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대리자(代理者) /이재훈

율카라마 2013. 9. 3. 19:47

 

대리자(代理者)

 

 

      이재훈

 

 

 

 

 

 

 

 

   내 머리를 쓰다듬는 자들. 아무나 붙잡고 정죄하는 자들. 도시는 매일 불타오르네. 악한 자들만이 주위에 득실거리네. 그들은 내 목에 빨대를 꽂고 골수까지 빨아먹지. 철학자의 수백 마디를 좇는 자들. 등대지기의 침묵을 모르는 자들. 목에 창이 꽂혀 말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비굴하게 손을 비비는 자들. 냄새나는 사람들.

 

 

   구름이 하늘의 몸속으로 사라지는 날. 나는 한없이 약해져서 울고 있지. 위로하는 자는 없고 속이는 자가 너무 많아. 그렇지만 이 엄살은 모두 기획된 것. 더 타락하기 위해 준비된 것. 더 성스럽기 위해 예비한 것. 거룩한 엄살은 악마를 교란시킬 수 있는 무기라네.

 

 

   난 순진하게도 사람들의 말을 믿었네. 이 세계를 말하지 말고 써야 하네. 가르치는 언어가 아니라 감각을 일깨우는 글자들. 피부에 달라붙어 생채기를 내고 콧속으로 들어가 온몸을 서늘하게 만드는 단 한 줄의 시를 써야 하네.

 

 

   빨간 옷을 입고 신호등과 우측통행의 세계에 들어서면 온몸이 경직되지. 비겁한 자들은 고개 숙이면 자꾸 우쭐대지. 고개를 끄덕이면 자꾸 자랑하지. 고요한 밤에 이르면, 사방이 어지럽게 돌아가네. 귓속에서 청소기 소리가 들리네. 아무 냄새도 없이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네. 뜻을 알 수 없는 분절음들이 부호처럼 굉음 속에서 파닥거리네.

 

 

 

 

                       —《시작》2013년 여름호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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