날릴 소주 한잔 속에
가벼운 봄날을 새 한 마리 졸고 있다
도포를 입으면 도포짜리
삿갓을 쓰면 삿갓짜리가 되지만
도포도 없고 삿갓도 없어
봄날이 짜릿짜릿하다
슬픔의 힘은 아름답고 점심은 즐겁다
퇴계 두 분과 한 마리 학을
까만 자장면과 바꾸는 일은 위대한 거래다
눈을 감으면
세 마리 학이 나른나른 날고 있다.

 

~~~~~~~~~~~~~~~~~~~~

64) 추억, 지다


한여름 다 해질녘
봉숭아 꽃물을 들인다
꽃을 따 누이의 손톱마다
고운 물을 들인다
이쁜 반달 손톱 속에는 벌써
첫눈이 내린다
매미 소리 한철 같은 누이의
첫사랑이 내린다
추억이 짓는 아스라한 한숨소리
손톱 속으로 스며들고
손가락 꼭꼭 싸맨 그리움이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해 설핏한 저녁에 꽃물을 들이는
눈썹 마당에 이는 바람인 듯
슬슬슬 어스름이 내릴 때
가슴속에선 누가 북을 치고 있는지
다소곳 여민 적삼 안으로
그리움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입술 촉촉 젖어 살짝 깨무는 소리
어스레한 누이의 젖은 눈가로
봉숭아꽃 하나 둘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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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처음이라는 말


'처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겨우냐
'첫'자만 들어도 가슴 설레지 않느냐
첫 만남도 그렇고
풋사랑의 첫 키스는 또 어떠냐
사랑도 첫사랑이지
첫날밤, 첫새벽, 첫정, 첫걸음, 첫나들이
나는 너에게 마지막 남자
너는 나에게 첫 여자이고 싶지
첫차를 타고 떠나라
막차가 끊기면 막막하지 않더냐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지만
세상은 새롭지 않은 것 하나 없지
찰나가 영원이듯
生은 울음으로 시작해 침묵으로 끝나는
물로 시작해 불로 끝나는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긴 여로
처음이란 말이 얼마나 좋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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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찔레꽃


장미꽃 어질머리 사이
찔레꽃 한 그루
옥양목 속적삼으로 피어 있다.

돈도 칼도 다 소용없다고
사랑도 복수도 부질없다고
지나고 나서야 하릴없이 고개 끄덕이는
천릿길 유배와 하늘 보고 서 있는 선비.

왜 슬픔은 가시처럼 자꾸 배어나오는지
무장무장 물결표로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리움으로
세상 가득 흰 물이 드는구나.

밤이면 사기등잔 심지 돋워 밝혀 놓고
치마폭 다소곳이 여미지도 못하고 가는
달빛 잣아 젖은 사연 올올 엮는데,

바람도 눈 감고 서서 잠시 쉴 때면
생기짚어 피지 않았어도
찔레꽃 마악 몸 씻은 듯 풋풋하여
선비는 귀가 푸르게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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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처녀치마

철쭉꽃 날개 달고 날아오르는 날
은빛 햇살은 오리나무 사이사이
나른, 하게 절로 풀어져 내리고,
은자나 된 듯 치마를 펼쳐 놓고
과거처럼 앉아 있는 처녀치마
네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면
몸 안에 천의 강이 흐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꽃대 하나 세워 놓고
구름집의 별들과 교신하고 있는
너의 침묵과 천근 고요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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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황홀한 봄날

 


우이도원牛耳桃源 남쪽
100년 묵은 오동나무
까막딱따구리 수놈이
딱딱딱, 따악, 따앆, 따앜,
빨간 관을 자랑하며
동쪽으로 문을 내고
허공을 찍어 오동나무 하얀 속살을
지상으로 버리면서
집짓기에 부산하고,
암놈은 옆의 나무에서
따르르르, 따르르르, 옮겨 앉으며
딱, 딱, 딱,
먹이를 캐고 있다
새들마다
순금빛 햇살에 눈이 부셔
물오른 목소리로 색색거리고,
연둣빛, 연분홍, 샛노랑 속에
세상을 오르고 내리면서
버림으로써, 비로소, 완성하는
까막딱따구리의
황홀한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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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투명한 슬픔

 

봄이 오면 남에게 보이는 일도 간지럽다
여윈 몸의 은빛 추억으로 피우는 바람
그 속에 깨어 있는 눈물의 애처로움이여
은백양나무 껍질 같은 햇살의 누런 욕망
땅이 웃는다 어눌하게 하늘도 따라 웃는다
버들강아지 솜털 종소리로 흐르는 세월
남쪽으로 어깨를 돌리고 투명하게 빛난다
봄날은 스스로 드러내는 상처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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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개화開花

 

 

바람 한 점 없는데

매화나무 풍경이 운다

 

아득한 경계를 넘어

가도 가도 사막길 같은 날

물고기가 눈을 뜬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꽃 피는 소리에 놀라

허공에서 몸뚱이를 가만가만 흔들고 있다

꽃그늘에 앉아

술잔마다 꽃배를 띄운던

소인묵객騷人墨客들

마음 빼앗겨

잠시 주춤하는 사이

뼈만 남은 가지마다

폭발하는,

 

오오, 저 푸른 화약花藥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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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바늘과 바람

                                      

 

내게 허공이 생길 때마다 아내는 나의 빈 자리를 용케도
찾아내어 그 자리마다 바늘을 하나씩 박아 놓습니다 한 개
한 개의 바늘이 천이 되고 만이 되어 가슴에 와 박힐 때마다
나는 신음으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비인 들판을 달려 갑
니다 동양의 모든 고뇌는 다 제 것인 양 가슴 쓰리며 하늘을
향하여 서른 여섯 개의 바람을 날립니다 이제까지는 그 바
람이 바람으로 끝이 나고 말았지마는 이제는 바람의 끝에서
빠알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새벽녘 아
내의 아지랑이로 넘실대는 파도의 기슭마다 은빛 금빛 비늘
을 반짝이는 고기 떼들이 무수히 무수히 하늘로 솟구쳐 오릅
니다.

 

 

(시집『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1980)

 

 

 

홍해리 시인

 

본명 洪峰義, 충북 청원 출생.
1964년 고려대학교 영문과 졸업.

시집 『투망도』(선명문화사, 1969) 『화사기』(시문학사, 1975) 『무교동』(태광문화사, 1976) 『우리들의 말』(삼보문화사, 1977)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민성사, 1980) 『홍해리 시선』(탐구신서 275, 탐구당, 1983)『대추꽃 초록빛』(동천사, 1987) 『청별』(동천사, 1989) 『은자의 북』(작가정신, 1992) 『난초밭 일궈 놓고』(동천사,1994) 『투명한 슬픔』(작가정신, 1996) 『애란』(우이동사람들, 1998) 봄, 벼락치다 (2006년)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현재 <우리시> 발행인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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