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오민석

율카라마 2015. 3. 2. 08:50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오민

 

 

 

누구는

절반의 희망과

절반의 절망을 말하지만

지금 할 일은

참혹한 시간 속으로 더 들어가는 것

애인들은 등을 돌리고

꽃들은 마침내 졌다

지금 할 일은

믿음, 희망, 미래, 이런 단어들을

잠시 버리는 것

더 혹독하게 살의 냄새를 맡는 것

유령들과 작별하고

염통의 지도를 다시 읽는 것

아, 또다시 삶에 속은 자는

지게를 지고 다시 생계를 향해 가네

지금은 더 참혹하게 무너질 때

알몸의 비극과 결혼할 때

손쉬운 작별들과 작별할 때

그러니 벗들,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그리운 명륜여인숙

 

 

 

   잠 안 오는 밤 누워 명륜여인숙을 생각한다 만취의 이십대에 당신과 함께 몸을 누이던 곳 플라타너스 이파리 뚝뚝 떨어지는 거리를 겁도 없이 지나 명륜여인숙에 들 때 나는 삭풍의 길을 가고 있음을 몰랐네 사랑도 한때는 욕이었음을 그래서 침을 뱉으며 쉬발,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했었지 문학이 지고 철학도 잠든 한밤중 명륜여인숙 30촉 흐린 별빛 아래에서 우린 무엇이 되어도 좋았네 루카치와 헤겔과 김종삼이 나란히 잠든 명륜여인숙 혈관 속으로 알코올이 밤새 유랑할 때 뒤척이는 파도 위로 느닷없이 한파가 몰려오곤 했지 새벽 가로등 눈발에 묻혀갈 때 여인숙을 나오면 한 세상을 접은 듯 유숙의 종소리 멀리서 흩어지고 집 아닌 집을 찾아 우리는 다시 떠났지 푸른 정거장에 지금도 함께 서 있는 당신, 그리고 우리 젊은 날의, 그리운 명륜여인숙

 

 

 

보헤미안 랩소디

 

 

 

비 온다

비는 화살표처럼 떨어져

내 영혼의 청동지붕을 두드리고

나는 올챙이처럼 꼬무락거리며

부엉이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본다

이파리를 다 떨군 나무들

상처를 고스란히 내놓은 채

비 맞고 있는데

너는 어느 길가에 서서

누추한 저녁을 기다리느냐

오늘밤엔 오색 단풍이불을 덮고

흐린 등불이라도 켤 일이다

주막(酒幕)엔 이른 손님들

젖은 술잔을 돌리고

누군들 한번쯤 길 잃지 않았으리

따순 국밥이라도 나누면

세상이 장엄해질까

청동지붕 아래 하늘이 무겁다

 

 

 

                          —시집『그리운 명륜여인숙』(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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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석 / 1958년 충남 공주 출생. 1990년《한길문학》창간기념 신인상에 시 당선, 1993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문학평론 당선. 시집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그리운 명륜여인숙』, 문학이론서『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등. 현재 단국대 영문과 교수.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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