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지는 저녁
전동균
한껏 고개 뒤로 젖혀서
하늘의 시린 뺨을 핥아보자는 거다
저무는 햇살의 새끼손가락을 오물오물 빨아보자는 거다
산 밑 가겟집에 모여 날마다
새우깡에 소주 먹는 사람들,
주인 몰래 소주병 들고 가다 문턱에 걸려 자빠지는
실업(失業)의 금 간 얼굴들 더불어서
헐렁한 바지, 노끈으로 허리 묶고 서서
복사뼈 다 드러내고 서서
저 산이 놀란 고라니처럼
어스름 속으로 뛰어가는 것을 훔쳐보자는 거다
눈에서 눈으로, 발바닥에서 배꼽으로 번져오는
철 지나 흐드러진 꽃웃음을 껴안아보자는 거다
사랑과 죄와 고독이 하나이듯이, 그렇게
언 고욤이 단맛을 깊이 품듯이, 그렇게
뒤
꽃이 오고 있다
한 꽃송이에 꽃잎은 여섯
그중 둘은
벼락에서 왔다
사락 사라락
사락 사라락
그릇 속의 쌀알들이 젖고 있다
밤과 해일과
절벽 같은 마음을 품고
깊어지면서 순해지는
눈동자들의 빛
죽음에서 삶으로 흘러오는
삶에서 죽음으로 스며가는
모든 소리는 아프다
모든 소리는 숨소리여서
─멀리 오느라 애썼다,
거친 발바닥 씻어주는 손들이어서
아프고 낮고
캄캄하고 환하다
사락 사라락
사락 사그락
제 발자국을 지우며 걸어오는 것들
아무 데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것들
내가 장미라고 불렀던 것은
내가 장미라고 불렀던 것은 하이에나의 울부짖음이었다
내가 나뭇잎이라고 불렀던 것은 외눈박이 천사의 발이었다
내가 비라고 불렀던 것은 가을 산을 달리는 멧돼지떼, 상처를 꿰매는 바늘
수심 이천 미터의 장님 물고기였다 내가 사랑이라고, 시라고 불렀던 것은
항아리에 담긴 바람, 혹은 지저귀는 뼈
내가 집이라고 불렀던 것은 텅 비었거나 취객들 붐비는 막차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물으며
내가 나라고 불렀던 것은
뭉개진 진흙, 달과 화성과 수성이 일렬로 뜬 밤이었다 은하를 품은 먼지였다 잠자기 전에 빙빙 제자리를 도는 미친개였다
—시집『우리처럼 낯선』(2014)에서
동행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을 보았네
콩밭에 엎드린 머릿수건들과 탁 탁 신발을 터는 흙빛 손과 경운기 짐칸에 덜컹대는 첩첩능선들과
목이 잠긴, 목이 잠겨 가라앉는 시냇물 속에
낯선 별이 하나 떠오르고
팔월의 동서남북이 사라지고
한껏 부푼 덤불들의
더는 깊어지지 않는 웅덩이들의
떨림, 떨림들
발바닥을 핥는 털북숭이 개와 연신 쫑긋대는 귀와 빨래들의 펄럭임과
밝아졌다 흐려졌다 멀어지듯 다가오는 것들을 보았지
그들을 맞이하듯 넓은 이파리를 펼치는 오동나무와
들끓는 달리아 꽃빛들과
거미들의 춤과
순식간에 지나가는 비, 망혼(亡魂) 같은 빗방울들을
—《현대시》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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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균 / 1962년 경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6년《소설문학》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오래 비어 있는 길』『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거룩한 허기』『우리처럼 낯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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