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ical language[詩語]

[스크랩] 박연준

율카라마 2015. 3. 8. 17:17

 

베누스 푸디카 (Venus pudica)

 

 

옛날, 옛날, 옛날

(뭐든지 세 번을 부르면, 내 앞에 와있는 느낌)

어둠을 반으로 가르면

그게 내 일곱 살 때 음부 모양

정확하고 아름다운 반달이 양쪽에 기대어있고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지

아름다운 틈이었으니까

 

연필을 물고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다

등허리를 쩍, 소리 나게 맞았고

목구멍에 연필이 박혀 죽을 뻔 했지 여러 번

살아남은 연필 끝에서 죽은 지렁이들이 튀어나와

연기처럼 흐르다 박혔고

그렇게 글자를 배웠지

 

, 사랑, 희망은 내가 외운 표음문자

습기, 죄의식, 겨우 되찾은 목소리, 가느다란 시는

내가 체득한 시간의 성격

 

나는 종종 큰 보자기에 싸여 버려졌고

쉽게 들통 났고,

맹랑했지

(끝내 버려지는 데 실패했으니까)

 

어느 여름 옥상에서 어떤 감정을 알게 됐는데

떠난 사람의 길고, 축축한, 잠옷이

펄럭이는 걸 보았지

 

사랑이 길어져 극단까지 밀고가다

견디지 못하면

지구 밖으로 밀려나는구나

피가 솟구치다 한꺼번에

증발하는구나

 

후에 책상 위에서 하는 몽정이 시, 라고 생각했다가

더 나중엔 그의 얼굴을 감싼 채 그늘로 밀려나는 게

사랑, 이라고 믿었지만

 

일곱 살 옥상에서 본 펄럭이는 잠옷만큼은

무엇도 더 슬프진 않았고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모든 면에서 가난해졌다

 



*베누스 푸디카:

비너스상이 취하고 있는 정숙한 자세를 뜻하는 미술용어로 한 손으로는 가슴을, 다른 손으로는 음부를 가리는 자세를 뜻함.





당신이 물고기로 잠든 밤

 

 

당신 손목 있잖아

책을 펼쳐 내 쪽을 향해 보여줄 때

약간 비틀어진 모양,

난 그게 나무 같더라

물기 없는 갈색

나 거기서 태어난 거 같아

연노랑 잎맥으로

연노랑은 노랑의 이복 자매

가을이 떨어트린 약속

 

당신 지느러미 있잖아

내 미래 같더라

새벽에 자꾸 떨어지니 주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발꿈치를 들고 침대 주위를 배회하며

물고기 흉내를 내볼까

당신은 잠

미래는 강

전부를 맡기고 흘러가볼까

 

더듬더듬 헤엄쳐갔지

 

당신 머리는 이불이 내민 주먹 같더라

여기가 백회인가,

무구한 풀들이 모여 기도하는 백회인가

이마 코 입술은 당신이 덮는 이불인가

심정이 어때요, 내가 물을 때

재빨리 펼쳐 덮는 이불인가

 

당신 꿈 있잖아

내가 혼곤하게 잠들었을 때

왼쪽 귀에다 부어주는 꿈

뜨거운 주물(鑄物)로 탄생하는 꿈

내 꿈이랑 합쳐져 굽이치는데

가끔 벅차서 내가 흘리는 거

아나? 나비물로 촥, 끼얹어져

침대를 적시는 거

      

날들이 까마귀 떼로 내려앉아 뒤에 숨고

나는 모른 체,

 

뭉개진 구절초 얼굴들 하나하나,

펴서,

꼼지락꼼지락 다시

피어나도록 애쓰는 거

당신은 알까?





고요한 싸움

 

 

버드나무 아래서 기다래지는 생각

버드나무는 기다리는 사람이

타는 그네

 

참새 무덤을 만든 사내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새가 되려다 실패한 고양이의 눈 속엔

비밀이 싹 튼다

허방과 실패로부터 도망가는

지네의 붉은 등

소문이 무성해지는 힘으로

봄은 푸르고

변심을 위해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버드나무를 무겁게 누르는 오후

여름은 승리가 아니다

 

흔들리는 것은

죽은 참새와 그네 위

기다래지는,

생각

 

버티어야 할 것은

버틸 수 없는 것들의 등에 기대

살기도 한다

 


 

비 오는 식탁

 

 

허기가 이기는 게임을 할래?

 

부엌, 할 때 하면 갈고리가 생각나

수많은 갈퀴들이 냄새를 긁어모으는 풍경

이름표를 떼고,

실체가 된 유령들이

식탁 아래 쌓이는 놀이를 할래?

말과 혀와 색을 숨기고,

위보다 아래를 풍성하게 해볼래?

 

울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물기 가득한 식탁

하나의 투명이 젓가락을 들자

누군가 귓속말 하고

 

갇히는 것 중 제일은 빗속이야

탁 타다닥,

발버둥치는 물의 리

 

식탁 위

올랐다 내려앉는 빗금처럼,

나풀거리는 젓가락들




울음 안개

 

 

윗집 아이가 운다

울음에 손톱이 돋아 허공을 긁고

아랫집 천장을 긁고

한낮의 정적에 미세한 홈을 판다

 

아이가 운다

울다 5초 간 악을 쓴다

악을,

악을,

악을,

 

악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이리도

지루하고 어두울까

 

아이의 발끝에 숨은 살기가

다섯 해 동안 소량씩 모아온 악이

안개가 되어 우리 집 천장을 뚫고

바닥에 고인다

찢을 수도

닦을 수도

건질 수도 없는

울음 안개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기다린다

쏟아질지 모르는 어떤 저의(底意)

어떤 벼랑,

어쩌면 비밀과 비밀을 찔러죽일

뾰족함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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