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사랑할 때와 죽을 때(외 2편) /황학주

율카라마 2014. 5. 18. 15:58

사랑할 때와 죽을 때(외 2편)

 

   황학주

 

 

 

나는 겨울을 춥게 배우지 못하고

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했지만

 

누가 있다 방금 자리를 뜨자마자

누가 있다 깍지 속에서 풀려나와 눈보라 들판 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이란

매번 고드름이 달리려는 순간이나 녹으려는 순간을 훔치던 마음이었다

또한 당신의 눈부처와 마주 보고 달려 있었다

 

이제 들음들음 나도 갈 테고

언젠가 빈집에선

일생 녹은 자국이 남긴 빛들만

열리고 닫힐 것이다

 

그때에도 겨울은 더 있어서

누가 또 팽팽하게 매달려 올 것이다

자유를 춥게 배우며

그 몸 얼음 난간이 되어

 

 

 

만년(晩年)

 

 

 

조용한 동네 목욕탕 같은

하늘 귀퉁이로

목발에 몸을 기댄 저녁이 온다

 

만년은 갸륵한 곳

눈꺼풀 처진 등빛, 깨져간다

눈꺼풀이 맞닿을 때만 보이는 분별도 있다

 

저녁 가장자리에서

사랑의 중력 속으로 한번 더 시인이여,

외침조차 조용하여 기쁘다

 

하늘 귀퉁이 맥을 짚으며

물 흐르는 소리에 나는 웃음을 참는다

 

땅거미와 시간을 보내는

혼자만의 땅거미 무늬가 내게 있다

 

 

 

얼어붙은 시

 

 

 

한 사람의 젖어가는 눈동자를

한 사람이 어떻게 떠올리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를 잊지 말자

파탄이 몸을 준다면 받을 수 있겠니

 

숨 가쁘게 사랑한 적은 있으나

사랑의 시는 써본 적 없고

사랑에 쫓겨 진눈깨비를 열고

얼음 결정 속으로 뛰어내린 적 없으니

날마다 알뿌리처럼 둥글게 부푸는 사랑을 위해

지옥에 끌려간 적은 더욱 없지

 

예쁘기만 한 청첩이여

목이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좀 아프면 어때

아픔은 피투성이 우리가 두려울 텐데

 

순간마다 색스러워질 수 있는 것

그 모든 색 너머 투명한 얼음이 색색으로 빛나는,

색이 묻어나지 않는 색의

기쁨인 그것들

 

우리는 대못 자국 같은 눈빛이

맑디맑게 갠 다음 무엇을 보는지

여간해선 짐작 못한다

 

 

 

                         —시집『사랑할 때와 죽을 때』(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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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주 / 1954년 광주 출생.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갈 수 없는 쓸쓸함』『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너무나 얇은 生의 담요』『루시』『저녁의 연인들』『노랑꼬리 연』『某月某日의 별자리』『내 잠은 당신 잠의 다음이다』『사랑할 때와 죽을 때』.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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